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관련

이명박 시대를 맞이하는 어느 과학자의 고변

낙엽군자 2007. 12. 29. 22:17
이명박 시대를 맞이하는 어느 과학자의 고변
BBK 특검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며


 

  이종필 (ststnight)  





  
  
▲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19일 밤 서울 청계광장에서 환호하는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최윤석  이명박


애초에 나는 이명박 당선자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의견을 기사로 쓸 작정이었다. 비록 나는 이명박 당선자를 지지하지 않은 51%의 유권자에 속한 사람이지만, 어쨌든 정당한 선거 절차를 거쳐 당선된 새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 나가기를 기대하는 마음만은 간절하다.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세상을 등지고 두문동으로 들어간 고려 유신들이 그래도 백성들은 여전히 그 백성들이지 않느냐면서 황희를 내보낸 그 지극한 마음에 어찌 비할까 만은,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기초과학에 대한 획기적인 관점의 변화가 향후 국가생존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내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나는 며칠 동안이나 단 한 줄도 써 내려갈 수가 없었다.


이명박 당선자에게 과학도시가 어떻고 투자확대가 어떻고, 그런 한편 이 바닥의 현실이 이러저러하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내 양심을 속이는 짓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과학자는 진실을 추구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고 그 때문에 나는 소중한 국민의 세금으로 녹을 먹고 있다. 진실을 대면하는 과학자의 양심은 처절하다. 한 터럭의 의혹이라도 있을라치면 결코 논문을 쓸 수가 없다. 과학자들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과학은 온갖 난무하는 사이비 과학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옳고 그름에 매우 민감하다. 아니, 거의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종종 과학자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 또한 자신들이 연구하는 자연세계와 마찬가지로 어떤 근본적인 법칙과 룰이 잘 지켜지리라 기대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고리타분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세상에는 이렇듯 진실과 거짓을 끝까지 파헤쳐 확인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 그리고 선거 후 약 일주일이 지나면서 나는 한국사회의 지배층에 짙게 드리운 거짓의 먹구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지배층은 다름 아닌 한나라당과 이명박 당선자와 '조중동'이라 불리는 보수언론이다.


헌정 사상 초유의 정권탈환 덕분에 우리는 그 이전과 이후의 우리 자신을 비춰볼 수 있게 되었다. 5년 전의 ‘코드인사’보다 더한 ‘교회인사’가 “‘코드’보다 실력-성과”(이경숙 인수위원장 임명에 대해, <동아일보> 26일자)로 둔갑하였고, 좌파정권의 반시장정책으로 기업들의 투자의욕이 꺾였다더니 이제는 “진짜 이유는…기업이 투자할 아이템을 못찾았다”(>조선일보> 22일자)는 고백도 이어졌다.



신용불량자 대사면 공약에 대해서는“포퓰리즘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노무현 정부조차 차마 못 꺼냈던 카드”라고 시인했다. 대형할인점 때문에 형편이 어려워진 재래시장도 모두 반시장적인 노무현 탓이었는데, 이제는 그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지역 대형할인점의 영업시간을 강제로 단축하겠다는 ‘반시장적’인 정책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무능하고 막말만 일삼으면서 5년 내내 국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던 노무현을 대신해서, 세계 13위 경제대국의 ‘집권야당’이 5년을 공들여 내세운 드림팀과 그 수장이 오히려 그 노무현만도 못하다는 점이 선거가 끝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거짓의 역사는 지난 5년 내내 우리를 뒤덮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차위반 정도의 사안으로 사형시킨 셈”이라는 대통령 탄핵이 그러했고 국무총리까지 낙마시킨 위장전입이 ‘명박삼천지교’로 동정 받는 상전벽해가 그러하듯이, 우리는 그 ‘잃어버렸다는 10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닌지, 그에 비하면 돈 많은 CEO 출신의 당선자에게는 너무나 너그러운 것은 아닌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그 모든 거짓과 위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BBK 사건이다. 나는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이라 경제나 금융은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그 수많은 언론 인터뷰와 광운대 동영상과 하나은행 내부문건이 없던 일로 치부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주어가 있네 없네 하는 한나라당의 항변을 들으면서 나는 어쩌다가 우리 사회의 수준이 이렇게까지 추락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기록을 남겨 왔다는 것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인류가 문명이라는 것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지금 자연을 탐구하며 진실을 추구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 덕분이다. 자신의 무죄를 강변하거나 정복한 민족의 우수함을 감추기 위해 그 모든 기록을 말살한 경우는 있어도 드러난 여러 가지 기록들을 두고서 ‘없던 일’로 했던 경우는 결코 없었다. 이것은 문명에 대한 테러다.


사슴을 보고 사슴이라고 말할 수 없고 사슴이 아닌 말이라고 대답해야 하는 사회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그 어떤 행위가 온전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나는 상식과 진실이 버젓이 참살당하는 이 참담한 현실 속에서, 이 땅의 과학자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비통한 심정을 2006년 황우석 사건 때에도 느꼈었다. 99:1의 여론으로 진실을 판명하려 드는 그 야만적인 폭력 앞에서 나는 내가 과학자라는 사실을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다.



  
  
▲ '줄기세포 논문조작'과 관련해 불구속 기소된 황우석 교수가 지난해 6월 20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대통령은 투표로 뽑을 수 있지만 참과 거짓은 투표로 가릴 수가 없다. 참과 거짓을 우리가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이 거짓이 되거나 거짓이 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성보다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번 대선에서 어떤 고귀한 가치보다는 손에 잡히는 돈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명박 당선자조차 목표로 내세운 선진국은 그 가치와 돈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선진국은 가치로 돈을 버는 나라들이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다시 나라와 국민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 크게 쓰이면서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뿌려 왔던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브랜드를 제고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던가. 아무리 당장의 경제회복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우리가 쌓아 올린 가치가 허물어진다면 우리는 영원히 문명의 변방에 머물 수밖에 없다. 아니, 그렇게 지록위마가 횡행하는 나라의 물건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고 싶을까.



그나마 BBK 특검을 이명박 본인이 수용하고 정치권이 받아들여 진실규명에 한걸음 다가서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한나라당이나 검찰의 수사발표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실조차도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는 온갖 증거들을 온당하게 고려했을 때의 사실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명박 당선자의 유죄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왜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문명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가에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수사 결과에 따라 우리가 그 어떤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선진국이 되기 위한 성장통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땅에 공화국 정부를 세운 지 내년으로 60년, 그간 우리가 겪어 온 현대사를 돌아보면 이보다 더한 고통도 슬기롭게 잘 극복해 오지 않았던가. 살아있는 권력이라고 해서 문명에 대한 도전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지구에 큰 재난이 닥쳐서 인류가 지구를 탈출해야만 한다면, 음악가들은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를 꼭 챙길 것이라고 한다. 나 같은 입자물리학자는 아마도 격년마다 발행되는 <입자편람(Particle Data Book)>을 챙길 것 같다. 그 책에는 자연은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우리 인류의 누천년에 걸친 지혜와 성과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불꽃 한 점, 비명소리 하나 보이거나 들리지 않았지만 이번 대선을 치르면서 드러난 거짓과 위선과 문명파괴 행위는 가히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비할 만하다. 그에 발맞추어, 이런 사회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입자편람>을 나는 이참에 기꺼이 분서(焚書)해 버릴 생각이다. 학문을 하는 이가 책을 불사르는 것은 참으로 불경스러운 일이나, 이를 통해 대한민국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현실을 고발하고, 이 현실에 침묵하는 지식인을 고발하고, 그리고 이 현실에 편승하는 국가기관과 기득권을 고발하고자 한다.


2007.12.27 10:40 ⓒ 2007 OhmyNews

http://news.media.daum.net/society/education/200801/07/ohmynews/v195131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