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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연히 만들어진 우주 왕복선 소장파 몽양선생의 활약 2

낙엽군자 2006. 1. 5. 10:34

우연히 만들어진 우주 왕복선 소장파 몽양 여운형 선생의 활약 2편

몇 일전 디스커버리 호가 무사히 지구에 귀환 하는 장면을 보며
4~5백년전 가장 상상력이 풍부하고 미래를 정확히 예언 한다고 하는 사람도
우주 왕복선이 우주에 머믈 것을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 입니다.

빌 게이츠도 1981년 에 640kb 용량의 메모리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 하다고
말하였고 1977년에 Digital 회장 케네스올슨은 개인적으로
집에 컴퓨터를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고 허언에 망언들을 하였습니다.

약 30년이 지난 지금 이런 엉터리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한 청년당 당수 혹은 총무 몽양 선생이 3.1운동과 파리 강화회의의 활약은
눈부셨고 몽양 선생의 작품이라고 몇 개월 전 서울대 신용하 명예교수는 말합니다.
범재 선생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는 아주 정확히 연구하셨고 당연한 말입니다.
(명령권자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여러분들은 전편에 보여주신 사진을 기억 하세요)

(인용 장덕수의 회고록)
국내외정세를 검토한끝에 공작원들을 요지에 파견하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일제에 대한 거족적인 항거(3.1 혁명)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여운형은 만주와 해삼위로
가기로 했으며 선우혁은 국내 장덕수는 일본을 거처 서울로 잠입하기로 결정했다.중략

여기에 스스로 설산은 공작원이라고 하며 몽양 선생 역시 공작원으로 길을 떠납니다.
또한 설산은 예관선생한테 명령도 받고 여비도 받습니다.
그러면 예관선생이 3.1운동과 파리 회담을 기획하고 실행 하셨을까요?
예관선생 역시 총사령관 범재선생 으로 부터 명령을 받습니다.

(인용78쪽) 동제사는 1918년 8월에 결성된 신한 청년당의 맥락적인 의미를 갖고있다
유정 몽양등이 예관 백암 (겸곡선생) 의 지도를 받고 동제사에 가입 활동하다가
언론기관에서 항일 필봉을 구사하거나 서점에서 기회를 포착하다가…. 중략
(이때 까지는 몽양선생은 서점 주임이며 유정선생은 기자 입니다)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것은 독립군으로 소총 들고 싸운 사람도 있고
3.1만세운동으로 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음을 당한 사람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누가 언제 왜? 3.1운동과 강화회의를 기획하고 총지휘하고 실행하였는가? 입니다.

건국훈장 1등급을 받으신 30명중에 아무도 없습니다. 몽양 선생 역시
아버님 이라고 부르며 존경하는 범재 선생의 지시로 가장 위대한 독립운동의
선봉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동제사 수 백명 요원들중 핵심요원들은 33인 서명자중 주모자들을 찾아가
3.1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확신하는 모습을 보며 사이버 세계가 있다면
지금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과 감격의 기쁨을 맛 보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기획도 하지 않고
총지휘자도 없이 우연히 우주 왕복선이 만들어 졌고 우연히 종교단체와 학생들이 3.1운동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가들은 몽양 선생이 하였다고 생각하기엔 이해가 되자 않았기 때문 입니다.
갓 대학 졸업하여 자신의 몸 추리기도 바쁜 서점 주임인 월급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교수님처럼 몽양 선생의 업적이라고 확신 하시는 분은 그래도 연구를 많이
하신 분입니다. 범재 선생을 배재한 상태에서 솔직히 말한다면 몽양선생이 3,1운동과 파리 강화회의 주체가 됩니다. 신한 청년당을 결성하고 요원들이 3.1운동을 설득하고
2.8 동경선언이 나오게 하고…..

더 이상의 무슨 증거가 필요할까요?

대한민국의 가장 위대한 독립운동사가 파리강화회담에 승부수를 던진
범재 김규흥선생의 위대한 업적과 함께 엉터리 역사는 반드시 밝혀지리라 믿습니다.

아래 신 교수님의 말씀을 읽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충분히 이해
하리라 생각합니다. 신 교수님은 범재 선생을 전혀 모르는 상황임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며 천천히 몇 번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상해 시절의 여운형

몽양이 협화서국에서 일하고 있을 때, 1918년 7월 초에 장덕수 선생이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에 들려서 몽양을 방문했습니다. 두 분은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한 결과 불가피하게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는 독립운동에서 무엇보다도 청년 조직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하는데 합의하고, 의기투합해서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동지들인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호 등 여러 선생들과 협의한 결과 모두 이를 찬성했으므로, 여섯분이 모여서 1918년 8월 20일 경에 '신한청년당'이라고 하는 청년단체를 조직했습니다. 몽양 33세때의 일입니다.
이 신한청년당은 처음에는 당원이 적었으므로 부서를 정하지 아니하고 몽양이 대표 겸 총무로서 당의 모든 사무를 담당했습니다.
신한청년당이 창당된 직후인 1918년 9월에 몽양은 평안북도 선천에서 노회에 출석을 가탁하고, 국내에 들어와서 옛날 신민회 선배 동지들에게 신한청년당의 창당 사실을 모두 알렸습니다.
이 신한청년당이 몽양이 본격적으로 독립을 해서,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에 큰 공헌을 한 결정적인 조직이 됩니다. 신한청년당은 여섯명이 창립한 것이었지만, 그해 1918년 11월에는 당원이 약 2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 작은 20명의 청년단체가 몽양의 지도 라에서, 몽양이 대표가 되어서 큰 공헌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로 끝나자 미국 대통령 윌슨은 즉각 대통령 특사인 찰스 크레인을 중국에 파견해서 전후 1919년 1월에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임하는 미국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중국고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도록 종용케 했습니다.
크레인이 1918년 11월 상해에 도착하자 상해의 외교단과 범태평양회의 합동 주최로 환영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환영회에 범태평양회의 회원으로서 신한청년단 대표 몽양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크레인은 이 환영회의 강연에서 이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피압박민족의 의견이 크게 존중되어 처리될 것이므로 중국도 대표를 파견하여 피압박의 상황을 열국 대표들에게 알려서 산동문제의 해결을 도모함이 좋을 것이라고 하는 요지의 연설을 했습니다.
이 강연을 들은 몽양은 즉각 파리강화회의가 한국 민족 독립운동에도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기회로 포착할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몽양 선생 본인이 살아계실 때 쓴 기록에는 전부 "절호의 기회로 포착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몽양은 크레인을 별로도 방문해서 한국 민족도 파리에 대표를 파견하고 싶은데 협조해줄 수 있겠는지 요청을 하고, 호의적 반응을 얻어냈습니다.
몽양은 즉시 신한청년당 회의를 소집해서 안건을 회의에 부쳐 설명한 결과 파리에 한국대표를 파견하고 별도로 독립청원서도 발송하기로 합의했으며, 각지와 국내에도 밀사를 파견해서 이것이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임을 알리고 이를 기회로 포착해서 독립운동을 크게 일으키기로 합의했습니다.
몽양은 이에 독립청원서, 또 어떤 기록에는 독립공고서 2통을 작성해서 1통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전달해 달라고 크레인에게 위탁했습니다. 또 몽양은 동일한 내용의 독립청원서 2통을 <밀러드 리뷰지>라고 하는 주간지 사장 겸 주필 토마스 밀러드에게 위탁해서 역시 파리강화회의 의장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전해달라고 위탁했습니다.
그 후의 과정을 보면 크레인 특사에게 위탁한 독립청원서 2통은 전달되었고, 밀러드에게 위탁한 2통은 요코하마에서 일본 스파이에게 가방을 잃어 전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 관한 자료는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의 명의로 이 문서가 1918년 11월 28일자로 독립운동사 사료집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신한청년당의 결성

몽양과 신한청년당은 파리에 파견하는 한국 민족 대표로는 영어가 가장 능숙한 우사 김규식 선생을 선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선편이 이미 초만원이어서 상해로부터 프랑스행 선편들은 모두 3월말까지 만원으로 차 있어서 선표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도 몽양의 민첩하고 능숙한 외교활동으로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중국 대표단 수행원 한 분을 잘 설득해서 선표 한 장을 양보 받아 몽양이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우사 김규식 선생은 1919년 2? 1일 파리를 향해서 상해를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신한청년당이 한국 민족대표로서 김규식 선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는 사실은 그후 3.1운동 봉기의 중대한 영향과 의미를 갖은 것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국내의 애국자, 국민들과 재일유학생들에게 밀사를 통해서 통보되었고, 한국인들은 신한청년당의 파견대표 우사 김규식 선생의 주장이 바로 한국 민족의 전체의사임을 전세계에 천명하는 일은 포함해서, 그것을 주목적의 하나로 해서 3.1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신한청년당의 김규식 대표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은 3.1운동 봉기와 관련하여 국내에 장덕수 선생을 파견해서 자금을 1차로 구해왔으며, 또 두 번째 파견 때에 장덕수 선생은 인천에서 일제에 체포당하게 되었습니다. 동지 장덕수를 빼내기 위해서 다음에 이현희 선생께서 발표할 부분에 가면 몽양은 그를 일부러 통역으로 빼내 쓰시고 계십니다.
신한청년당은 이어서 국내에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 백남규 선생들을 파견했습니다. 선우혁은 평안도 지방에 잠입해서 이승훈 선생 등 신민회의 옛 동지들과 다수 접촉해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대표의 파견을 알리고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순전히 상해 신한청년당 통보로 준비가 따로 된 일이 있습니다.
또 신한청년당의 김철 선생은 서울에 잠입해서 천도교측 손병희 등과 접촉을 해서 김규식 대표단이 파리에서 사용할 독립운동 자금의 송달과 독립운도을 권고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천도교의 손병희 선생도 이미 이 움직임을 다 알고 있었고, 천도교 자금의 상당 부분이 김규식 선생의 파리 대표단 활동에 사용된 것이 명백합니다. 서병호 선생은 서울과 대구에 잠입해서 동일한 활동을 했으며 김순애 선생은 대구에 잠입하여 독립시위운동을 협의하고 돌아갔고, 백남규 선생은 호남지방에 잠입하여 동일한 활동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신한청년당 당원들의 이러한 국내에 들어가서 행한 활동은 그후 3.1 운동 봉기에 직접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신한청년당은 일본에 1차로 당원 조용운을 파견하여 동경유학생들에게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의 파견을 알리고 독립운동을 고취해서 2월 초순에 독립선언을 하기로 합의하고 상해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2차로는 당원 장덕수 선생을 국내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가도록 파견해서 독립운동을 고취하도록 했고 3차로는 당원 이광수를 파견해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케 했습니다.
신한청년당의 활동 등은 재일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2.8독립선언서 맨 끝에 가면 우리 '조선청년단' 즉 재일 유학생들도 대표를 파리에 파견해서, 이미 거기 가 있는 아족의 대표와 공동으로 행동케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당의 통보를 받고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2.8독립선언을 한 것이 사료에 의해서 실증이 됩니다.



 
출처 : 블로그 > 위대한 한국인 범재 김규흥 | 글쓴이 : 푸른 하늘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