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대전 당시 봉추의 연환계에 묶인 조조의 거대 전함들이 화염에 휩싸이면서 강기슭이 붉게 타오르면서 그 불빛이 절벽에 비춰 함께 타올랐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츠비(赤壁)이라 한다. 적벽(赤壁)은 당시 손권과 유비 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던 장소로 대부분 적벽이 주 전쟁터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고 적벽은 손권의 오와 유비군의 진영이며 주 전쟁터는 적벽의 하류인 훙후(洪湖)시 오림(烏林)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적벽대전을 알려주는 적벽고전장이 츠비시 츠비전(赤壁鎭)에 있어 츠비로 간다.
▶ 츠비진(赤壁鎭) 시내 사거리의 ‘赤壁古戰場’ 석패방
어제 미리 예매해 둔 8시 35분에 출발하는 츠비(赤壁)행 기차를 타기위해 우창역으로 향한다. 25분 늦은 9시에 우창역을 출발한 기차는 10시 40분 츠비역에 도착한다. 역에서 적벽대전의 현장으로 가려면 시내버스 2路를 타고 성서시장(城西市場)으로 가 동쪽으로 10분 쯤 걸어 성서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츠비쿠젠창(赤壁古戰場)으로 가는 버스는 15명 정도가 타는 소형버스(1人/9元)로 50분 쯤 걸려 츠비진(赤壁鎭) 시내 사거리의 ‘赤壁古戰場(적벽고전장)’이란 현판이 걸린 석패방 건너편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赤壁古戰場(적벽고전장)까지는 1km가 넘는 거리다. 짐만 없으면 15분 정도만 걸으면 되지만 짐 때문에 택시를 타려고 하니 30元을 부른다. 10元에 가자고 하니 휙 돌아 서기에 15元을 준다고 해도 안 된단다. 그럼 그냥 걸어가면 타라고 하겠지 하고 걷는데 쫓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걷다보니 입구가 보인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관광객들의 돈을 착취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관광지 입구까지 버스를 운행해도 아무런 교통문제가 없는데 개인 관광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걷거나 전동차를 타거나 택시를 타야하는 번거로움이 많다.
삼국지의 하이라이트는 적벽대전(赤壁大戰)이다. 강북(江北)을 평정한 조조는 눈엣가시 같은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을 치기 위해 강남으로 군사를 몰아친다. 당시 강남의 실권자는 손권이었다.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로 형 손책(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동오(東吳)를 다스리고 있었다. 조조는 이번 원정으로 대의명분을 내세운 유비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손권을 동시에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신야현(新野懸)에 몸을 피하고 있던 유비는 군사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내 조조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을 제의한다. 화친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목소리에 주저하던 손권은 제갈량의 세치 혀에 탁자 모서리를 자르며 결사항전을 결심한다. 마침내 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 강택민이 쓴 삼국적벽고전장 현판 글씨
적벽대전의 중심인 츠비(赤壁)시가 삼국지를 주제로 한 관광상품개발사업의 첫 작품이 테마공원 삼국적벽고전장(三國赤壁古戰場)이다. 넓이가 무려 300만평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다. 장쩌민 전 주석이 현판 글씨를 직접 써 줄 정도로 중국정부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단계 공사가 완공돼 2011년 5월 개장한 삼국적벽고전장은 전체시설을 한번 둘러보는 데만 족히 4~5시간은 걸릴 정도로 엄청난 규모다. 주변에는 숙박시설, 음식점 등 모든 편의시설을 당시 성곽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
▶ 삼국적벽고전장 입구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1人/150元)는데 너무 비싸다. 얼마나 잘해 놨기에 이리도 비쌀까? 그렇지만 이곳까지 와 비싸다고 안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류커쭝씬(遊客中心,관광객편의센터)에 짐을 맡기고 안으로 들어간다.
▶ 신무대
삼국적벽고전장이라고 쓰여 있는 웅장한 정문을 지나면 용과 봉황의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신무대(神武臺)가 나온다. 이곳은 오의 명장 주유가 군사를 훈련시키던 곳으로 거대한 방패모양의 조형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뒤로는 적벽광장이 조성돼 있다. 이곳은 주로 공연이 펼쳐지는 장소다. 저녁에는 적벽대전을 재현한 화려한 불꽃놀이와 레이저쇼 공연과 무술시범, 그리고 유비와 손권 여동생의 결혼을 코믹하게 각색한 연극 등으로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하는데 관광객이 적은 요즘도 공연을 할까?
▶ 종고루
▶ 재신전
안내도를 보며 우리는 이곳에서 우측 종고루(鐘鼓樓)가 보이는 금란산(金蘭山) 쪽부터 시작해 좌측으로 돌 예정이다. 만리장성을 본 떠 만들었다는 종고루를 지나면 재신전(財神殿)이란 관우사당이 나온다. 그런데, 아무리 관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이지만 적벽대전의 총 지휘관인 오나라의 주유를 모시는 주유사당이 있어야 할 자리에 관우사당이 있어야 하지 알 수 없다. 역사의 현장에서도 돈이나 재물이 더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걸 보면 중국인들은 선천적으로 자본주의가 몸에 배여 있나 보다.
▶ 삼십육계 병법을 기록한 목판
이어 금란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당시 적벽대전에 사용됐던 삼십육계(三十六計) 병법을 기록한 목판이 나온다. 미인지계(美人之計), 차도살인(借刀殺人), 소리장도(笑裏藏刀) 등 대부분은 들어봄직한 내용이고 알 수 있는 내용도 있지만 우리 말로 된 설명이 없어 아쉽다. 이 삼십육계병법 중 성동격서, 미인계, 반간계 등 많은 계략들이 오늘날도 그대로 사용 중인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 수계당
계단 끝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방통이 현장에서 올라오는 파발을 읽고 작전을 지시하던 수계당(授計堂)가 나온다. 이곳에는 대나무 죽간에 당시 작전을 지시했던 내용을 적어 걸어 놓았는데 글자가 희미해 무엇을 적었는지 알아보기 어렵다.
▶ 금란산 정상의 은행나무
조금 더 오르면 금란산(金蘭山) 정상이다. 높이래야 겨우 40~50m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는 남병산과 함께 가장 높은 곳이다. 정상에 오르니 먼저 정면으로 엄청난 크기의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암·수 두 그루가 붙어 있다. 조금 더 굵은 암나무의 쪽 삐져나온 곁가지가 두 눈과 입까지 신기하게도 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1000년의 역사가 만든 작품이 아닐까?
▶ 봉추암
▶ 암자내 봉추상
은행나무 뒤로는 방통이 은거하며 공부했다는 봉추암(鳳推菴)이 나온다. 1981년 중국정부가 국가 유적지로 지정하면서 세운 건물로 방통을 모시는 사당이다. 원래는 아홉 채가 있었지만 다 소실되고 한 채만 남아있다.
▶ 천년고등(千年古藤)
그 옆으로는 수령 1000년이 넘었다는 등나무가 있다. 방통이 등나무를 보고 화공(火攻)을 위해 조조군의 배를 쇠사슬로 묶는 연환지계(連環之計)를 생각해 냈다고 하는데 당시의 등나무는 이미 죽고 지금의 등나무는 당시 등나무의 손자라고 하는데 믿어도 될까? 중국인들의 뻥이 워낙 심해 콩으로 쑨 메주라 해도 간장이나 된장을 담가 봐야 진짜인지 구별할 수 있으니..
▶ 팔괘진
아쉬움을 뒤로하고 금란산을 내려오면 제갈공명이 사용했다는 팔괘진(八卦陣)이 나온다. 안으로 들어가려니 별도로 한사람 당 20元을 내란다. 안을 들여다보니 대나무로 팔괘진을 만든 것인데 들어가 봐야 뻔한 것 같아 그냥 통과.
▶ 삼국조소원 입구
▶ 유명 시인 묵객들의 시들이 죽간 형태로 나무판 음각
▶ 술잔 모양의 청동상
팔괘진에서 조금 더 가면 적벽대전 당시 상황을 조각으로 재현해 놓은 ‘삼국조소원(三國彫塑園)’이 있다. 입구 양 옆으로는 당나라 시대의 유명한 시인인 두목의 ‘적벽회고(赤壁懷古)’를 비롯해 두보와 이태백의 적벽가(赤壁歌) 등 적벽대전을 노래한 유명 시인 묵객들의 작품들이 죽간 형태의 나무판에 음각되어 있고 한쪽엔 당시 적벽대전의 영웅호걸들이 마셨을 듯한 술잔모양의 청동상이 장식돼 있다.
▶ 도원결의 상
공원을 들어서면 유비와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재현한 동상을 시작으로 수많은 작품들이 웅장한 정원과 함께 펼쳐져 있다.
▶ 청매자주논영웅(靑梅煮酒論英雄) 이야기를 재현한 조형물
조조가 유비를 불러 둘이 청매실로 담근 술을 마시면서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천둥이 치자 조조에게 속마음을 들킬까 걱정하던 유비는 그 틈을 노려 젓가락을 떨구자 유비가 소심하다고 생각한 조조는 그 날 이후 유비를 과소평가하게 된다는 청매자주논영웅(靑梅煮酒論英雄) 이야기를 재현한 조형물도 눈에 띤다.
▶ 여포와 초선의 사랑이야기
동탁이 천하를 좌지우지하던 후한 말, 왕윤의 미인계에 따라 초선이 통탁 몰래 여포와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정자 안에 재현해 놓았는데 그 뒤에서 왕윤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웃는 장면이 재미있어 보인다.
▶ 하녀들의 시중을 받는 대교와 소교 자매 석상
영화 적벽대전에서도 조조가 소교에게 흑심을 품고 전쟁을 일으켰다고 스토리를 이어 가지만, 실제로는 우연히 소교를 만난 주유와 조조가 동시에 소교에게 마음을 두었으나 소교는 결국 주유를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국지연의에도 호색한인 조조가 ‘동작대(銅雀臺)라는 궁전을 짓고 이교자매를 노리개 삼아 평생을 즐겼으면 소원이 없겠다.’며 오나라를 공격했다고 전한다. 주유동상 앞 잔디에는 적벽대전을 좌지우지했던 두 여인 대교와 소교가 하녀들을 거느리고 이야기 하는 여인상 마치 삼국지연의와 영화 적벽대전의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서 있다. 영화 적벽대전의 내용도 마냥 허구는 아닌가 보다.
▶ 두목의 시 동작대
제갈량도 오왕 손권에 연합군 제의를 하면서 조조가 이교를 탐한다는 미인계(美人計)를 이용한다. 이에 격분한 소교의 남편 주유가 결사 항전을 주장하며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당시대의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의 시 적벽(赤壁)에서도 은근히 호색한 조조를 비꼬고 있다.
折戟沈沙鐵未銷(절극심사철미소) 부러진 창이 모래에 묻혔으나 철은 아직 녹슬지 않았는데, 自將磨洗認前朝(자장마세임전조) 내가 그것을 갈고 닦아보니 전대의 역사를 알겠구나. 東風不興周郞便(동풍불여주랑편) 동풍이 주랑을 편들지 않았다면, 銅雀春深銷二喬(동작춘심쇄이교) 동작대 봄 깊은데 이교가 갇혔겠지. |
▶ 배풍대(무후궁)
▶ 무후궁내 공명 입상
▶ 공명과 적벽대전 관련 석화
삼국조소원를 뒤로 하고 언덕을 오르면 남병산(南屛山)이 나온다. 이곳은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칠성단(七星壇)을 쌓고 동남풍을 부르는 제를 지내던 곳으로 1610년에 지은 동풍각(東風閣)과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 배풍대(湃風臺)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배풍대 현판 아래 무후궁(武侯宮)이라는 현판이 별도로 걸려 있다. 배풍대 안에는 학우선을 든 제갈량의 입상 조형물과 적벽대전과 제갈량이 관련된 삽화를 석판에 그려 전시하고 있다.
삼국지에는 황개의 고육지계(苦肉之策)와 방통의 연환지계(連環之計)를 이용한 화공으로 조조군을 무찌를 계책을 마친 주유는 북서풍의 계절에 화공을 쓸 경우 불화살이 조조의 진영에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칫 조조군의 불화살 공격에 우군이 위기에 처할 수 있어 고민에 빠지고 마침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된다. 노숙이 주유를 찾아갔다 자리에 몸져 누운 주유를 보고 촉·오동맹을 위해 이곳에 와 있던 공명에게 주유의 병을 이야기하고 공명은 주유의 병을 고쳐준다는 구실로 주유에게 문병을 가 시 한 수를 읊자 속을 간파 당한 주유가 공명에게 동풍이 불 수 있는 방법을 구한다. 이에 제갈량은 남병산에 칠성단을 쌓아주면 동짓달 스무날 갑자 일부터 세 밤 세 낮 동안 거센 동남풍을 불게 하겠다고 화답을 한다.
欲破曹公(욕파조공) 조조를 깨뜨리려면 宣用火攻(선용화공) 마땅히 화공을 써야 하리 萬事俱備(만사구비) 모든 걸 갖추었으되 兄缺東風(형결동풍) 다만 동풍이 없구나 |
주유와 제갈량은 동지이자 숙명의 라이벌이다. 주유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요절한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설은 의미가 없겠지만 주유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삼국의 운명은 또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 주유는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하늘은 이미 주랑(周郞)을 낳았거든 공명(孔明)은 왜 또 낳으셨단 말인가?”라며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면서 숨을 거둔다.
▶ 망강정
▶ 주유 석상
남병산을 내려와 우측 남병산을 따라 5분 남짓 걸으면 망강정(望江亭)이 보이고 길을 따라 좀 더 가면 광장 한 가운데 주유 석상이 보인다. 갑옷과 망토를 입고 투구를 쓴 주유가 칼을 빼 망토 뒤로 숨기고 있는데 머리는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망토도 오른쪽으로 휘날리고 있다.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동남풍이 불기 시작했으니,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는 의미로 이렇게 조각했다고 한다.
▶ 적벽대
주유 석상을 뒤로 하고 100여 계단을 내려가면 드디어 적벽(赤壁)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절벽이 있는데 사진이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규모가 웅장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실망스럽다. 우리나라 강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절벽 정도로 대략 40여m의 벼랑에다 붉은 글씨의 '赤壁'만 덩그러니 쓰여 있다. 이 글씨는 승리한 주유가 호승심에 칼로 새겼다고 전해지지만, 전문가들은 1000년 전의 글씨로 추정하고 있다. 그 위에는 롼(銮)’자가 새겨져 있는데 글자라기보다는 도교(道敎)의 문양으로 창장의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새겨 넣었다고 한다. 적벽대전 당시 이곳은 창장 중 강폭이 가장 좁은 곳으로 수군이 배를 정박했던 곳이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적벽이라는 글자 아래 구멍이 4개 뚫려 있다. 배들이 정박하기 쉽게 막대기를 꽂던 곳이라고 한다.
▶ 적벽대에서 바라본 창장
▶ 적벽대전 진열관
▶ 적벽대전 진열관 내 파노라마
적벽대를 뒤로하고 주유 석상 앞을 지나 적벽산 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지붕이 주유의 투구모양을 한 적벽대전 진열관이 나온다. 투구 모양의 둥근 원형 지붕은 스크린으로 당시 상황을 3차원 영상으로 보여준다. 전시관에는 도자기로 만든 인물상과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진열돼 있는데 진품은 모두 형주의 박물관으로 옮기고 전시품들은 복제품이라고 한다. 전시품이 조금은 허접스러운 느낌이다.
▶ 저자거리
적벽대전 진열관을 나와 우측으로 조금 걷다보면 한대민가(漢代民家)가 나오는데 삼국지 당시의 저자거리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 적벽고전 성으로 연결되는 목조다리
▶ 충단문(忠團門)
▶ 적벽탑(赤壁塔)
다시 성벽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해자처럼 호수로 둘러싸인 삼국적벽고전장 성이 보인다. 해자와 성을 연결하는 목조다리를 건너 충단문(忠團門)으로 들어가면 앞쪽에 손권이 오나라 전체 군사를 지휘하던 49m 높이의 7층 누각인 적벽탑(赤壁塔)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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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각 곳곳에 전시된 적벽대전 관련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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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각에 전시된 이백과 두보의 시
▶ 적벽루에서 본 삼국적벽고전장
누각은 관광객들에게 개방되는데 계단 높이가 만만찮다. 7층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좌우 누각 벽에
는 적벽대전과 관련도 그림과 이태백, 두보 등의 시가 전시돼 있다. 7층 누각에 오르면 삼국적벽고전장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울러 적벽고전장 밖 노랗게 피어난 유채꽃의 물결도 볼 만하다.
▶ 금성으로 들어가는 성문
▶ 금성
▶ 촉오동맹교
▶ 토성
삼국적벽고전장 내부 성의 구조는 촉오동맹을 기념하는 동맹교를 사이에 두고 고전장 입구 쪽 토성은 일반 병사들이 주둔하던 지역이고, 적벽탑 쪽 금성은 고위직인 장군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금성과 토성 사이엔 두 개의 성문이 있는데, 황동 못이 박힌 방어대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 흉물스런 콘크리트 배
동맹교 부둣가에는 당시의 배 모양을 재현해 놓았는데 콘크리트로 만들어 페인트로 칠한 것이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 흉물스럽다.
금성과 토성 곳곳엔 기념품가게와 음식점이 중간중간 자리하고 있다. 가게 이름도 소교두부, 방통서점, 주유주점, 제갈공명사진점 등 삼국지 내용을 테마로 구성돼 있다. 이곳 소수 민족인 토후족 특산품 등 기념품을 파는 곳이 있어 좋은 눈요기가 된다. 가격표가 붙어있지만 바가지요금이다.
다시 적벽광장과 신무대를 거쳐 삼국적벽고전장 밖으로 나온다. 적벽고전장은 츠비시가 의욕적으로 시작한 삼국지 관광개발사업일지는 몰라도, 강택민 전주석이 관심을 가지고 추진했던 것에 비해 너무 조잡스럽다. 멀리서 보면 그럴듯하게 보일지 몰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건축물과 배, 다리 등을 모두 콘크리트로 만들어 페인트칠을 한 것이다. 테마파크를 개장한지 3년도 안되었지만 벌써 군데군데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갔고 페인트칠도 많이 벗겨져 적벽대전 테마파크로서 명성에 흠집을 내고 있다. 150元이라는 적지 않은 입장료를 받으면서 관리상태가 이리도 허술해서야 테마파크를 찾는 관광객에게 실망을 안겨 줄 뿐이다. 그리고, 단체관광객이 아닌 일반 관광객을 위해서라도 버스가 테마파크 정문 앞까지 운행해야 할 것이다.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삼국적벽고전장을 나온다. 이제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몰살한 83만 조조군의 무덤이 된 훙후(洪湖)시 오림(烏林)으로 간다. 류커쭝씬에 맡겨 두었던 짐을 찾아 이곳으로 올 때 버스에서 내렸던 곳으로 가 오림(烏林)으로 가는 배를 타는 부두를 물으니 이곳에서 기다렸다 훙후(洪湖)시로 가는 버스를 타면 부두에서 배가 버스와 함께 도강시켜 준다고 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지도를 펴 놓고 오림을 보니 유적지가 여기저기 한참 떨어져 있어 걸어 다니며 구경하기란 불가능하고 택시를 전세 내 타고 다니는 방법 밖엔 없는 것 같아 오림은 건너뛰고 오늘 징저우(荊州)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한다.
훙후(洪湖)시 오림(烏林)은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몰살한 83만 조조군의 무덤이 된 곳이다. 이곳 여행은 이웃 츠비(赤壁) 시에서 시작한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적벽(赤壁)을 중심으로 당시 전쟁이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이곳 훙후 오림이다. 적벽 부두에서 철선을 타고 하류로 20여분 내려가면 강 건너 오림 부두에 닿는다. 창장(長江)의 폭이 의외로 넓다. 안개가 짙어 정확한 거리는 알 수 없지만 어림잡아 2km는 정도 되는 것 같다. 대형 컨테이너선들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있는 걸 보니 창장은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대형 물류 운송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인들이 창장을 ‘어머니의 젖줄’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만하다.
오림 부두에서 버스가 배 밖으로 나오자 일부 승객을 내려놓고 다시 홍호시로 출발한다. 부두 한쪽으로는 한국의 매운탕 집처럼 음식점 10여 곳이 죽 늘어서 있다.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오림 부두 주변은 유채꽃이 노란 물결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이다. 이곳은 그 옛날 적벽대전의 숨겨진 전장 오림 전투가 펼쳐진 곳으로 적벽이 승자 손권과 유비의 역사라면 오림은 철저하게 외면된 패자들의 역사다. 적벽대전 당시에는 이곳에서 수km 내륙까지 창장이었다고 한다. 17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물길이 바뀌어 인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현재 창장 물길도 1988년 대홍수 이후 대규모 관개시설 공사를 통해 새 모양을 갖췄다고 한다.
적벽대전 당시 창장 변인 이 오림부두 주변은 83만 조조군의 주력군 진영으로, 주유와 제갈량의 화공으로 인해 화염에 휩싸였던 주 전쟁터로 당시 조조 군사들이 불에 타고, 창에 찔리고, 화살에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그야말로 아비귀환의 지옥이었을 것이다.
▶ 이백의 적벽대전
다행히 후세에 이백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이 참혹한 전쟁터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魏吳爭鬪快雌雄(위오쟁투쾌자웅) 위와 오 자웅을 겨루던 곳 赤壁樓船一掃空(적벽루선일소공) 적벽에는 배 한 척 보이지 않네 烈火初張雲照海(열화초장운조해) 매서운 불길 구름을 찌를 듯 강물 비칠 때 周郞曾此破曹公(주랑회차파조공) 주랑은 여기서 조공을 깨뜨렸네 |
그런저런 생각과 상념에 잠겨 있다 보니 버스는 어느덧 홍오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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