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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1 운동의 진실 3편 무오선언편

낙엽군자 2006. 1. 5. 10:36

무오 독립선언 일명 대한 독립선언의 비밀

무오 독립선언 역시 비밀의 배일에 있어서 언제 선포가 되었으며 정확한 날짜는 ?
누가 초안을 작성 하였는지? 왜? 선포를 하였는지? 서명자 39인은?
단 한번이라도 전부 만나서 상의 하였는지?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 무오독립 선언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39인 서명자 후손되는 분들은 3.1 독립선언 33인 서명자 처럼
이곳에 서명한 것을 위대한 업적으로 보고를 합니다. 서명 자체도
위대한 업적임은 틀립 없는 사실이며 또한 3.1운동 서명자 33인과
무오선언 39인 서명자의 공로는 똑 같다고 저는 생각 합니다.

3.1 운동이 33인이 주인공으로 생각하시는분들은자유 이지만.

판단은 여러분 들이 하시기 바랍니다.


3.1운동 서명자 33인중 기독교계 16명 (목사와 전도사 13명 포함)은 서명도 미루고
미루다 거사 바로 전에 서명 하였고 거사 전날 손병희 집에서 모임도 대부분 불참하였고


3.1일 거사도 탑골 공원에서 민중과 함께 거행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요리집
에서 약식으로 선언식을 낭독하고 스스로 자수 하여 광명 찾는 식으로
경무청에 연락 하여 스스로 연행되어가 청년 학생들에게 실망감을 주었습니다.

연행되어가서 발뺌하기 바빳던 역사를 우리는 기억 하여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 합니다.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어쩔수 없이 이름을 빌려 주었으며 무오선언
서명자를 천천히 읽어보시면 많은 사람이 단지 이름만 빌려주었습니다.


범재선생의 대동 단결선언 처럼 위대한 투쟁에 동참하도록 미주에 있는 분들은
이름만 넣은 것 입니다. 동제사 우장 신규식 좌장 단재 신채호 소장파이며 중견간부
역할을 충실히 한 소앙 조용은 범재 선생의 영원한 동지 겸곡 박은식 선생 청사 조성환
이동휘 이동령 이시영 등등

모든 것은 상해의 동제사가 주축이 되어 실행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사가 분들은 소앙 조용은 이 초안을 작성 하였다고 하지만 제 생각은 항상 전면에는

동제사 소장파 요원들이 나서는 것은 기본이기에
총사령관 범재 선생이 초안을 작성하여 소앙 선생에게 지시한 것으로
추측하지만 정확한 것은 초안 원본을 확인하여 글씨체를 대조하는 방법이
가장 정확 합니다.

 

학설이 난무 하지만 몇번을

말씀드리지만 정확한 퍼즐 범재선생이 없는 상황에서 아무도 진실을 말

할수 없습니다.

 

 

아래 인용과 논문을 천천히 읽어 보시며 참조 바랍니다.

무오독립선언서에 대하여

1918 음력 11 만주 ·노령을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39명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 1918 무오년에 선포되었다 하여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라고 하며, 독립선언서 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우리 대한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닌 우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한토는 완전한 한인의 한토이니, 우리 독립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의 감정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님"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병합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 하였다. 그리고 "2천만 동포들에게는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 요구하였다.

독립선언서의 특징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이며, 한일병합의 무효를 선포하고, 우리 독립의 기간이라 있는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게 " 요구하였다는 , 무력적 대항을 선포하고 선언서의 대포자로는 해외의 저명한 인사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는 등을 있다.

기초와 발표시기에 관한 문제

기초

「무오독립선언」을 기초한 인물에 대해서는 趙素昻이 기초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지만 당시 대종교교주였던 金敎獻이 기초했다는 설도 있다.

· 조소앙설:

「무오독립선언」의 기초를 조소앙이 기초했다는 근거는 먼저 조소앙의 자전에 보면,

創立大韓獨立義軍府 呂爲正領 自任副領 手草「大韓獨立宣言書」尋見國內代表 來傳「獨立宣言書」之草稿 約與呼應23)

라는 내용과 정원택의「지산외유일지」에 보면 선언서의 기초를 조소앙이 맡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조소앙이 吉林省 어느 절간에서 선언서 작성을 했다는 정원택의 증언내용을 살필 있으며 조소앙에 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대동단결선언」의 내용의 일부가「무오독립선언」의 내용 일부와 상당히 흡사하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 발표시기

다음은「무오독립선언」에 관한 발표시기에 관한 是非 문제인데 발표시기가 확실치는 않지만 필자는 적어도 양력으로 1919 2 전에 이미 발표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29)

「무오독립선언」은 만주지방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중광단원들을 중심으로 규합된「대한독립의군부」의 명의로 1919 2 경에 상당한 준비기간을 통하여 발표된 선언이라 있을 것이다.

혈전주의로서의 무오독립선언

이러한 「무오독립선언」의 혈전주의는 연결되어 2·8독립선언 또한 일본이 만일 吾族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 텐데 吾族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겠다는 외침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이 때「무오독립선언」의 혈전주의는 동경 2·8독립선언 에도 강경하게 나타나지만 국내 3·1독립선언으로 나타나면서 평화주의적 온건 노선으로 바뀌어 진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문제들을 살피더라도 만주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은 분명히「무오독립선언」의 무장혈전주의의 맥을 계승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으며 시대적·지역적 상황을 살피더라도「무오독립선언」이 당시 무장독립운동의 책원지라 있는 만주의 심장부에서 발표되었다라는 면에서도 더욱 그것을 확실하게 한다.58)

58) 후일「무오독립선언」의 주축이 되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무장 독립 투쟁과 기타 독립 운동 전선에서 피흘린 것과는 달리 3·1독립선언의 주축이었던 최린·최남선 등 많은 민족 대표의 대부분이 직접·간접으로 친일적 인물로서 전향해 버림은 대조가 된다.


3·1독립 선언과의 관계

「무오독립선언」이 발표시기에 대한 많은 異說을 안고 있으면서도 2·8동경유학생독립선언, 그리고 국내 3·1독립선언과 연관하여 때에 불과 1개월 가량의 간격을 두고 마치 계주경기처럼 만주와 일본, 그리고 국내에서 잇달아 일어 났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바다건너 일본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은 본국에 영향을 주었고 대륙으로 연결된 만주에서 당시 독립운동지도자들이 총망라되어 국내외로 발표된 독립선언은 3·1독립선언의 배경설명에서 그다지 취급되지 않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사 또는 3·1운동을 다룸에 있어서「무오독립선언」은 결코 경시될 없는 것이며 단절된 역사의 사건이 아니라 3·1운동의 도화선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되어 진다.


맺음말

「무오독립선언」은 당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만주 심장부에서 완전자주독립을 쟁취하겠다는 혈전주의로 발표되어 국내외적으로 많은 역사적 계기를 만들어준 사건이었다. 특히 일제의 桎梏으로부터 벗어나려는 3·1운동의 거족적인 민족봉기에 있어서도「무오독립선언」이 기폭제적 역할을 했다는데 더욱 의미가 있다.

당시 일제의 팽창적 한반도 상륙으로 시작되는 식민지화 과정을 통하여, 또는 한일합방으로 시작되는 일제의 완전식민지화 과정을 통하여 일제의 침략이 그토록 일방적이고 강도적이며 야수적이 아니었던들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그토록 사생결단의 격렬한 무장투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73)

「무오독립선언」은 이러한 침략과 일제에 대한 사생결단을 위한 혈전의 선언으로 우리민족독립의 의지를 대한독립대표의 이름으로 최초로 표명한 사건으로서 무장독립투쟁의 새로운 장을 예고하는 선언이었다는데도 주목된다.

글에서 필자는「무오독립선언」이 독립운동기의 어떠한 역사적 사건보다도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무오독립선언」이라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3·1독립선언과 연결시키면서 보다 폭?은 역사적 시각을 형성시키고 역사적 가치확인을 위한 기본적 시도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자료제약의 무리가 따르고 필자 스스로 견문의 미천함을 통박하면서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상술한「무오독립선언」의 역사적 비중을 다음과 같이 결론맺고자 한다.

첫째,「무오독립선언」이 당시 독립운동의 책원지라 있는 만주에서 발표되었다는 것은「무오독립선언」이전의 군소독립단체들에 단합할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훗날 무장항일투쟁에 혈전주의의 맥을 계승시켰다.

둘째,「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해외독립운동 지도자들인 대한독립대표들에 의해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으로 혈전주의적 대일항전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셋째,「무오독립선언」은 시대적 상황을 견주어 3·1독립선언의 動團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끝으로 독립운동사연구에 있어서「무오독립선언」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연구작업과 사료의 발굴, 특히 발표시기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많은 연구를 기대해 본다.

73) 김창순,「항일독립운동에 있어서의 무장투쟁의 위치」『일제하 식민지시대의 민족운동』, 풀빛, 1981, p.153.





 
출처 : 블로그 > 위대한 한국인 범재 김규흥 | 글쓴이 : 푸른 하늘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