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관련

[스크랩] 바다`해`(海)자는 마고성(麻姑城)의 천후궁(天后宮)지도(地圖)다

낙엽군자 2009. 2. 23. 13:16

 바다'해'(海)자는 마고성(麻姑城)의 천후궁(天后宮) 지도(地圖)다

 

 

  현재의 건물은 묘도에 있는 마고사당 천후궁 (현응궁),일명 상궐(象闕)

 

 

묘도의 영험궁은 중국측에서는 북송 선화 4 년 ( 서기가 1122 년 ) 에 처음 만들고 중국 북방에 제일 먼저 지은 영향력이 가장 큰 삼신 할머니 묘입니다 . (서기 1122년 이전 까지는 고려에서 고조선때 까지 중국의 지배영역이 아님.뿐만 아니라 이 신당의 유지관리를 신라의 유민들이었던 남쪽의 영파.복건.절강지방의 선원들이 비용을 각출하여 주도함. 필자 주)

서기 1060 년 전후에 삼신 할머니 신앙은 사문도(샤먼도) ( 묘도 의 옛날 명칭 ) 에서 동남 연해지역으로 전파 되었습니다. 선화 4 년까지 원래 사문도(샤먼) 도의 사당 ( 영험궁의 유적 ) 에서 해신선 황후 ( 삼신 할머니 ) 궁을 개척했던 것이 바로 영험궁의 시작입니다 . 원나라때는 베이징에 수도를 세움에 따라 해양운송도 나날이 번영해 져서 당시의 사문도는 해양운송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 왕래하던 수송선들은 여기서 바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 선원들은 대다수가 복건인들이었습니다 . 그들이 삼신 할머니를 믿어 섬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 원나라 16 년 ( 서기1279 년 ) 전후까지도 복건 절강의 선원들이 돈을 모아 유적지에다 궁전을 짓고 궁전에 전문적으로 해신선(海神仙) 황후에게 제사를 받들며 도장을 유지하고“ 해신선 황후 묘 ” 라고 불러 왔습니다 . 이후 명나라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 까지의 건물의 유지관리와 보.개축에대해서는 거의 정부의 도움이 없이 지방 모금으로 유지되다가 근래에 들어 정부가 관리를 맡은것입니다.

 

***바다'해'자에 대한 금문의 풀이입니다. 이러한 상형문자를 금문으로 풀어본 결과는 왼쪽으로 물이 흐르는 강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유방을 가진 여성이 춤을 추는 모습으로 봅니다. 아래는 '해(海)'자의 금문과 전서체, 매(每)자의 갑골문과 금문, 그리고 마(麻)자의 금문 자료를 해설한것입니다. 이들이 어울려서 마고(麻姑)의 참뜻을 살리고 있는지 함께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마고는 고마(固麻)즉 한자로 '곰'을 거꾸로 표현한 단어인데 곰은 여성과 모계를 상징하는 웅씨녀였고,우리민족의 영원한 어머니 상이었습니다. 수개월을 먹지 않고도 능히 소생할수있는 대형동물은 곰밖에는 없었습니다.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그 능력을 한웅은 선택한것입니다.

 

<청나라 1866년 중간한 <마고산지麻姑山志>에 실린 마고의 모습>

 실재로 장도 역사박물관을 답사하였을때 박물관 주변에서 일년생 삼(痲)을 발견하였습니다. 일년생 삼이라야 배를 짤수 있습니다.

 

 

 

 

 

 

 

 

 

 묘도 천후궁 및 사문도 고성지

 

 

 

              [지도자료:향고도]                   ↑↑↑             <대청광여도>

 

 위에 올려진 지도에서 사문도(샤먼도)와 험독의 위치가 바다해자(海)의 상형과 유사하다고 생각되시는지. 사문도는 원래 육지었다는 기록과  이곳이 지진으로 무너지기 시작하여 바다가 되었다는 기록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있습니다. 이곳을 이었던 산맥을 심양서 부터 천산산맥을 통하여 발해해협까지 연결된 장백산맥이나  또는 태백산맥으로 불렀다는 기록도 <성경통지>에 전합니다. 마고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후였습니다. 파사(婆娑)는 춤추는 노파라는 말입니다. 삼위태백이나 태백산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던 산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문화가 전파되면서 옮겨졌는지는 자세히 알수가 없으나 실재로 그 산들은 사문도로 연결된 산이었습니다. 천후궁을 상궐(象闕)이라 하고 마고성을 향하여 경배를 올리던 황제는 한 무제였습니다. 그리고 원나라는 상궐을 파사부(婆娑府)라고 부르고 옛 풍습을 존경하여 점령지의 관청을 두지 않았습니다.

 

최근 일부 야사학자들은 한민족의 이동을 거꾸로 서천을 하였다가  다시 동천을 하였다고 하는 주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민족의 자연적인 이동이란  생존조건을 따라서 이루어지는것이기에 자의에 의한 천산 서쪽으로의 이동은 이루어지기가 어렵습니다. 강제 이동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한나라와 전쟁 이후에 일어났던 고조선의 강역들을 발해와 동해의 서쪽에서 찾는다는것은 그나마도 기본으로 의지하고있는 <<사기>>이후의 모든 사서들과 중요고전들을 무시하고 즉흥적으로 도발하는 후회스러운 행위가 될것입니다. 잘못전하여진 <<산해경>>을 새롭게 연구한 <<해경신탐>>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될것이라고 판단되어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출처 : 品 石 齋
글쓴이 : 구산(九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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