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오늘의 초상>
복제송아지 특허 내지 않고 농민들에게 무료 전수하겠습 니다 ;
서울대 소박사 황우석교수 ### [복제송아지] 특허내지 않고 농민들에게 무료전수하겠어요 ###.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황우석교수(55).2006년 현재 연세입니다. 1995년 연세가44세입니다.
* 본래기사원문 나이가 44세 입니다 11년전 기사라는 이갸기 입니다. 현재 황우석 박사님의 연
세가 55세입니다. 1995년 수정란복제송아지 기사였던것이입니다.이내용 정정하여 올립니다.너
무 중요한 사실을 제가 기사를 끝까지 제대로 안읽은듯해서 올립니다 10년전 황우석 박사님이
어떠한 여건에서 연구를 하셨는지 알수 있을것입니다. 이기사를 쓰신 이효재기자님의 원문기사
는 찾을수 없지만 너무나 황우석 박사님에 대하여 잘알려준 기사인듯 합니다. 이기사는 최근에
쓰여진 기사가아닌 1995년도에 쓰여진 기사입니다. 많은분들이 오해 없으시길 바라며 정정하여
올립니다.
8년반 동안의 끈질긴 집념으로 그는 지난 10일 경기도 이천군의 한 작은 농장에서 복제(핵이식)
송아지를 탄생시켰다. 육질과 유질이 뛰어나고 유량도 풍부한 고능력소(수퍼소)에서 채취한 수
정란을 복제해 이를 대리모(수란우)에 이식, 수펴송아지 [1호]를 받아낸 것.
세계 기록으론 이미 성공한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번째. 앞으로실험을 보완, 실용화 단계에 오르면 1개에 1백만∼4백만원이나 되는 수입수정란을 1만∼2만원에 자체 생산할 수 있어 연간 8천억원의 수입 대체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그는 전망했다. 현재의 젖소는 하루평균 젖 18㎏을 생산하나 복제 젖소는 35㎏을생산하고, 우유생산량을 적정수준에 묶어두면 사육두수를 2배정도 줄일수 있어 생산성은 3∼4배 정도 높아지게 된다. 우유도 지방의 함유량이현재 3.4%에서 4%이상으로 높아져 고품질화된다. 한우도 현재 1마리에서 4백50㎏의 고기가 생산되나 복제 한우는6백㎏으로 늘어나고, 송아지 생산단가를 현재 두당 1백60만원에서 70만원으로 낮출 수 있다.
그는 이번 실험으로 {축산농가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곧 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소 항문검사만 30만번 이상 그에게 소라는 동물은 연구대상을넘어 오늘의 그가 있게 한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거칠게하면 성격이 한없이 포악해지고, 애정으로 대하면 한없이 유순해지는 소는 마치 우리나라 순수한 농민들과 같아요.}
그에게 소는 곧 농민과 같은존재다. 그가 평생을 소 연구에 바치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어린시절부터 시작된다.
52년 충남 부여군 은산면의 벽촌에서 6남매중 다섯번째로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6살 때 돌아가신 뒤 홀어머니(조용련·현재 77세)밑에서 어렵게 자라났다. 어머니는 1천여평의 논밭과 한우 3마리로 자식들을 키웠으나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다. 때문에 다른 형제들이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가 대학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대전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친척 한분이{누군가는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그를 대전으로 데리고가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대전서중을 거쳐 대전고를 졸업했다. 고교 선생님들은 그에게 서울대 의대진학을 권유했지 만 그는 아무 주저없이 서울대 수의과에 지원, 72년 합격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우리 식구를 먹여살린 소에 대해 언젠가는 보답을 해야 한다고 쭉 생각해왔어요. 방학 때 집에 내려가면 어머니가 논두렁에서 꼴을 만들어 지게에 가득싣고 소에 먹이던 모습을 평생잊을 수 없어요. 지금도 힘들 때마다 그 모습을 생각합니다.} 또 소의눈에서 한없이 어질고 평안한 모습을 보라보면 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전공과정이 시작된 2학년부터 그는 그 흔하던 미팅 한번 해보지 않고 도축장이나 가축병원에 드나들면서 소의 항문에 손을 집어넣어 장기를만져 소의 상태를 진단하는 [직장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해외출장 때를 제외하고는 최소 1주에 2∼3번씩은 [직장검사]를 한다. 지금까지 30만번 이상했다. 전국에서는그보다 많이 소의 항문에 손을 집어 넣어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는 {손끝의 감각이 무뎌지지 않게 하기 위해 직장검사를 계속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그가 소의 자궁에 수정란을 집어넣어 수태에 성공시키는확률은 평균 63%로 세계적인 수준이다. 우리나라는 평균 30% 수준이고, 미국과 일본에서도 평균 50∼60%를넘지 않는다.
그는 학교를 다닐 때나 박사과정을 마치고 4년동안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는 동안 전국의 3백여개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소를 만지고 실험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에 있는 그의 집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농민들로부터 {우리 소가 아프다}는 구호전화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때마다 그는 싫은 소리 한마디 않고 달려가 소를 진단하고 병을 고쳐준다. 그래서 그는 소를 기르는 축산농가들 사이에 {소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불리고 있다. {황우석을 모르면 간첩}이라고도 한다.
이같은 평가에 대해 그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단호하다. {우리는응용과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연구실 연구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수 없어요. 농민들의 농장은 그자체로 훌륭한 살아있는 연구실이지요.소똥도 소중한 자료입니다.}
그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와 그의 식구들을 먹여살렸던 사람들도 다름아닌 이 농민들이었다.
그는 85년 7월 서울대 수의대학 학장이던 정창국교수로부터 {세계적 학문조류인 수정란 이식을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고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가나가와 히로시교수가있는 일본 북해도대학으로 갔다. 그는 이 대학에 서 10개월동안 머물렀는데 이 기간동안 평소 그를 알고 있던 농민 10여명이 부인과 어머니, 두아들이 살고 있는 서울 집으로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일본에 있는 그에게도 생활비의 일부를 보내주었다. 이들은 아무말도 없이, 아무 대가도 없이, 그냥 그가 좋아서 매달 5만∼10만원씩을통장에 넣어 주었다.
그는 {이렇게 무조건으로 나를 도와준 농민들에게보답하기 위해 나도 무조건으로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그는 어떤 때는 하루에 2∼3시간만 자며 연구를 했다. 당시같은 연구실에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전세계에서 온 유학생이 12∼13명정도 있었는데 다들 그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가나가와교수도 그의 성실성과 집념에 반해 유학생중 유독 그만을일본의 목장이나 연구소에 직접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실습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가나가와교수는 지금도 그가 일본에 출장가면 부부가 공항까지 나와 맞이하고 일본 유명 학자 등을 자기 집에 불러 잔치를 벌여줄정도로 그를 아끼고 있다. 일본의 축산 현장에서 그는 {결국 기계화로생산성을 높이고 첨단기술을 접목시키지 않으면 우리 농촌은 살아남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학기중이던 86년 5월 그의 사람 됨됨이와 실력을 아껴오던 정창국학장은 당시 박봉식총장에게 탄원, 그 어려운 교수 자리를 하나 따내 일본에 있던 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를 서울대 수의과 교수로 발령을 냈다.
연구중 중병얻어 [시한부 인생] 되기도 복제송아지를 만들어야겠다는 꿈은 그의 귀국 비행기안에서 잉태됐다. 당시는 세계의 축산학계에서 달성되지 않은 연구과제에 불과했고, 성공가능성도 미지수였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비행기 안에서 [내가 복제 송아지 연구를 시작해 놓으면 내 뒤를 이어 누군가 성공하겠지]라는 막연한꿈을 꾸었습니다. 성공하려면 20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생각했어요. 당시 세계적으로 막 논의가 시작된 우루과이라운드를 생각해보니 복제송아지만이 우리 축산농가들이 살아갈 길이라 생각했어요.}
귀국 후 9월부터시설도 형편없고 변변한 시료도 없는 수의과연구실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일단 복제송아지의 기초단계인 쌍둥이송아지 만드는 연구를 시작했다. 대리모에 수정란 2개씩을 넣어 수태시키는 비교적 가벼운 연구로일년만에 성공했다. 다음 단계로 시험관송아지 연구가 시작됐다. 이 시험은 죽은 고능력소에서 떼어낸 난소에서 미성숙난자를 뽑아내 24시간동안 시험관에서배양, 성숙 난자를 만들어 정액을 넣어 수정시킨 뒤 체외에서 5일동안 배양시켜 정상 수정란을 만든 다음 대리모에 이식시키는 것. 죽은 소 1마리에서 수정란 60개정도를 얻어낼 수 있다. 고능력소(수퍼소)에서 채취한 수정란 1개로 실험실에서 수정란을 무한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복제송아지와는 이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는 6년간의 연구끝에 93년 11월 시험관송아지를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시험관송아지연구는 그대로 복제송아지 연구의 밑받침이 돼 1년4개월 뒤 복제송아지연구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연구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88년 6월에는소화기 계통에 중병을 앓아(그는 병명을 밝히기를 꺼려했다) 서울대병원에서 6개월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았다. 연구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그러나 8시간에 걸친 대수술과 {실험을 게속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그의투혼으로 기적같 이 살아났다.
그해 7월부터는 서울 잠원동에 있는 도장에서 {나 자신과 투쟁하고 나자신과 대화를 하자}며 단전호흡을 시작했다. 매일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1시간40분동안 한다. 지금까지 해외출장기간을 빼놓고 단 하루도 빠진 적이 없다. 단전호흡이 끝나면 수원에 있는 대학연구실로 출근, 바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 그는 대부분 하루 2끼를 먹는다. {연구실, 강의실, 농장을 돌아다니 다보면 밥먹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 이유다. 귀가시간은대부분 밤12시. 이 때문에 그는 하루에 4시간이상 잠을 자지 않는다. 그는 학부생들에게 {나 만큼만 성실하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러나 아무도그를 욕하지 않는다.
그와 함께 있는 연구원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연구원들에게는 토요일, 공휴일은 물론 설날이나 추석같은 명절이 없다. 연구의특성상 연구실을 24시간 지켜야 하고 매일 3∼4명은 밤을 새워야 한다.연구원들에게는 별도의 보수도 없었다. 오히려 출장비 연구비 등을 자기돈으로 들여가면서 해왔다. 결혼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매년 5천만∼2억원의 연구비를 대려면 이들에게 돌아갈 돈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연구원들은 부인들에게 생활을 맡겨야만 했다.
우리의 연구 결과는 모두 농민들의 것 황교수는 연구를 시작하면서 어렵게 마련했던 자신의 32평짜리 아파트를 팔아 몽땅 연구실기자재를 구입하는데 사용했다. {빈약한 학교에서는 아예 연구비를 탈 엄두도내지 못했고, 연구가시작되고 상당히 진행됐을 때까지도 이 연구에 관심을 가진 기업이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황교수가 정부로부터 유전공학연구비로 연간 5백만원을 받았던 것이 고정적인 수입이었고, 가끔씩 일부 중소 축산기업들이 도와주었다. 봉급을 몽땅 털어넣기 일쑤였다. 비싼 시료가 필요하면 선배들이 있는 회사로 달려가 손을 내밀기도 했다. {연구비가 풍요로왔다면 오히려 연구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아니라 농민들을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연구를 유지해왔습니다. 실험에서 수 없이 실패했지만 연구원들은 그때마다 [연구는 반드시 성공시키되 대가는 바라지 않는다]는 다짐을 되새기며 극복해 나갔습니다.}
이연구실 출신이 50여명에 이르지만 단 한마디의 불평도 들어보지 못했다는것이 황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복제송아지 생산 사실이 보도되자 대그룹을 포함한 10여개의축산회사로부터 자본을 댈테니 특허를 내고 독점생산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며칠전 {그동안 무관심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농림수산부의 한간부에게 {우리는 결코 특허를 내지 않는다. 축산농가들에게 무료로 우리의 기술을 전수해주고 원하는 농가마다 수정란을 이식해주겠다}는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우리가 얻어낸 연구결과는 모두 농민들의 것 }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연구실에는 요즘 하루에 5∼10건씩 농민들로부터 복제송아지 이식을 요청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그는 일요일이던 지난 19일에도 연구원들과 함께 복제송아지 이식을 위해 하루종일 농장을 돌아다녔다. 그는 연구결과가 발표된 뒤 한 일간지에서 [음지에서 이룩한 개가에 갈채를 보낸다]는 문구를 읽었을 때 코끝이 찡했다고 했다. {우리 연구원들은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더 이상 요구할 것은없습니다.}
앞으로 그는 복제송아지의 무게를 현재의 60㎏에서 45㎏으로줄여 난산에 따른 사산을 방지하고, 체외배양 능력을 향상시키는 보완연구를 할 예정이다. 3∼4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이는 이 보완연구가 끝나면 곧바로복제송아지의 산업화가 시작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는 인체에 필수적인 인슐린 인터페론 락토페린 등 생리활성물질을 소의 젖에서 대량분비되도록 하는 연구에 들어갈 예정이다.
황교수는 1호복제송아지가 태어난 지난 10일 새벽 충북 보은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기쁜 소식을 전했다. {내 아들 장하다}고 울먹이는 어머니의 말에 그는 {농민의 아들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효재 경인취재본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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