고대사관련

[스크랩] <10> 고조선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있었다.

낙엽군자 2009. 1. 8. 21:54

“고조선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있었다”
고고학적 발굴과 중국 사료로 추적한 고조선의 비밀
 

동주는 넓은 직할영지를 갖고 있었으므로 동주의 왕은 여기서 나오는 소출로 강력한 상비군을 편성했다. 그러나 서주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낙읍으로 쫓겨 온 서주는 직할영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소출을 받지 못하고 제후국의 지원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부터는 주왕실을 등에 업은 제후국이 힘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수렴청정’을 하듯이 권력을 확보한 제후는 주왕실의 권위를 이용해 다른 제후국에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된 것. 그로 인해 제후국들은 ‘주왕실을 받든다’는 명분을 내걸고 패권을 노리는 전쟁에 들어갔는데, 이를 가리켜 ‘춘추시대’라고 한다.

춘추시대의 갈등이 지속되던 기원전 475년쯤 주나라 제후국 가운데 하나인 진(晉)나라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진공 밑에 있던 한(韓)씨, 위(魏)씨, 조(趙)씨의 3대부 가문이 진공을 쫓아내고 진나라를 3등분해,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른 제후국들도 주왕실이 내린 작위를 버리고 왕을 자처했다. 이로써 유명무실한 주왕실이 해체되고, 자칭 왕을 내세운 국가끼리 싸우는 시대로 들어갔는데, 이를 가리켜 ‘전국(戰國)시대’라고 한다.

전국시대는 ‘7웅’이라고 하는 일곱 나라의 힘이 셌다. 7웅 가운데 하나인 연(燕)나라는 지금의 북경 부근에 있었다. 상시적으로 전쟁을 치러온 연과 고조선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마니시와 윤내현

고구려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는 많아도 고조선이나 단군을 연구하는 학자는 적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첫째, 단군은 신화 속 인물일 수 있다는 부담 때문일 것이다. 둘째로는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무대를 밟아볼 수 없다는 것이 꼽힌다.
그러나 일본 학자는 단군에 대해 연구했다. 단군을 연구한 일본 학자로는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 1932)가 대표적이다. 1903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조선사를 연구하고 1914년 교토제국대 조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에 임명돼 단군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내용의 논문 ‘단군설화’를 발표했다. 이 논문이 나온 후 한국에서는 단군을 신화 속의 인물로 보는 시각이 강해졌다. 이마니시는 안정복이 주석을 단 중종본 ‘삼국사기’도 발굴했다. 그는 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간행한 삼국유사 중종 임신본 고조선 편에 있는 ‘석유환국(昔有桓)’이란 문구를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변조한 혐의도 받고 있다.
석유환국은 ‘옛날(고조선 이전)에 환국(한국)이 있었다’는 뜻이니, 환국의 존재는 보다 명쾌해진다. 그러나 나라 국자를 인할 인(因)자로 바꿔버리면 ‘옛날에 환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로 풀이돼 그 뜻이 확연히 축소된다. 이 때문에 많은 학자가 분노했다.
이마니시 류는 문헌고증을 통한 사학을 이 땅에 전수한 학자이다. 그런데 그의 영향으로 한국 사학계는 문헌고증에 지나치게 경도돼, 문헌에 나오지 않는 것과 위서(僞書) 시비가 있는 사료는 아예 보지 않으려는 전통이 생겼다.
단국대 윤내현 명예교수.
일본 학자가 단군을 연구해 설화 속 인물이라고 단정하자 그 많은 한국 사학자가 이를 뒤집지 못하는 것은 이마니시 류에 의해 도입된 문헌고증학이 끼친 악영향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강단(講壇) 사학계가 이마니시 콤플렉스에 빠져 있을 때 이를 극복하려고 한 대표적인 학자가 단국대의 윤내현 명예교수이다.
그는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를 전공했다. 그래서 이마니시 류의 사관에 얽매이지 않고 중국사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를 연구할 수 있었다.
그가 정리한 고조선사는 중국사와 얽혀 있는 관계사이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중국과 숱하게 싸우면서 유지돼왔으니 관계사가 아니고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정리하기 어렵다. 그는 중국 사료에 나오는 자료를 근거로 한국 고대사를 복원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윤교수는 고조선이 요서(遼西)에 있었다는 학설을 내놓았는데, 이마니시의 학설을 따르는 국내 학자들은 이를 부인하고 그를 이단자로 몰았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내몽고 자치구에 황화 문명과 구분되는 청동기 문명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윤 교수 주장이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재야 사학계를 중심으로 고조선이 난하 부근에 있었다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펼치며 고조선사는 물론이고 만주와 북한까지 삼키려고 하는 지금 윤 교수의 학설은 동북공정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이 되고 있다.

출처 : 사슴농장
글쓴이 : 가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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