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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하다!청년 학도야! 2.8 동경 선언의 진실 2장

낙엽군자 2006. 1. 5. 10:36

장하다! 청년 학도여!! 2.8 동경선언의 진실 2장

1967년 유명한 6일 전쟁이 이스라엘과 주위의 아랍국들과의
전쟁은 전 세계인들은 경악을 하였습니다.인구와 영토 면에서는 공룡과 어린
아이의 싸움처럼 느꼈으나 뚜껑을 열자 일방적인 이스라엘의 압도적 승리로
단 6일만에 상황종료가 되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정신적인 면으로)

그러나 이면에는 이스라엘 행 비행기는 미국에서 참전하려는 학생들로 만원을
이루었고 아랍권은 피난하는 비행기로 만원을 이루었습니다.

2.8 동경선언이 선포되고 약 300 여명의 학생들은 조선으로 도착 하기 시작
하였습니다.곧 벌어질 3.1운동의 선봉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젊은이들은
조선 행에 몸을 던진 영웅적인 학생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1운동 외에는 잊혀진 투쟁사 동경선언!!

얼마 전 일본의 침공은 축복 이라고 하여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일본이 침공 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서 침공 하였을 것 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어린아이도 자기 것 빼앗기면 격렬하게 항의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백주에 금수강산 우리의 땅을 빼앗기고 우리의 형제 자매가 죽임과 강간을 당하여도
투쟁 하지 않고 축복이라고 하며 찬양 하였다면 영원히 2등 국민 일본의 속국이 되였을지
모릅니다. 또한 위대한 투쟁 한번 하지 않았다면 5000년 역사의 위대한 배달 민족은
세계 역사에 조롱 거리이며 대대손손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려 노력 하였을 것입니다.

더욱 한심스러운 사실은 이렇게 자랑스러운 모든 투쟁의 총 사령관 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온 역사학자와 정부는 애국 선열들을 모독하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늦었지만 정부와 역사 학자는 총 동원이 되어 진실된 독립운동사를 밝혀야 합니다.

2.8 동경 독립선언 역시 범재 선생의 위대한 투쟁사에 동참한 자랑스럽고
역사에 길이 빛날 젊은 청년 학생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항일 투쟁사를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며 빛내야 합니다.


아래 참조 글을 읽으시면 많은 내용이 잘못된것을 느끼 실수 있습니다.
예로 학생들이 작성 하였다는 선언서도 상해에서 내려온 무오선언처럼 혈전을 맹약한 과격스러운 것을 손병희 최남선 등에 의해 수정되어 보완된 것 입니다.더욱이 3.1 독립 선언서 역시 과격한 것을 수정 삭제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단서 입니다.조금 길지만 천천히 읽어보시면 무엇이 잘못 되었나 아실수 있습니다.


참조 인용 2.8 독립선언 논문


1919년 2월 8일 동경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한다.
3?1운동 전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모두 셋이다.

첫째 1918년 11월에 만주?노령에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 둘째 <2?8독립선언서>, 셋째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서>이다.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에 의하여 작성되었다는 점과 3?1운동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데 그 특색이 있다.

동경유학생들은 이미 한말 때부터 대한흥학회를 조직하고, 학회지 ≪대한흥학보≫를 간행하여 국내에 배포하는 등 애국개화운동에 기여하였으며, 1910년 망국 이후에는 조선유학생학우회?조선기독교청년회?조선학회?조선여자친목회 등 자치단체를 조직하여 회원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특히 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2년 10월에 조직되어 동경유학생 전원이 자동 가입되었으며, 회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는 한편,

웅변?토론?강연?졸업생축하회?신입생환영회 등의 모임을 열어 회원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왔다. 재일유학생들이 한국의 독립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라고 하겠으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된 직접적인 자극은 1918년 1월 종전을 앞두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표한 평화원칙 14조와 그 해 11월에 성립된 제1차세계대전의 휴전조약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유학생들에게 고무적이던 보도는 1918년 12월 15일자 ≪저팬 애드버타이저 The Japan Advertizer≫(神戶에서 영국인이 발간한 영자지)에, <한국인, 독립을 주장 Korea, Agitate for Independence>이라는 제하에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하였다는 기사와, 12월 18일자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기사에서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동맹회의 2차연례총회가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보도였으며, 아울러 한국대표가 이에 포함된 사실까지 알려주었다

. 이 보도에 접한 재일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동경 간다(神田)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회를 열어 오늘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의 동포들도 이미 실행운동에 착수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서춘?백관수?이종근?송계백?김도연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이를 일본정부가 각국 대사공사 그리고 일본 귀족원?중의원 양의원에 보내기로 결의하고 1월 7일 청년회관에서 회원 약 200명을 모아 실행위원의 결의사항을 보고하고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었다.

실행위원 중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북경으로부터 서울을 거쳐 동경으로 온 이광수?김철수를 새로 추가하여 11명의 실행위원이 먼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기초위원으로는 백관수?김도연?이광수를 선출하였으나, 실제 문안작성은 이광수가 전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완성된 선언서 초안 한 부는 송계백과 최근우에 의하여 국내에 반입되었고, 중앙학교 현상윤?송진우?최남선?최린 등이 이를 받아보고 흥분하였다는 것이다.

최팔용은 1919년 2월 7일 일문으로 된 <민족대회소집 청원서>를 동경 시바구(芝區) 고야마정(小山町)에 있는 이토인쇄소에서 1,000부를 인쇄하고, <독립선언서 부(附)결의문>은 국문?일문?영문이 있었으므로 7일밤 김의술 집에서 국문?일문을 등사판으로 밀고 영문은 타자를 쳐서 이튿날 아침 10시 이들 청원서와 선언서를 먼저 우편으로 동경주재 각국 대사관?공사관과 일본정부의 각 대신, 일본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보내고, 오후2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었다.

그리하여 600여 회원의 환호 속에 역사적인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동경유학생의 거의 전원이 모인 이날의 독립선언회의에서 유학생들은 독립실행방법을 토의하려 하였으나 관할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장이 강제해산을 명령하여 실행위원 10명이 붙잡혔다. 그러나 이광수는 이미 1월에 중국으로 떠난 상태였다. 2월 12일 유학생 1000여명이 다시 히비야공원에 모여 이달(李達)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독립선언서>를 재차 발표하려 하였으나 이달 등 13명이 붙잡혀 해산되고 말았다. 23일에는 또 변희용?최재우?장인환 등 5명이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를 인쇄하여 역시 히비야공원에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벌이려 하였으나 배포 도중에 붙잡혔다.

3?1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조선독립단 동맹휴학촉진부가 결성되어 유학생들이 동맹휴학운동을 벌였으며, 고국으로 돌아가 3?1운동에 참여하는 학생도 많았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19년 2월 8일부터 5월 15일까지 재일유학생 359명이 귀국하였다는 것이며, 그 중 127명이 서울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젊은 동경유학생들이 기초하여 발표한 <2?8독립선언서>는 먼저 일제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이었다고 규탄하였다. 이어 식민지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였고,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선언문은 두 가지 점에서 <3?1독립선언서>보다 의미있는 문서라 할 것이다.

첫째, 이 선언서는 최남선이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참고한 문헌이었다는 점이다. 최남선은 이광수의 문장을 한층 다듬었으나 그 문맥은 같은 것이며 되도록 온건하게 쓰라.는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2?8선언서의 과격한 표현을 대폭 연화시킨 흔적을 드러냈다. 특히 선언서 말미의 결의문 4항을 공약 3장으로 바꾼 최남선은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야 하며 배타적 감정을 삼가라. 고 주장하였다.

결의문을 건의문으로 변조하였다고는 할 수 없으나 독립을 요구한다는 <2?8독립선언서>의 강력한 의사표시가 부드럽게 표현된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둘째, <2?8독립선언서>는 정당한 방법으로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지만,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열혈을 흘릴 것이며, 영원한 혈전을 불사한다고 주장하였으나 <3?1독립선언서>에서는 단 한마디도 피의 전쟁을 언급한 일이 없으며 공약 3장 2에서, 다만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2?8독립선언에서는 무단통치하에서 신음하는 2.000만 민족의 고통과 강렬한 독립요구를 한층 더 절실하게 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8독립선언서>
일본 동경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의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서. 서두에서 한국은 4,3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여, 한민족의 독립근거와 그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침략과 국권찬탈을 사기와 폭력에 의한 수치스러운 역사였다고 전제하고, 왜 한민족이 그 동안 수 십 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야 했는가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또 일제의 통치정책을 한민족의 모든 자유를 짓밟고 민족차별과 생존권 박탈을 자행한 고대적 노예정책이었다고 비난하고, 자유를 위한 조선민족의 투쟁은 앞으로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끝으로 한민족의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고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약속하고 있다. 말미에는 결의문 4개항이 제시되어 있는데, ①한일병합조약의 폐기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②민족대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③만국평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할 것이며 ④이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영원한 혈전을 벌일 것을 선언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3?1독립선언서>와 다른 점이다.



 
출처 : 블로그 > 위대한 한국인 범재 김규흥 | 글쓴이 : 푸른 하늘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