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스크랩] 에디슨 그늘에 가린 빛나는 천재 니콜라 테슬라

낙엽군자 2014. 10. 26. 21:16


호텔 식당. 한 남자가 테이블 위에 놓인 식기들을

냅킨으로 하나씩 정성껏 닦고 있다.

식기가 더러웠을까? 아니다

 

호텔식당 관계자들은 그가 세균에 대해 병적인 강박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 남자의 자리에

놓인 식기들은 다른 자리에 있는 것들에 비해 더 신경 써서

깨끗하게 준비돼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냅킨 열여덟 장을 다 쓰고 나서야, 음식을 입에 넣는다.

 

음식을 먹는 과정도 예사롭지 않다.

음식을 한입 떠먹을 때마다 요리의 부피를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그는 그래야만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호텔 측에서 준비해 둔 냅킨은 왜 매번 열여덟 장일까?

그는 3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번호가 붙은 방이 아니면 투숙을 하지 않을 정도로 3이란 숫자를 좋아했다.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전력공학과 무선통신의 발전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거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이 남자의 이름과 마주치게 된다.

 

발명의 천재, 전기의 천재, 전기의 마술사, 교류의 아버지,

뉴욕의 마술사 등으로 불린 그의 이름은 니콜라 테슬라이다.

 

발명가로서 그는 에디슨만큼 대중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공학도들 사이에서 테슬라라는 이름은

천재라는 말과 동의어로 여겨진다.

 

니콜라 테슬라는 1856년 7월 1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을

스밀리안(오늘날 크로아티아 영역)에서 태어났다.

 정교회의 성직자였던 아버지는 아들도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테슬라는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음에도

 가재도구나 농사도구를 직접 발명해서 쓸 정도로 발명에 재능이 있었다.


젊은 시절의 니콜라 테슬라

 

다섯 살 때 이미 나름의 발명을 시작했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발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훗날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발명가이셨다.

만약 좋은 환경에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셨다면 이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기셨을 것이다.”

 

테슬라는 1875년에 그라츠 공과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람 다이너모라는 직류기계장치를 보았다.

 

그것은 발전기와 모터의 기능을 모두 하는 최신 기계였다.

이 장치에 푹 빠진 그는 직류 대신 교류로 작동하는 장치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 동안 받던 장학금이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그 후 프라하 대학에도 다녔지만 역시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1881년 테슬라는 부다페스트로 가 국영 전화국의 기술자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아이디어가 마치 계시처럼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1882년 겨울 그는 친구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는 해가 지는 모습에 취해 <파우스트>의 한 구절을 읊조리며 걷다가 갑자기 땅 위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친구에게 외쳤다.

 “이게 내 모터야!”

오래 전부터 구상했던 교류 모터의 작동 원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듬 해 파리로 건너간 테슬라는

콘티넨털에디슨 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하면서 조잡하나마 최초의 교류 유도 모터를 제작했다.

 

그리고 몇 차례 실험을 통해 그것이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발명품을 널리 알릴 기회를 잡지 못했다.

 

연구 결과를 시연중인 테슬라(1891년 왼쪽),테슬라의 연구실 이미지 사진(1900년)

 

1884년 그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으로 갔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 쓴 시 몇 편, 동전 몇 개, 하늘을 나는 기계와 관련된 계산 결과

그리고 동료가 토머스 에디슨에게 전해주라고 한 추천서가 전부였다.

 

 추천서 덕분에 그는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얼마 못 가 그만두고 만다.

그의 능력과 집중력만큼은 에디슨도 인정했지만, 그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바로 직류와 교류에 대한 생각 차이였다.

에디슨은 철저한 직류 신봉자였다.

그러니 교류에 집착하는 테슬러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던 것이다.

 

 

 

에디슨과 결별한 테슬라는 1885년에 조지 웨스팅하우스에게 교류 관련 장치들의 특허권을 팔았다.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 사이의 그 유명한 ‘전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은 격렬했다.

 에디슨은 “웨스팅하우스의 교류 시스템이 사용되기 시작하면

 6개월 안에 틀림없이 누군가가 죽을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고,

개나 고양이를 사 교류에 일부러 감전사시키려는 식으로 교류의 위험성을 과장해 선전했다.

 

하지만 전쟁의 승리는 교류 쪽으로 기울었다.

시카고 세계 박람회를 밝힐 전기로 교류가 채택된 것이다.

 

그리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수력발전소에 교류 시스템이 적용됨으로써

전쟁은 웨스팅하우스와 테슬라 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에게 받은 돈으로 개인 실험실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원격 조정으로 움직이는 자동 보트, 고주파 유도 코일인 테슬라 코일 등을 발명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이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1900년 그는 존 피어폰트 모건에게 투자를 받아 전세계로 통신을 할 수 있는 무선전신탑을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이 계획은 모건의 지원 철회 등으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건설되다 만 탑도 1차 세계 대전 중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그의 머리 속에 들어있던 수많은 구상들은

자금 부족 때문에 거의 대부분 실제로 구현되지 못한 채 노트 속에만 남게 된다.

 

 

 

1915년 테슬라는 에디슨과 또 한번 악연을 맺게 된다.

그가 에디슨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될 거라는 언론 보도가 연이어 난 것이다.

 

하지만 노벨상은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이 일과 관련된 온갖 추문이 나돌았다.

 

 테슬라가 에디슨과의 공동 수상을 거부했다는 주장도 있었고,

테슬라가 상금을 받지 못하도록

에디슨이 계략을 꾸몄다는 주장도 있었다.

 

2년 후, 테슬라는 미국 전기 공학자 협회가 주는 에디슨 메달을 여러 번의 거절 끝에 수락했다.

시상식 자리에서 그는

 “에디슨은 이론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고, 사전에 그 어떤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혼자 힘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테슬라의 이미지 사진(1878년 왼쪽), 테슬라 실험실을 찾은 마크 트웨인

 

그날 미국 전기 공학자 협회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연구가 있었기에 뢴트겐의 위대한 발견이 나올 수 있었고, 그의 연구가 나온 이후부터

 톰슨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이 업적을 이루어 현대 물리학의 개념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테슬라 씨는 마르코니의 연구보다 앞섰으며,

무선 전신과 기타 여러 과학 기술 분야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1943년 1월 8일 아침 호텔방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검시관은 그가 1월 7일 오후 10시 30분에 사망했으며, 사인은 관상동맥 혈전증이라고 밝혔다.

그는 1891년 6월 23일 전기 조명 시스템으로 받은 미국 특허를 비롯해

25개국에서 적어도 272개의 특허를 획득한 말 그대로 세기의 발명가였다.

 

장석봉(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장석봉씨는 '인류의 문화를 바꾼 물건 이야기 100'등을 쓴 젊은 저술가다.
나라 안팎의 책을 맹렬하게 읽는 독서가이기도 하다.
특히 과학에 관심이 커서 수 십 권의 책을 번역, 소개했다.
위인들의 일생을 다룬 외국 원서들을 즐겨 읽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피카소, 에디슨 등의 평전을 번역, 소개했다.
 

발행일 2009.06.23(네이버캐스트)

 

 

에디슨 그늘에 가린 빛나는 천재, 니콜라 테슬라

(한겨레신문  2007년1월31일 남 연정 과학전문 기자 )

 

미국의 주간지 ‘라이프 매거진’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의 한 사람으로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를 꼽았다.


이보다 앞서 2005년 말 크로아티아는 테슬라 탄생 150주년을 맞아
2006년을 ‘니콜라 테슬라의 해’로 정했고,
세르비아는 2006년 3월 베오그라드 국제공항 이름을 ‘테슬라 공항’으로 바꿨다.


테슬라를 두고 미국,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가 서로 자기 나라의 발명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856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으로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간 테슬라의 특이한 이력 때문이다.
과학자 테슬라,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세계가 이렇게 새롭게 주목을 하는 것일까?


테슬라는 현대 전기문명을 완성한 천재 과학자다.
현대 전기 문명의 근간이 되는 교류를 발명했으며,
수많은 전기 실험으로 ‘거의 모든 현대기술의 원조’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


시대를 앞선 과학적 통찰력과 독특한 삶 덕분에 많은 문학과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의 업적을 대표하는 교류발전기와 송·배전 시스템은 웨스팅하우스사(社)에서 일하면서 만들어냈다.

 
교류는 전기가 흐르는 방향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전기다.
직류에 비해 적은 손실로 전류를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어 현대 전기 문명을 일으킨 원천기술이다.


이 발명은 1895년 웨스팅하우스사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교류발전기를 사용한 수력발전소를 만들면서 빛을 보게 된다.
 지금 보고 있는 컴퓨터, 인터넷 등 수많은 전기문명이 테슬라의 교류 전기시스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1891년에는 유명한 테슬라코일(Tesla Coil)을 제작했다.
테슬라코일은 간단한 장치로 수십만 볼트의 전압을 만들어내는 장치다.

 

당시 60Hz에 불과했던 가정용 전기를 수천Hz의 고주파로 바꾸며 엄청난 고전압을 발생시킨 것이다.
 이를 사용해 테슬라는 최초의 형광등과 네온등도 만들었다.

 

고주파를 발생시키는 테슬라코일은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심지어 테슬라코일을 이용하면 물체에 자기장을 걸어 순간이동시킬 수 있다는 황당한 이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지난해 말 개봉한 ‘프레스티지’(Prestige) 영화를 보면
마술사 로버트가 순간이동마술을 펼치기 위해
테슬라를 찾아가 테슬라코일을 얻는 장면이 나온다.

 

테슬라코일의 유명세와 신비주의를 따르는 추종자 덕분에
테슬라는 ‘몽상가’ ‘미친 과학자’ ‘마술가’ 등의 호칭도 갖고 있다

.

또 테슬라는 한 발 앞선 발명가로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알려 줬다.
그가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후대 과학자들이 테슬라의 이론으로 만들어낸 기기들은 무궁무진하다.

 

 그는 테슬라코일을 이용한 실험 도중 라디오 신호를 같은 진동수로 공명시키면
송수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원리는 현재 라디오나 TV 등에 응용돼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무선조종장치를 연구하던 테슬라는 현대 로봇의 가능성도 언급했다.
제 1차 세계대전 무렵 잠수함을 탐지하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2차 대전에서 레이더로 실용화됐다.

 

지금도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의 발명노트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하고 있다.
테슬라의 발명을 헤아리자면 끝이 없다.

 

그는 전기기계용 전류전환장치, 발전기용 조절기, 무선통신기술, 고주파기술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기시스템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리고 전자현미경, 수력발전소, 형광등, 라디오, 무선조종보트,

자동차 속도계, 최초의 X선 사진, 레이더 등도
그의 작품이다.

 

많은 발명품을 만들고 현대 과학기술을 예견하고 아이디어를 준 테슬라는
그의 업적만큼 살았을 때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라이벌이었던 에디슨 때문에 그의 업적은 많이 가려졌다.

1882년 테슬라가 에디슨 연구소에 들어가 발전기와 전동기를 연구할 때부터
에디슨은 천재적인 테슬라의 재능을 질투에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애초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전기를 싼값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하면 거액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테슬라는 에디슨의 직류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며 교류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돈을 주기로 한 약속을 어겼고,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사표를 던진다.
직류방식을 고집한 에디슨은 테슬라의 교류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고압 교류로 동물을 죽이는 공개 실험을 하고, 교류 전기의자로 사형집행을 했다.

 

이 과정에서 테슬라는 교류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자신의 특허권을 포기하기도 했다.
1915년 뉴욕타임즈에 테슬라와 에디슨이 노벨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기사가 났지만
 결국 둘 다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데, 테슬라가 에디슨과 함께 상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기이한 삶처럼 그의 성격도 특이했다.
식사 전 광택이 나도록 스푼을 닦아야 하는 결벽증이 있었고, 손수건은 하얀 비단으로 된 것만 썼다.

 

호텔방의 호실은 3의 배수여야만 했고,
비둘기에 집착해 말년 그의 호텔방에는 비둘기 새장이 가득했다고 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발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테슬라는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다.

 

그러나 세상은 시대를 앞서갔던 테슬라를 잊지 않았다.
1961년 국제순수 및 응용물리학 연맹(IUPAP)의 표준단위 및 그 정의에 관한 위원회는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테슬라의 이름을 딴 T(Tesla)주1)를 쓰기로 했다.

 

전기를 이용한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던 테슬라의 이름에 걸맞는 단위라 하겠다.
이를 통해 테슬라의 이름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나게 되길 기대한다.

 

 

주1) 1T : 1㎡ 당 1Wb의 자기력선속밀도를 가리키는 단위.
자기장에 수직인 단위면적당 자기력선속으로 자기유도 된 정도를 나타낸다.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빛의 제국
출처 : 열 린 바 다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