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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권력] 낯뜨거운 일왕찬가

낙엽군자 2006. 1. 6. 08:13

[언론권력] 낯뜨거운 일왕찬가

족벌신문들은 이제껏 스스로 민족지다 정론지다
외쳐왔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오르면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오욕과 굴종으로 얼룩진 한국 신문
100년의 진실을 이들의 주장과 비교한다. 편집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때도 야비한 수법인
세무사찰을 받았다.”

지난 6일 조선일보사 방우영 회장이 창간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하며 한 말이다. 이 짧은 말에는 현재 국세청
세무조사에 대한 강력한 불만과 <조선일보>가
민족지였다는 주장이 함축돼 있다. 실제로 조선일보는
친일 문제가 나올 때마다 늘 격렬하게 받아치곤 했다.

“김 사장, 제정신으로 하시는 일입니까? 반일·친일
논쟁이 에스컬레이트하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상상도 안
하십니까? 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 선생까지도
욕보이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1985년 4월 조선일보가 지면으로 <동아일보> 사장에게
보낸 공개편지 중 일부다. 당시 `민족지-친일지 논쟁'이
벌어진 것은 동아일보가 그해 4월1일 창간 65돌 기념으로
사회면 머리에 조용만 고려대 명예교수의 글을 실은 것이
발단이었다. 이 글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탄생과정을
밝히면서 조선일보를 “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으로, 동아일보를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신문”으로 묘사했다.

이 기사가 나간 지 보름 뒤인 4월14일 조선일보는 선우휘
당시 논설고문의 이름을 단 `동아일보 사장에게 드린다'는
글로 지상 반격을 가했다. 선우휘 고문은 이 글에서
김성열 당시 동아일보사 사장을 향해 직설적으로 “두
신문사가 서로 상처를 입을 때 이 사회에 이로운 것이
무엇일까요” 라고 물으며 싸움을 중지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지면을 통해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 이라며 조선일보 공격을 멈추지 않자,
조선일보도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 이었다며 이번
기회에 “친일계보가 속속들이 파헤쳐져야 한다” 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두 신문은 이 논쟁이 서로의
치부를 들춰내자 서둘러 수습하고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조선일보는 창간 81돌을 맞아 지난 2~7일 5회에 걸쳐 쓴
`조선일보 사장 열전', 8~19일 8회에 걸쳐 쓴 `명기사
명사설'을 통해 조선일보의 일제하 행적을 `반일'에 맞춰
보도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 특집에서 그들의 다른
면, `항일'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길고 진한
`친일'의 어두운 그림자는 가리고 보여주지 않았다.
역사를 외눈이 아닌 두 눈으로 바로 보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지워 없앤 친일 역사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실은 조선일보가 일제 강점기에 썼던 기사와
논설에 그대로 남아 활자로 보관돼 있다.

“춘풍이 태탕하고 만화가 방창한 이 시절에 다시 한 번
천장가절(天長佳節)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庶)가
경축에 불감(不堪)할 바이다. 성상 폐하께옵서는 육체가
유강하옵시다고 배승하옵는 바, 실로 성황성공(誠惶誠恐)
동경동하(同慶同賀)할 바이다.”

봉건시대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린 글이 아니다.
조선일보가 1939년 4월29일치 사설(전문 3면)에 당시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천장절)을 맞아 쓴 생일축하문이다.
스스로를 낮추는 도움줄기 `옵'을 남발하며 비굴하게 몸을
굽힌 이 글은 신문의 사설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극심한 `천황 찬가'다. `황공'도 모자라 `성황성공'이라
하고, `경하'도 부족해 `동경동하'라 하며, `충성'도 양에
차지 않은 듯 `극충극성'(克忠克誠)이라 하고, 일왕을
`지존'(至尊)이라고까지 부르는 이 사설이 `민족지'
조선일보에 버젓이 실린 것이다.

조선일보의 친일 기사·사설은 일제 말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1920년대 네 차례 정간조처를 당하고,
민족주의·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언론인이 축출된 뒤
조선일보의 필봉은 무디어지고 꺾여나갔다.

32년 1월8일 발생한 `폭탄 테러'를 조선일보는 호외로
보도한 데 이어 10일치 1면 머리로 이 사실을 자세히
알렸다.

“천황 폐하께옵서 육군관병식행행으로부터 환행하시는
어료차(천황의 마차)에, 노부(천황의 행렬)가 앵전 문앞에
이르렀을 때에 어경위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기사는 “천황 폐하 환행도중/ 노부에 돌연 폭탄을
투척/ 8일 오전 동경 경시청 앞에서/ 어료차
별무이상'이란 제목으로 보도됐으며, 기사 말미에
“범인은 … 조선 경성생 이봉창(32)”이라고 썼다.
국내외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드높인 이봉창 의사 폭탄
투척 사건을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일본제국 편에
서서 이 의사를 `범인'이라고 딱지 붙인 것이다.

33년 계초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뒤, 그리고 37년
중-일 전쟁 발발을 앞두고 조선일보의 친일보도는 그 도를
한층 더해간다. 이런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37년
1월1일치 1면이다. 이날 조선일보는 일왕 부부의 사진을
1면에 크게 실었으며, 또 총독의 새해기념사와 휘호를
실어 지면 변화의 획을 그었다. 조선일보는 이후 해마다
1월1일치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커다랗게 실었다.

37년 7월 `중-일 전쟁'이 나자 조선일보는 마침내
일본군을 `아군' 혹은 `황군'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37년 7월19일)

8월2일에는 사설(`총후(후방)의 임무―조선군사후원연맹이
목적')에서 “제국 신민으로서 응분의 의무와 성의를
다하고자 시국대책을 강구 실시하고 있는 중
조선군사후원연맹은 그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썼다.

“요는 국민 각 개인은 각각 힘자라는 데까지를 목표로
하고 응분의 성의를 다하는 데 있을 것이다. 있는 이는
있는 이대로 기만원을 내는 것도 총후의 임무요,
출정장병을 향하여 위로 고무 격려의 편지 한장 보내는
것도 총후의 임무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전선이 확대돼
전쟁자금이 부족하게 되자 8월12일 아예 조선동포들에게
국방헌금을 내도록 독려하는 `사고'를 낸다. 이 사고는
신문사와 사원들의 헌금 솔선을 밝히면서
“북지사변(중-일 전쟁) 발발 이래 민간의 국방헌금과
군대위문금은 날로 답지하는 형편인데 본사에서는 일반
유지의 편의를 위하여 이를 접수 전달하려 하오니 강호
유지는 많이 분발하심을 바랍니다”라고 돼 있으며, 이후
고정란으로 실린다. 헌금이란 이름의 재산수탈이 시작된
것이다.

38년 1월1일 조선일보는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과 함께
미나미 지로 총독이 제창한 내선일체를 미화하는
특집기사를 싣는다.

신문 제호를 가려 놓으면 어느것이 `민족지'이고 어느것이
총독부 기관지인지 구분키 어려울 정도로 논조가 친일로
치달은 것이다.

이해 4월 일제는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만들어 조선의
젊은이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기 시작했다. 38년
6월15일 조선일보는 육군지원병 훈련소의 개소를 맞아
사설과 1면 머릿기사로 “황국에 대하여
갈충진성(竭忠盡誠)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

다시 중국침략 1돌을 맞은 38년 7월7일 조선일보는 이를
기념하여 사설·머릿기사 등 전 지면을 동원해
“열철일타의 일본혼이 총후국민의 의력과 같이 동아의
신질서 건설의 발단을 만든 국민감격의 기념일인 7월7일을
맞이하여 전 조선의 도시 농산 어촌에 들끓는 총후
황국신민의 … 물적 심적 총동원의 체제는 귀한 호국의
영령에 바치는 조의와 출정 장병의 신고를 생각케 하는
뜻깊은 여러가지 행사” 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폐간 4개월 전인 40년 4월 조선일보는 일왕 생일을
맞아 이제껏 신민(臣民)이라고 하던 조선 백성을
신자(臣子)로 불렀다.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이날에 제 39회의 어탄신을 맞이하옵시사 … 억
신자(臣子)의 충심으로 흥아성업도 황위하에 일단은
진척을 보아 선린의 새 지나 국민정부가 환도의 경축을
하는 이때에 이 아름다운 탄신을 맞이한 것은 더욱 광휘
있고 경축에 불감할 바이다.”

그리하여 조선 백성은 일거에 일왕의 자식이 돼 버렸다.

이처럼 극한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40년 8월11일
조선일보는 폐간된다. 폐간과 관련해 <조선일보 80년사>
발간사에서 방상훈 사장은 “민족지들이 친일을 했다면
일제가 왜 폐간을 했겠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한 주된 이유는 38년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물자절약 및 조선어 말살
차원에 있었다. 이는 폐간사에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 이라고 밝힌 데서도
조선일보가 무슨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폐간 보상금으로 매일신보와
총독부로부터 각각 20만원과 80만원을 받았다. 당시
가미가제 전투기 한대가 10만원이었음을 보면 적지 않은
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친일행위는 폐간으로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방응모는 35년 창간한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월간조선>의 전신)을 본격적인 친일 잡지로
개편해 총독부의 요구에 부응했다. 조광 40년 3월호는
“일본제국과 천황에게 ― 성은 속에 만복적 희열을
느끼며” 라는 제하의 권두언을 내보내고 이어
7월호에서는 “만세 일계의 황통을 이으옵신 세계 무비의
깨끗하옵신 역사를 가진 우리 일본 황실의 번영이 이처럼
날로 점앙하는 것은 위로 성명(聖明)하옵신 천황폐하를
모시옵고 아래로 국민이 일치단결 국운의 번영을 꾀한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이해 10월호에서는 일제의 조선통치 30년을 기념하면서
“지금부터 만 30년 전 일한 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위해 양국 병합의 조약을 체결”
했다고 경술국치를 왜곡했다. 또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통치의 대본을 정하여 창업의 토대를 쌓은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 고 무단통치의 장본인을 찬양하였다.

41년 신년호에서는 다음과 같은 헌사로 황실에 대한
충성을 표시한다. “서기 넘치는 신년을 맞이하여 천황
폐하, 황후 폐하의 성수무강하옵시기를 충심으로 비옵는
동시에 황태자 전하, 의궁 전하, 희궁 효궁 순궁 천궁
사내친왕 전하께옵서도 어건강하옵시기 삼가 비는
바입니다.”

이어 2월호 사설에서는 `쌀을 갖다 바칠 것'을 독려하고
나섰다.

“내 손으로 지은 쌀을 내 마음대로 소비하고 처분할 수
있는 것이 구체제라면 내 손으로 지은 쌀, 내 자본으로
만든 물건을 모두 들어 나라에 바치고, 그 처분을 바라는
것이 신체제요, 총력 운동이요, 또 신절을 다하는
소이이기도 하다.”

이 사설이 나갈 즈음 일제의 조선 곡물 수탈은 한층 도를
더한다. 41년 쌀 수확량의 43.1%였던 일제의 수탈률은
44년에 이르면 63.8%까지 올라간다. 먹을 것이 없는
조선의 민중은 말 그대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그런데도 <월간조선>은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월간조선이
“일제치하 조선의 광명으로서 겨레의 어둠을 밝혔던
조광” 의 후신이라고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7월11일치 사설에서 조선일보를
반통일신문이라고 비판하는 국내외의 주장을 반박하며
“조선일보는 어떤 협박에도 길들여지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 그들의 친일은 길들여진
결과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이었단 말일 것이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