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역사 청산의 의미 09/01

낙엽군자 2006. 1. 6. 08:22




얼마 전 ‘역사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자신을 향한다고 느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국가의 정체성’이라는 칼을 빼들었다. 우리나라의 정체성은 헌법 제1조 제1항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민주공화국’이다. ‘민주’주의를 군사독재로 마음껏 유린하고 ‘공화국’을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는 제도’ 정도로 폄훼시킨 장본인을 기둥뿌리로 둔 정당의 대표가 국가 정체성 운운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민주공화국은 참담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일제부역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말은 부분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총체적 진실은 일제부역 세력, 곧 반민족 세력이 거꾸로 민족 세력을 청산했다는 것이며, 바로 그들이 민주공화국의 실제적인 지배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유린되었듯이, 공화국 이념 또한 철저히 배반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일제부역 세력이란 사적 영달과 안위를 위해 민족을 배반한 사익추구 집단인데, 그들이 공(public) 개념을 출발 정신으로 갖는 공화국(republic)의 실제적인 지배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역사의 첫단추를 잘못 끼운 정도가 아니라 옷을 뒤집어 입은 꼴이었다.

공화국은 보편적으로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익을 목표로 하는 사회로서,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나라”를 뜻한다. 그러나 이땅에서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익을 목표로 하는 사회’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실종되었고, 다만 ‘법의 권위가 지배하는 나라’의 의미로만 남았는데, 그마저 ‘법의 권위’ 아닌 ‘힘’이 지배해 왔다. 공화국은 구성원들에게 권력 구조상 ‘대물림하는 왕 대신 대통령을 뽑는다’는 의미로만 남게 되었고, 그 결과 민주주의의 가치와 민주화 운동의 당위성은 그래도 넓게 인식되었던 것에 반해 공화국 이념에 대해선 담론 형성도 없었고 토론도 제기되지 않았다. 이렇게 공화국 이념은 철저히 배반된 채 국민에게서 버림받아 이 사회에 공익성은 설자리를 잃었고, 정치·경제·교육·언론·법조·국방 등 나라의 공적 부분은 온통 사익 추구를 위한 장으로 변질되었다. 공당이어야 할 정당은 사당이었고, 공기여야 할 언론은 권력의 하위 수단이 되거나 조·중·동이 보여주듯 사익추구 집단의 무기가 되었으며, 공교육의 장은 돈벌이 장사판이 되었다. 공익성이란 이른바 필수 ‘공익’ 사업장에 대한 직권중재 제도에서 보듯이 노동자들의 공익성 요구를 탄압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으로만 그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 사회적 약자들의 공익성 요구를 색깔론으로 막아왔던 것은 그만큼 이 사회에서 공익성이 얼마나 배반되고 있는가를 반영하는데, 최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박세일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반민주, 반시장, 반민족 세력이며, 좌파정부”라고 규정함으로써 색깔론이 사익추구 집단에게 가장 유효한 무기라는 점을 다시금 입증해주었다.

공익성의 실종…. 오늘날 민주화되었다는 한국의 사회 상태가 험악해진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조상 말씀은 여지없이 허언이 되어, 보릿고개 시절보다 경제력에 엄청난 성장이 있었지만 인심은 각박해졌고 사회는 험악해졌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무한 경쟁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 모두 “조금도 손해볼 수 없다!”라고 무장한 정글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국민연금이 파행의 길을 걷고 구의회들이 서로 다투어 조세저항을 부추기는 모습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말대로 나라의 정체성을 바로잡고 박세일 의원의 말대로 역사 청산론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 고리는 바로 공익성이다. 언론개혁, 정당개혁이 역사 청산이라는 과제와 만나는 고리가 바로 공익성이며, 사립학교법 개정 등 교육개혁이 또한 그러하며 국가보안법 폐지가 또한 그러하다. 역사청산이란 바로 색깔론으로 무장해온 사익추구 집단에게 나라의 정체성에 담겨 있는 공익성이란 칼을 들이대는 것이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출처 : 밤의 조선일보
글쓴이 : 터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