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밤의 조선일보

낙엽군자 2006. 1. 6. 08:11
<a href="http://cafe.daum.net/nightc">Click Here! http://cafe.daum.net/nightc</a>

조선일보는 총독부가 친일파들을 앞세워 선전도구로 창간한 신문이다. 90년 조선일보사가 출간한 <조선일보70년사>에는 “조진태, 예종석, 유문환, 최강 등 대부분 대정실업친목회 회원들인 39명이 발기인이 되어”조선일보를 설립했다고 나와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정실업친목회는 당시 대표적 친일기업인 단체였으며 조선일보 초대 사장을 지낸 조진태, 초대 부사장겸 발행인 예종석 등은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프랑스의 경우 전후 나치 하에서 15일 이상 발행된 신문을 반역신문으로 간주, 모두 페간시켰다. 사주인 방응모 개인의 친일행적은 차치하고라도 우리가 프랑스처럼 과거사를 정리했다면 조선일보는 이미 해방후에 사라져 역사속에서나 접할 수 있는 신문이 되었을 것이다.1927년 12월 17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우리민족의 상징인 ‘백의(白衣)’를 더 이상 입지 말자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 날짜 사설에서 “백의(白衣)는 불상(不祥)한 (것의) 표상이니 조선에서와 중국 일본 및 기타 동양에서 몽상(蒙喪)의 표상으로 대표되는 것”이라며 백의폐지운동을 부르짖고 있다. 백의폐지운동은 조선총독부에서 정책적으로 추진했음을 보여주는 문건이 발견돼 진상이 공개된 바 있다.

한 언론학자는 1940년 8월 폐간 당시 조선일보는 제호만 가리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구별이 안될 정도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조선일보의 폐간은 강제폐간이 아니라 자진폐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8월 10일자 폐간사에서 “신문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 폐간한다”고 한 대목을 보면 강제폐간 냄새가 거의 안난다. 폐간후 조선일보가 보상금을 챙긴 것도 그 한 이유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일보는 일본군을 아군, 침략전쟁을 성전(聖戰)(40.3.10 사설)이라며 본격적으로 친일성을 드러냈다. 국방헌금 강요와 물자동원 등 전쟁지원에 앞장선 것은 물론 신사참배, 궁성요배 등 총독부의 황국신민화 정책도 충실히 홍보하였다.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조선일보는 훨씬 이전부터 민족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1932년 일왕의 마차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와 홍구공원 거사의 주역 윤봉길 의사를 모두 ‘범인’으로 보도했다. 조선일보 폐간후 방응모 씨가 잡지 ‘조광’을 창간, 계속하여 친일노선을 견지한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다.

69년 박정희의 3선개헌 당시 조선일보는 반대는커녕 이를 지지하였으며, 72년 유신 때는 선포 다음날인 10월 18일자 사설에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조치”라며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다. 박정희에 이어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 출범때도 조선일보는 이같은 작태를 되풀이 했다. 한마디로 조선일보는 독재권력에 맞서기는커녕 오히려 이들과 야합하면서 그 대가로 단물을 얻어먹고 커온 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월간조선의 조갑제 부국장은 언젠가 ‘마당’이라는 월간지에 ‘오보’에 관한 글을 쓰면서 “가장 큰 오보는 보도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조선일보의 가장 큰 오보는 86년 ‘김일성사망설’ 보도가 아니라 바로 역사의 진실을 보도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과거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는 조선일보여! 팔순 나이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 정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