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
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
초중말복 5진주 세명(5진주를 율곡은 <참 5>인 <달고나 참외>로 표현 ). 5+5+5(6)=15(16).마지막 5진주는 판모리 6서시. 따라서 15진주 수는 참5 달고나 참외 5진주 3명이 합해 이루어지며(1,3,5,7,9 양수의 황극수5를 취한 것) 마지막 5진주는 음수 2,4,6,8,10의 후천 황극수 6도 가능하므로 한 끗수가 튄 16수도 된다. 말하자면 마지막 말복 5황극수 진주는 11귀체에 의해 11성도에 대한 5의 보수 6도 되므로 15진주, 16진주수도 되는 것이다.
범증산계통합경전-십경대전 서문 5월31일 출간! 전국서점 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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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라 목차가 없음
동지한식백오제 천지공사 105년간의 종통인사 비밀을 모두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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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련불성 초중말복 도안都安 추수도수 세 살림' 서막을 알리는 안 운산 성도사님 숙구지 문왕도수-6
<2변 도운 121(1991).3.4 강론>*어찌되었든 종국적으로 이상호가 졌어. 그러고서 보천교에 있을 수가 없으니께 진정원 원장 명의로 소유권이 되어 있었던지 그걸 3만 원에 팔았어. 그러고 2만원은 어음으로 가지고 그 동생 이 정립하고 고등학교 다니는 여학생을 이상호가 원래 꼬아서 있었던 모양이여. 그를 데리고 만주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어. 그 진부를 확실히 판단을 못했는데 우리 증산도 대원출판사 사장인 부종정이 글을 쓰잖어. 동양학 이렇게 한다. 통곡하는 민족혼. 나중에 쓴 책은 상제님 진리를 바탕으로 쓰는 모양여. 자꾸 홍 성렬이 못되게 구니께 우리도 우리대로 사실을 알아보자 하고 대학생 연합회장 학생들에게 <보천교 연혁사普天敎沿革史>를 얻어 오라고 해서 보니께 전부 중 한귀퉁이것지.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때 이 상호 씨의 비리가 하나 나오는데 진정원 팔아서 만주로 도망가는데 고등학교 여학생 꼬아서 좋은 패물을 많이 해주고 만주로 데리고 갔더라는 내용이 있었어. 이 상호 씨가 그렇게 호색하고 못되 먹었나 봐. 그걸 쓰것다고 해서 세상에 아버지보다 더 당한 사람이 있냐. 그거 쓰고 파헤치면 종국적으로는 도성덕립 전에 알아보았댔자 실덕失德되는 거니께, 그걸 파헤쳐서 뭐 할려고 그러느냐 말여. 그런 사리에 부당한 일을 해쌌고.
<2변 도운 121(1991).3.4 강론>*홍 성렬이가 제 뿌리를 매도하고 말여. 부종정이 개인적으로는 내가 아버지요, 신도로써 종도사인디, 그 사람도 의리의 사나이니깐 아버지를 모시구서.... 하루에 그 사람은 요즘도 아침을 못 먹어. 아침을 먹을 수도 없고. 시간도 없고. 그 사람은 돈 만 원도 들고 다니는 사람 아니여. 그 죽을 고생을 해가면서 장가도 안가고 그 사람 동창들은 자식들이 다 고등학생이여. 화가 날 거 아녀. 너무 죽어지낼 필요 없다고 글을 쓰것다구.
<2변 도운 121(1991).3.4 강론>*이 한우 씨를 더불고 충청도를 나왔는데 이 상호 그 역적 같은 놈 소리가.... 보천교에서는 이 상호 인간으로 취급을 안 했어. 서자출신 해원한다고, 보천교해서 진정원 팔아서 딸년 같은 여자 꼬셔서 만주로 도망가고. 아주 이 상호는 보천교의 공적이여. 보천교는 이 상호를 아주 그렇게 매도하고 인간사의 양심, 종교적으로도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놈이라고 한다. 이 상호란 역적 같은 놈을 어떻게 상대하냐? 그 개 같은 놈하고. 흥찬이 자네나 이 상호· 이 정립하고 하든지. 좋으면 같이 그 놈하고 하든 말든. 우리하고는 이야기 할 것 없네 그런다 말여. 이 한우가 다녀가고는 아주 싹 그렇게 됐어. 그러면서 보천교와 별 관련 없는 젊은이들, 내가 내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그런 사람들만 남았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하나 예를 들면 홍성군 운암면 금곡리에 광천 다 가다보면 겹개리에 김 은재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옆에 김 흥재라는 사람들, 뭐 그런 사람들 포교를 시켜놨는데, 싹 이 한우에게 뭉쳐서 보화교普化敎라는 것을 만들었어. 이 한우, 이 순택이 보천교니께, 보천교가 변해서 되는거니께 보화교普化敎라고 해야 한다고 그네들끼리 싹 뭉쳐서, 일은 내가...(다 하고).. 다 어만 사람이 떡 들어와서 보화교普化敎라고 다 훔쳐가고 그러더라고. 내가 근 일 년을 남의 다리를 긁었어. 새로 또 꾸며야지! 그래서 젊은 사람들을 더불고서 철길 옆으로 철도를 따라 다니면서 포교를 하고 다녔어. 철로라는 것이 생활도 안정되고, 정신이 안정되고 교통도 좋고 해서.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러는 동안에 집회장소를 옮겨야 하는데 갈 곳이 있냐 말여. 용화동으로 옮겼는데, 이 상호 씨 건물이 삼 칸 오막살이 하나가 용화동에 있어. 그건 이 상호씨 개인이 살 수 있는 집이지. 우리 단체하고는 무관하고. 또 수용능력이 없어서 마침 옥성광산 거기가 노다지가 나던 곳이여. 그 사무실을 얻어서 금산여관 자리 그 사무실을 내가 샀어. 삼분의 이는 내가 내고 나머지는 신도들 몇이 내고. 신도가 몇 명이나 되냐 이 말이여. 몇 명 없지. 그 눈먼 장님을 더불고 다니면서. 그걸 뭐하러 이 상호를 눈먼 장님을 쫓아 다녔는지. 내가 자살행위를 했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서울서 도장 잘 새기는 사람 최 기석이라는 사람을 내가 데려다가 의통인(印)을 새기는디, 그때 50 전인가 50 원씩인가를 줬어. 매 개 새길 때마다. 그리고 나서 그건 하루저녁에 되는 게 아니니께 그건 일방적으로 정리를 하고. 그러니께, 말로만 본부도장이고 돈이 있나 신도도 없고. 그러니께 내 호주머니 돈이 공금이고 그렇게 4년을 지냈었어. 이 상호 씨를 그날 내버려두면 똥수깐에 빠지게 생겼어. 이 정립 씨는 감옥살이 3년하고 8.15후에 나와서 서울서 하숙하고. 그래서 같이 일하자는 생각에 나가서 밥 먹자고 하면 먹고, 담배 피우고 그랬지.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런데 그 사람이 <대순전경大巡典經> 제호題號 쓴 임경호林敬鎬씨 집에서 하숙을 했어. 그 하숙비도 내가 줬어. 내가 책이나 쓰라고 했어, 이 정립 보고. 그래서 <대순철학大巡哲學>이라는 게 그래서 쓴겨. 그거 책 쓰는 것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쓰는 거 아니쟎어? 한 2년을 썼나 봐. 이 정립 씨가 하숙을 하러 서울 합정동 27번지 근처로 갔어. 서울에도 연락소 하나는 있어야 되쟎어. 그래서 대법사 연락소라고 이 정립 씨가 거기 있었거든? 일을 누가 했냐? 최 규석 씨가 다 했거든? 나이도 많은데 농사짓는 사람이 무슨 돈이 있것어. 그래서 내가 지금 돈으로 10억 가지고 있었을 겨.
<2변 도운 121(1991).3.4 강론>*내가 그런 능력을 갖고 뱃심도 좋았고. 영등포 같은데서 마이크 걸어놓고 포교를 하면 석 달 만에 교회가 문 닫았어. 그럼 목사가 와서 뭐라고 그려. 왜 신도관리 못해서 다 잃어버리고.... 재주 있으면 내 신도 다 가지고 가라고 그렇게 포교를 했어. 그러면 신도가 많아지고 그래서 무슨 조직을 해야 할 거 아녀. 그 때 까지만 해도 특별히 교주敎主고 그런 것도 없어. 이 정립(李正立)이 양말, 양복도 다 내가 사주고. 이 상호(李祥昊) 경제문제 다 알쟎어. 누가 그렇게 돈을 줘? 그러면 나 건드리면 그 사람들 경제활동이 없어지거든. 내 의사에 항의할 수도 없고. 이런 문구가 내게 해당될 겨 -동충서 남주북- 나 혼자 활동을 해도 한 대여섯을 활동을 했어. 단시일 내에 활동을 해서 사람을 많이 모았어. 최 규석, 경상도 이 원호 같은 사람들 뭐 나하고 싸울 일이 있었나. 내가 웬만하면 다 받아주고. 그래서 조직을 하자. 그 조직이름을 ❀증산교❀라고 했어.
❀증산교❀는 내가 만들어 놓은 거여
<2변 도운 121(1991).3.4 강론>*신도도 내 사람이고. 포교라는 것은 내 기운을 붙여야 포교가 되어. 그 때는 이 간부들을 어떻게 했냐면. 간부들 전국적으로 모아놓고 조직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간부직을 준다. 감투를 쓸려면 이런 공이 있어야 된다. 우선 먼저 실적을 만들어라. 반드시 내가 절 받고 다짐하고 그런 마음으로 포교를 하면 포교가 되어. 그렇지 않으면 뭐가 되어? 그래도 똑똑한 사람이 간혹 있어, 그렇지만 건방진 수작하고 그러면 그 사람 되덜 않어. 내게다 절을 하고 그 사람들이 되어, 그 사람들하고 조직을 했어. 내 몸뚱이가 하는거지.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러면서도 증산교 교칙을, 조직을 하는데. 그 때는 이 상호 씨한테 청음 선생이라고 했어. 우리 아버지 연배니께 말여. 당신이 의통 얘기하는데 천하에 다 공개된 사실인데. 내가 당신한테 받은 게 뭐가 있냐? 내가 당신 지켜주고 당신 동생 생활시켜 주고 그런 거 밖에 없는데 조직으로 하자. 그래서 내가 <수주>여. 이 상호 씨가 <토주>고. 내가 포교한 김 종렬이가 화주이고. 경상도 이 원호라는 사람이 목주고. 서울 합정동 27번지 최 규석이라는 사람이 금주여. 내가 조직을 위해서 조직 정비하고 의통을 이 상호 씨에게 반환을 했어. 받건 말건 동지의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역사적으로 이 상호 씨 밑구녕 닦아주기 위해서 생겨난 게 아니다. 다만 상제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차 교주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공인의 한 사람으로서 진리의 사도로서 그러는 거지.
<2변 도운 121(1991).3.4 강론>*이 정립이 50여살 넘었을 때 자기 집이 없으니께, 마누라도 없고. 이 정립이 돈 일 푼이 있나? 또 늙었고 해서 이 정립한티 시집온다는 사람도 없고. 그런 사람이 장가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혀. 그건 지 부모도 어떻게 하덜 못혀. 그래서 내가 안 되는 일이 어딨냐고. 내가 결혼시켜 준다고 말여, 내가 책임진다고. 그렇게 해서 결혼시켜서 아들 삼형제를 낳게 해줬어! 그 중에는 교수도 있고. 이 정립이는 신명이 다할 때까지도 나한테 은혜를 다 못 갚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대법사大法社에 입사원서여, 입사원서에 입사금으로 그때 돈 50원을 받았어. 쌀 한말 값이 50원했어. 그래서 이 상호 씨 보고 입사금入社金으로 쌀 팔아 먹어라. 그래도 됩니까?. 내가 그래라고 했으니 되는 거 아니냐? 그런데 포교를 못하니께, 입사금入社金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려. 그것도 안 되니까 옥성광산의 아랫 칸이 비었고 그랬으니까 가족을 전부 더불고 오라고, 내가 쌀을 팔아주마. 쌀 밥 먹게. 이사하구서 내가 쌀값을 주니께 좋은 옥배미 밥을 먹는단 말여. 이 상호씨 부인이 배가 아퍼서.... 이 상호씨 살림도 내가 돌봐 주었는디 말여, 신도들도 드나들고.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러면서 그네들도 그런대로 다 밥 먹고 살게 해줘. 이 상호 씨 부인이 하얀 쌀밥을 보니께 ....이 상은 씨가 금평호 오리알터 <법종교> 있쟎어 글로 가 버렸어. “우리 집 안사람이 인간적으로 (이상호 부인이) 미워서 여기 안 있는답니다.” 그래서 나갔어. 이 상호 씨 부인 미워서. 이 상은 씨는 그렇게 못살게 해서 잃어버리고. 또 이 돈영 씨도 꼴 보기 싫다고 그리 가 버렸어. 이 상호 부인 하는 짓거리 때문에.
<2변 도운 121(1991).3.4 강론>*이 돈영 씨가 포교한 이 원호, 당시 65살 정도 됐을까? 도체 조직할 때 사람이 없으니께 목주로 하고. 거개가 이 상은, 이 돈영 그런 사람들 많이 끌고 그랬거든. 화주가 내 신도다 말여. 이 상호 심부름꾼 그런 거 하고 싶지 않다 말여. 김 종렬 씨 같은 이, 최 규석 씨 같은 이, 목주로 있는 이원호 같은 이 말여, 다 내 영향권에서 일하고 있고.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 사람들하고 같은 위치에서 이 상호 씨 밑에서 있을 수 있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그래서 내가 조직에서 빠졌다 말여 할 수 없이. 실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포교가 되다보니 말로만 위패하나 써 붙여놓고서 강 증산 천사다 하고 써 붙이고 치성을 모시는게 안돼서 부석면 거기에 그림 잘 그리는 김 양재라고 있어서 초빙해서 상제님 영정을 그렸어. 그냥 몽타쥬 마냥 상제님을 본 사람도 없고 대략 금산 미륵같다 그래서 바쁜 중에 부탁을 해서 그렸는데 그런 화가라도 그냥 비슷한 그림여. 아무리 잘 그려도 안 되어. 이 상제님 그림은 아무리 화가라도 잘 안되어. 상제님을 그렇게 그려놓고 말여. 화딱지 나서 정삼 치성을 모시는데, 밥만 아마 열다섯 그릇을 먹었는데 말여. 화가 나서 다 먹어 치웠어. 그래서 밥을 두 번 했어. 그렇게 내가 기운이 좋을 때여. 내가 장난하느라고 열다섯 사발인가 스무 사발인가를 먹었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내가 용화동을 5년을 다녔는데 절대 인사를 안해. 천고의 쌍놈의 새끼들, 억만고의 쌍 새끼들이여. 다시 대흥리에서 용화동 가서 옥성광산 사무실 사서 포교를 하는디, 경상북도 본가에서 이 상렬이라는 사람이 불고가사하고 이렇게 상제님 사업을 한다고 그때 나이 근 50 헌 사람이여, 그런 사람이 있었고. 밀양의 이 동훈 있고 이 정립 씨하고 그네들은 8.15 전에 나온 사람들이여. 자기들끼리 본래 그런 교분도 있고 상제님 사업에 전부를 바친 사람들 아녀. 그 사람들이 여기 붙어 있었었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이 상호 부인이 첫째 부인 죽고 목포에서 재실을 얻은 부인이여. 거기서 인화라고 첫 아들 낳고, 둘째 인석이여. 인화는 정읍 농고를 나왔고 인석이는 정읍고등학교 나와서 금산사 근내에 조그만한 중학교 용화동 자리 잡힌 후 그 중학교를 다녔어. 그 딸년이 셋이 있었는데 맨 끄틈지가 미사라고 지었고. 이 상호씨 부인이 몸도 뚱뚱하고 그런대로 부잣집 맏며느리같이 생겼는데 야박혀. 부인이 먹고 싶은 것 못 먹는 가슴앓이 치밀어 오고, 고기 냄새만 맡아도 치밀어 오르는 소갈병 앓는데 부인이 십이고 스무날이고 밥을 못 먹어 죽게 생겼어. 남편이 감옥살이 하고 가난한 때에 애들하고... 그게 혈적이 되가지고서 그런 것이 있거든...그래서 소갈이라고, 소갈은 의학적으로 간에서 와.
<2변 도운 121(1991).3.4 강론>*내가 무슨 뭐 옛날 좋은 책이라도 내 앞에 오면 한 시간 꺼리도 안 된다. 그렇게 박식하고. 그 때 포교를 할 때 그때는 석판 인쇄 그런 게 없어. 여기 이런 게, 이것이 지금 <증산도의 진리> 거기에 쓴 언청계용신言聽計用神이거든. 이것 나밖에 그리지 못 혀. 왜 그런지 나는 상제님 사업하라는 팔자인지 내가 쪼그리고 앉아서, 그래서 세상에 다 돌렸어. 그런 내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지식의 소유자였을 때 이 상호 씨는 도저히 못한다. 대법사大法社라는 체계는 이 정립이 짰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러면서 삼덕교三德敎라고 해서 경상도 하동 남송南松 허 욱許昱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가 누구에게서 도를 받았냐면 이 치복李致福 씨라고 있거든. 차 경석씨가 태모님을 뒷방에 놓구서 만나지도 못하게 했어. 차 경석 부인이 수발들고. 그러니께 내외간에 정책적으로 짜고 그렇게 해서 3년 되니 상제님 성도들 발길이 다 끊어져 버렸어. 차 경석 씨한테 그 김 형렬 씨부터 다 나쁜 놈이라고. 저 고수부님 말이여 거기서 반년 떨어진 성도도 있고, 1년 만에 떨어진 성도도 있고, 2년 만에 떨어진 성도도 있고. 각자의 훔치교라고 해서 차린 데도 있고, 뭣이 각자의 이름을 붙여서 다 한 가지씩 차렸다. 태을교, 미륵교, 선도, 이 치복 씨가 어떻게 허 욱을 포교했는지 포교경로는 모르쟎어. 하여간 허 욱이라는 사람을 포교를 해서, 허 욱 씨가 수련해서 광명을 해서 생화 삼신(삼성조)을 모시고 갑을병정 해서 생화수기를 돌린다고 그래. 그러면서 대법사大法社와 합한다고.
<참고>*남송 허 욱은 1914년 18세때 포교활동을 나온 이 치복(李致福)과 김 요관(金堯觀) 등을 만나 증산도(增山道)의 교리를 접한 후 증산도에 심취하여 여러 종교적 체험을 경험하였다. 이후 그의 나이 34세(1920) 때부터 도방(道房)을 개설하여 증산 교리의 지도와 포교에 힘썼으며, 그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어가면서 도방을 보다 조직적으로 조직하고 정비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의 식민 지배 시기였기 때문에 대중들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의 정책에 따라 증산교가 유사종교로 탄압을 받게 되고, 도방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 독립 운동 등에 연루되고 허 욱 자신 역시 1938년 광주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루는 등 종교 활동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게 되었다. 그 이후 오랫동안 앓아왔던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그의 나이 53세로 사망하였다.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렇게 합하면 삼덕교三德敎는 버리고서 대법사大法社를 써야 하는데, 아니면 대법사도 버리고 삼덕교도 버리고 새로 하든지. 삼덕교는 삼덕교 체제 그대로 갖고 있고, 대법사는 대법사 체제 가지고 있고, 말로만 합한다고 하고 왔다갔다 하는겨. 생화수기를 돌린다는 것도 유치찬란하고. 얘깃거리도 안 되는 거여, 내가 볼 때는. 그 사람들이 건달여. 생화수기를 돌린다는 것도 그게 가치관이 결여된 것이고 말이 안 되어. 거기 뭐가 있어. 죽을 진리가 있어 살 진리가 있어? 아무것도 아니거든.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근데 나한테 수련을 하자 그려. 해서 나는 안한다고, 안 해도 된다고. 내가 감추고 있으니께 몰르지. 내가 얼마나 밝았냐 하면, 자지 털이 몇 개인지 알어. 여자 음모 몇 개인지도 알어, 그렇게 밝어. 무슨 놈의 공부를 해여. 허 욱 씨, 허 남송의 제자가 서 상범, 삼덕교 교주여. 그 동생이 서 상학이여. 그네들은 상투 틀고 갓을 쓰고 다닌 사람이여. 내가 돈이 많고 뱃심도 좋고 허니께 나를 어떻게든 꼬을라고, 가만 보니께 그 놈의 정책이 순전히 나 하나 사로잡기 위한 정책이여. 그 공부하는 방법이 앉아서 치성을 모시구서 생화수기를 돌린다고 하면 속이 확 달아올라 불덩어리가 쑥 들어온다는 거여. 그런 공부하는 방법이 그런 게 있어. 언젠가 그런 것 교육 시키고 하는 문제가 주어지면은 그런 이야기를 해 주니께. 공부를 하는디 강제로 말이여 몽둥이로 모두 한 대씩 냅다 때려. 내게도 때릴라 그랬어. 내가 그만 하것다고 나왔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아무튼 그러면서 신도가 많이 느는디, 내가 25~27세 때 포교를 하면서 아산 천안서 배방면 남리가 있는디, 남리는 한명도 빠짐없이 다 신도를 만들었어. 100% ! 그 못 배우고 무지한 촌사람들에게 어떻게 상제님 진리를 주입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지금 『증산도의 진리』를 보면은 지구 타원형으로 그려놓고 동서남북 해서 ‘인의예지신’해서 하추교차기 개벽기 -우주변화의 원리 도표- 그게 그때 거기서 나온거여. 그게 지금 제군들이 알구서 보니께 우스운 것 같지? 그게 하도, 낙서보다 더 좋은겨.
<2변 도운 121(1991).3.4 강론>*하도, 낙서 죽을 때까지 주역공부해도 이 세상 꼬라지를 몰라. 누구도 그것 그려놓고 이야기하면 한 시간이면 우주원리가 싹 들어와! 그것을 내가 개발했어. 인류역사를 통해서 동양문화권에서 가장 알기 쉽게 개발한 게 나여, 누구도 알기 쉽게 포교 전략으로 그런 것을 개발했어. 그게 보천교普天敎에서도 그런 게 없었고, 상제님 진리권에서도 그런 걸 얘기한 사람도 없었고, 유교권·불교권에서 그런 이야기 한 사람이 없었어. 내가 그때 그런 지식의 소유자여. 그렇게 해서 내가 한 시간쯤 얘길 하니께, 전부가 다 만세를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