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관련

[스크랩] 부일민족반역자가 세운 기업들[두산,대림,삼양그룹(삼양사),

낙엽군자 2009. 2. 2. 22:42
서울시 동대문구에 위치한 두산타워 건물.

"두산그룹"

두산은 소하기린맥주주식회사 설립날짜를 기준으로 1933년 12월18일을 설립일로 정했다. 소하기린맥주(주)는 두산의 모기업인 OB맥주의 전신. 주식회사를 갖춘 시점으로 설립일이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두산의 실제 나이는 1백세를 훌쩍 넘는다. 1896년 8월1일, 서울 종로4가에서 출발한 ‘박승직상점’이 두산의 최초 회사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최초 회사라는 게 두산의 설명이다.

 

두산그룹의 창업주 박승직

 朴承稷, 창씨명 三木承稷, 1864-1950

· 1919년 조선경제회 이사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겸 상담역

 

아들 박두병 (사망)은 슬하에 6남1녀

 

지난 2003년 1월 창원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가 회사측의 노조탄압에 항의해 분신하였다. 이로 인해 노동계는 두산제품 불매운동이라는 초강수로 대응하며 두산의 기업 이미지에도 상당한 타격을 가한 바 있다.

 

자칭 '민족자본'·'민족기업'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두산재벌이 어쩌자고 이처럼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같은 민족 성원임이 분명한 노동자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을까.


대부분의 재벌들과 마찬가지로 두산도 3대에 걸친 전통(?)있는 족벌기업이다.


두산의 출발은 현재의 오너인 박용성. 박용오 등의 할아버지인 박승직이 1896년 서울 배오개(지금의 종로4가 광장시장 4거리에서 창경궁쪽 코너)에서 면직물을 판매하는 '박승직상점'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 때 그의 나이 33세. 이를 두고 두산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한국의 개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1896년 8월, 당시 33세의 젊은이 박승직은 서울 배오개에 면직물을 주로 취급하는 조그만 점포를 개설하였습니다.


그 무렵 서민들에게 뛰어난 품질과 신용으로 널리 사랑받았던 그 작은가게가 바로 100년 기업 두산과 한국 기업의 근대사를 만들어낸 큰 터, 박승직 상점입니다. 서양의 문물이 물밀듯 밀려오면서 수동적으로 개화가 이루어지던 그 시절, 박승직이 배오개에 상점의 문을 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두산그룹 홈페이지에서)

 

마치 박승직을 시대의 조류를 내다본 선구적 민족 기업가로 묘사하고 있다.


연대로만 보자면 1896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의 치욕적인 해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꺾이고,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상황후가 살해되는 등 그야말로 조선이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서 서서히 망해가던 와중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개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이다.

 

그야말로 작은 면직물 장사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매판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시대의 배경을 살펴보자.

 

1905년 일본인 재정고문에 의해 시행된 화폐제도개혁은 조선인 상인들의 파산을 초래했다. 이에 맞서 경성의 조선인 상인들은 [경성상업회의소]를 결성하여 대처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더불어 값싼 일본의 면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과정에서 조선의 포목상들은 경쟁력을 잃어가며 몰락하고 있었고 박승직을 비롯한 조선인 포목상들은 창신사(彰信社)라는 합명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의 대규모 방직회사의 횡포에 맞서 또 다른 일본 회사인 후지(富士)가스방적회사와 계약을 맺어 활로는 모색하지만 질 낮은 제품을 공급하므로 결국 창신사는 후지와의 거래를 청산한다.

 

박승직의 수완이 돋보이는 대목은 여기서부터이다.


박승직은 창신사를 탈퇴하고 재빨리 공익사라는 회사를 만들어 일본 대기업 이토추 상사(伊藤忠商社)의 자본을 끌어들인다.


물론 이 과정에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도움도 작용하였다는 사실은 박승직의 매판성을 웅변해주고 있다.

 

박승직은 공익사 성장에 힘입어 제1차 세계대전리라는 전쟁특수도 톡톡히 누리며 조선 북부지역과 봉천·하얼빈에까지 사세를 확장하기에 이른다. 또 1916년에는 박가분 분공장을 1917년에는 곡물무역과 정미업을, 1918년 경성포목상조합 조합장이 된 후 1920년에 일본상인들과 연합하여 경성면사포상연합회를 만들어 부회장이 되었다. 1929년에 있었던 이 단체의 기념식장에서 미쓰이물산 서울지점장 박승직을 두고 '일조(日朝)협동기업'의 개척자라고 칭송하였다.

 

1919년 준친일단체인 조선경제회의 이사, 1921년에는 일선기업의 융합을 목적으로 열린 산업조사위원회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이 개최하였던 조선인산업대회의 지방위원, 1925년에는 상인들의 친목단체인 중앙번영회(경성상공협회로 개명) 회장,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겸 상담역,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 참여하는 등 자신이 진 빚을 갚기라고 하는 듯 열렬히 일제에 협력하기에 이른다.

 

1933년에는 OB맥주의 전신 격인 소화기린맥주(일본의 대표적 맥주회사였던 기린맥주가 대주주)이사로 참가한 박승직은 일제의 중국침략시기에 최대의 호황을 누린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곧 박승직 상점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사실을 보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민족자본과 민족기업의 실체는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로 창씨개명한 박승직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수완을 전수받은 아들 박두병은 1946년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 날 두산이란 이름을 등장시킨다. 이러한 그들 가계의 역사를 그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박승직은 또한 기업을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민족의 힘으로 키우고자 하였습니다.


(중략) 1906년 지금의 한국 전경련 성격을 지닌 한성상업회의소 설립에 참여했는데, 이 회의소는 훗날 대한상공회의소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발전하는 나라, 한국의 힘이 되어온 민족기업, 바로 두산입니다.


(중략) 두산은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들보다 한발 앞선 통찰력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견실한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두산의 역사는 바로 한국 기업의 역사이며 또한,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함께 해 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해 온 두산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기업으로 고객 여러분과 함께 성장해 나가겠습니다."(두산그룹 홈페이지에서)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한 우리 현실에서 근대적 기업을 무분별하게 민족기업으로 상정하는 것은 또 다른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박승직이 조선인이라는 혈통의 문제를 빼곤 두산이 민족기업이라는 브랜드를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기 짝이 없다.

 

진정한 의미의 민족기업·민족자본은 아직 존재한 바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매판 자본가의 의해서 족벌로 세습되는 두산과 같은 기업이 민족기업·민족자본 운운하는 현실이 상징적으로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더러운 뉴스,양심없는 더러운 뼈대집안

 

두산 총수일가, 33년간 수백억 비자금 조성”  2007.10.22

두산그룹 박용성 회장의 경우 회사 자금 286억원을 횡령하고 2838억원을 분식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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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그룹"

속죄하지 않는 작태 고발

대림산업 뇌물주고 수백억 이익 ‘건축비리 종합판’   chkNewsDate("20050411182549", "regdate_7"); 2005.04.11 (월) 오후 6:25

1997년 12월 대림 에서 받은 일부 자금은 이회창 당시 대선후보를 위한 대선자금

 고려개발 일용직 부풀려 수억 슬쩍      chkNewsDate("20030623000000", "regdate_9"); 2003.06.23 (월)

대림그룹 계열 고려개발

 

이준용회장

일제강점기 남면 면장이었던  "이규응"

 

이규응의 아들 고 이재준(수암) 대림산업 창업주

 5남4녀 가운데 차남(넷째)

 

 이재연(74) 아시안스타 회장이 막내 동생이다.

형은 고 이재형 전 국회의장이다.

38세에 최연소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고, 신민당 부총재와 민정당 대표를 거쳐 두 차례나 국회의장을

이 의장은 부인 류갑경씨와의 사이에 5남3녀를 뒀다. 이중 장남 홍용씨는 전 은행간부 출신인 배상준씨의 딸 염자씨와 결혼시켰고, 장녀 봉희씨를 원용덕(부일민족반역자) 전 헌병사령관의 아들인 창희씨에게 시집보냈다.

대림의 모태는 경기도 시흥군 남면의 한 촌락이다. 이 창업주는 1917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당시 남면 면장이었던 부친 이규응씨와 모친 양남옥씨 사이의 5남4녀 중 넷째다. 아들로는 차남이다.
서울에서 정미소를 경영했던 부친은 이 창업주를 사업가로 키울 요량으로 자신의 밑에 두었다. “사업 수완이 있으니 장사를 배우라”면서 보통학교만 마치고 정미소 일을 보게 한 것. 근면성과 성실성이 사업가가 갖춰야 할 기본요건이라고 부친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것도 이 때부터다.
부친이 운영하던 ‘한일정미소’에서 경영수업을 쌓던 이 창업주는 1939년 10월, 부평역 앞에 목재와 건설자재를 다루는 ‘부림상회’란 작은 점포를 냈다. 이것이 대림그룹의 뿌리다. 이후 사업이 번창해 1947년 토건업에 진출하면서 상호를 대림산업으로 바꾸었다.
이 창업주는 1936년 봄, 19세라는 젊은 나이에 수원 지주의 딸인 이경숙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씨는 장남 이준용씨(현 대림그룹 회장)를 낳고 1943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 창업주는 이후 박영복씨와 재혼, 차남 이부용씨(대림그룹 전 부회장)를 얻었다.
이 창업주는 다른 재벌그룹 총수들과는 달리 단촐하게 두 아들만 뒀다. 때문에 후계자 다툼도 없이 순리적으로 승계작업을 끝냈다.
장남인 이준용 회장은 순탄하게 경영자 수업을 쌓아온 편이다. 아버지 밑에서 정미소 일을 배웠던 이 창업주와는 달리 한껏 교육적 혜택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를 졸업, 미국 덴버 대학원에서 통계학을 공부하고 대학강사 생활을 하다가 귀국했다. 국내에서도 잠시 숭실대와 영남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서울 수송동 대림산업 사무실에 첫 출근한 것은 지난 1966년의 일이다. 이후 1979년부터 2대 그룹 총수 역할을 했다.

이 회장은 1965년 이화여대 출신의 한경진씨와 연애 결혼했다. 한씨의 부친인 한순성씨는 충남 천안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 전에 양가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끈질긴 설득 끝에 허락을 받아 결혼에 성공했다.

 

이 회장은 한씨와의 사이에 3남2녀를 뒀다. 진숙-해욱-해승-해창-진수 등이 그들이다. 장남인 해욱(현 대림산업 전무)

 

차남인 해승씨는 현재 미국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워싱턴 앤드 제퍼슨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대림산업 석유화학부문 경리부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3남 해창씨는 벤처캐피탈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1999년 3월16일, 최용권 삼환기업 회장의 장녀 윤영씨를 아내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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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그룹"

삼양라면과는 상관없는 기업입니다.삼양라면 피해없길

삼양설탕’(현 ‘큐원설탕’)으로 익숙한 삼양사

 

삼양사의 창업주 수당 김연수(이하 김 창업주·작고)

1896. 10. 1 전북 고창~1979. 12. 4 서울.

1939년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0년 중추원 참의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 반민특위 (부일민족반역자 처벌을 위한 국가기구)으로 옥고를 치른 김연수

 

 

김 창업주는 1896년 10월1일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부친 김경중씨와 모친 장흥고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의 장남이자 그의 가형되는 사람은 바로 유명한 인촌 김성수다. 당시 김 창업주의 부친은 1만5천석지기의 호남 최대거부

 

김 창업주는 이 같은 좋은 집안에서 자라 15세가 되던 1910년 12월8일,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박하진씨와 혼인을 맺었다. 하진씨는 광주출신으로 고부군수를 지낸 바 있는 집안의 여식. 결혼이후 그는 일본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최초의 한국인이 됐다.
김 창업주는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7남6녀로 13명의 자녀들을 두어 후일 거대한 혼맥의 시작을 이끌었다. 아들로는 장남 상준(86), 차남 상협(84), 3남 상홍(81), 4남 상돈(79), 5남 상하(78), 6남 상철(68), 막내 7남 상응(58) 등 7남과 장녀 상경(77), 차녀 상민(76), 3녀 정애(73), 4녀 영숙(70), 5녀 정유(69), 6녀 희경(64) 등의 6녀를 두었다.

 

 

 

      김상홍                김윤                     김원             김정                       김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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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반역자처단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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