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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초능력과 기적 소장파 몽양선생의 활약-5편

낙엽군자 2006. 1. 5. 10:33

초능력과 기적은 있는가?  소장파 몽양 여운형 선생의 활약 5편

초능력은 있는가? 하고 질문을 하면 많은 사람은 "있다" 라고 단호히 말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 입니다. 누구냐? 머리 속에 이스라엘 마술사 유리겔라를
상상 하실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기도나 염력으로 암 환자를 고쳤다고
사기치는 기도원 원장이나 땡초 중들을 생각 할지도 모릅니다.

마술사에서 일약 초능력자로 변하여 미국에서는 영화도 나오고 한국에서는
남침용 땅굴도 찾는다고 헬기 타고 다니고 흑백 TV 시절
수픈 벤딩 하는 그의 능력을 보며 한국인 가슴속에
초능력자로 누구나 믿었을 것 입니다.

"남북통일"까지도 가능하다며 전 국민을 "남북통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마음 한 뜻으로 소리치라고 사기까지 치며 전국민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 당시 돈 없는 한국보다는 돈 많은 미국에서의 사기 행각은 많은 미국인들을
열광하게 하였으며 주요TV 3개사는 실황으로 초빙하기도 하였으나
사기꾼 잡는 사냥꾼 이며 마술사 제임스 랜디의 손을 피해가지 못 하였습니다.

몇 년전 SBS 에서도 사상 최대의 상금 백만불을 걸고 초능력자를 찾았으나
랜디 의 장담 데로 몇회 가지 못하여 도전자가 없어 막을 내렸습니다.
물론 우리가 믿고 또는 세계 각국에서 초능력자로 행세하는 모든 사람은
가짜가 되어 도망가기 분주 하였습니다.앞으로는 모르지만 현재까지 아무도 없으며
초능력 자에게 주는 백만불의 상금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랜디의 요구조건은 아주 간단 하며 어떠한 증언도 필요 없이 자기 눈으로
보는 곳에서 만지지 말라는 단순 한 것이지만 사기와 마술 하는 사람에게는
치명적 이였습니다. 당연히 사기꾼인 유리겔라 는 영국으로 줄행랑 을 치었습니다.

본론보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몽양 여운형 선생의 만주 연해주의 활약은
얼마 전까지 학생이며 서점 직원의 활약으로 글을 써야 하는 사가 선생님들을
백번 천번 이해 합니다.제 생각은 만주 연해주는 범재선생과 동행 하였을 것으로 추측 합니다.

영웅이며 모든 파리회담 전까지 독립운동사의 주인공 범재 김규흥 선생을 배제하고
짜집기 하려하면 어쩔수 없이 몽양 선생이 연합군 사령관도 만나고 체코 군이 남기고
가는 무기를 얻어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초능력자로 칭하여야 할지 아니면 기적으로 연속 홀인원을 하였다고 하여야 할지?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어렵습니다.제가 존경하는 두분 신교수님 과 도올 선생님이 손을 잡고

3.1운동의 진실을 연구한다면 대한민국의 가장 위대한 3.1운동의 주인공이며

한국의 자존심을 세운 범재 김규흥 선생의 위대한 투쟁사가 복원 되리라 굳게 믿습니다.

 

 

아래- 신교수님의 몽양선생의 활약-ㅇ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만주와 노령지역에서의 독립투쟁

한편 몽양 선생 자신은 당시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되어 있었던 만주와 노령지역을 직접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크게 도취하기로 했습니다. 몽양은  1919년 1월 20일 상해를 출발해서 먼저 길림 방면으로 향해 장춘에 도착하자, 동지 심영구집에 머물면서 길림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족숙 여조현 선생, 여준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한청년당의 활동을 설명하고 조국 독립의 절호의 기화가 왔으므로 동지들을 권유해 독립운동을 적극 일으켜서 이 기회를 잃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노령 연해주 포렴으로 가서 몽양은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이동녕, 박은식, 조완식 선생 등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 선생의 파견을 알리고, 지금이 독립운동 봉기의 절호의 기회임을 역설해서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그들도 독립운동을 일으킨 다음에 상해로 돌아와서 독립운동기관을 만들어서 함께 활동하기로 했습니다.
몽양은 또한 이승복 형제와 원세훈 선생 등을 만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강우규, 이동휘 부친, 김치보, 정재관, 강한택, 오영선, 김구하, 이강 선생 등을 만나서 노령에서도 파리에 대표를 파견할 것을 적극 권고하고 독립운동을 협의했습니다.
그 결과 2월 15일 니콜리스크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선언대회를 열기로 합의되었고, 이것을 기다리느라고 약 1개월을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에 북간도에도 연락이 되어서 전 간민회 회장 김약연 선생과 총무 정재면 선생이 블리다보스톡으로 와서 몽양과 만나 조직적으로 약속을 하고 결의를 했습니다.
또한 몽양 선생은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 사령관 체코인 카이더 장군을 찾아가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당시 시베리아에는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저지하고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체코,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연합군들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몽양은 일제의 강점과 식민지 통치를 규탄하고 한국 독립을 역설하는 선전문을 영문으로 지어서 미국 파견군 도서관장 클레멘트,  이분이 몽양의 금릉대학 시절의 영어교수였습니다. 이분의 도움과 수정을 받아서 영국, 미국, 캐나다의 3개국 사령부를 찾아가서 외교선전활동을 했으며, 한국독립운동을 역설하는 수만장의 전단을 만들어서 연합군 병사들에게 배포했습니다.
몽양의 이러한 눈부신 활동은 즉각 효과를 나타내어 이 지역 독립운동에서 실로 커다란 성과를 내었습니다. 그 부분을 몇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첫째로, 몽양의 요청 자극의 영향으로 1919년 2월 15일 니콜리스크에서 전로한인회의가 개최되고 여기서 종래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모체로 해서 임시 국민의회를 설립했다가 3.1운동 후에 이것이 블라디보스톡에서 노령 대한국민회의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령 임시정부는 이미 이때 모체가 2월 달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조직의 개의는 몽양의 활동과  파리강화회의에 노령 대표 파견에 직접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노령 동포들도 몽양의 제의와 권고에 따라서 윤해와 고창일을 파리강화회의의 노령 한인 대표로 파견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몽양의 권고에 의한 것입니다.
셋째로, 간도의 대한국민화, 보통 국민회의라고 부르는 대한국민회가 몽양의 이때의 활동과 관련하여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몽양의 연락을 받고 간도의 간민회는 이때 조직이 다 스러져 버렸었는데, 전 간민회의 김약연 선생과 정재면 선생은 2얼 상순 간도를 출발, 노령으로 와서 니콜리스크로 몽양과 함께 가서 1919년 2월 15일 전 러시아 한인회의 별칭 선언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김약연, 정재면 선생 등 간도 대표들은 몽양을 만나서 지금이 독립운동 고양의 절호의 기회임을 확인하고  전러시아 한인회의에 참석한 후, 몽양과 조직적 행동을 할 것을 약속하고 간도에 돌아가서 종래의 간민회를 부활하고 계승해서, 확대개편해 가지고 간도 대한 국민회를 창립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캐나다에 계시는 정대위 선생이 아버님의 여러 가지 자료집을 내면서 보여주신 것을 읽고, 정재근 선생이 남긴 기록에도 몽양을 만나서 몽양의 이때의 설명과 조직활동의 요청을 받아서 대한국민회를 간도에서 다시 조직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읽었습니다.
넷째로, 만주 노령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서. 통칭 무오독립선언서는 몽양의 이때의 활동과 관련되어서 1919년 2월에 선언된 것입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이러한 별칭을 갖는 무오 독립선언서는 몽양의 내방을 계기로 소집된 니콜리스크 선언대회, 전러시아한인회의에서  1919년 2월 15일 선언된 선언문입니다.
다섯째로 몽양의 활동은 시베리아 주둔 연합군과의 외교활동에 성공하여 연합군사령관 체코인 카이더 장군 등의 적극적 지원을 획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몽양이 카이더를 방문해서 원조를 요청했고, 약소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상호연락을 토의하며 몽양의 은사의 소개와 몇차례의 토론 끝에 의기투합하게 된 사령관 카이더 장군은 직접 자기의 부관 조세프 헌치를 보내서 대동케 하고 군용열차를 태워주어서 무사히 상해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3.1운동 후 즉, 1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체코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 할 때 막대한 최신 무기들을 모두 한민족의 독립군에 헐값으로 넘겨주어서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서 많은 독립군 전투의 승리를 결과적으로 도와주게 된 일이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이미 오양 선생이 이전에 닦아놓은 연대 외교활동 기초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카이더 장군이 귀국 도중에 상해에 들렀을 때 몽양 선생이 앞장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건국 축하의 기념패를 만들어 주고, 연희를 열어 그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 것은 모두 몽양의 사전활동과 관련선상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몽양은 이와같이 눈부신 활동을 하고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해서 1919년 3월 6일 경에 하얼빈 여관에 도착했다가 그곳에서 국내에서 3.1 운동이 전국적 봉기로서 계속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급히 상해로 돌아왔습니다.
몽양의 이러한 신한청년당의 활동은 3.1운동 봉기에 하나의 진원으로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공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몽양의 활동은 만주, 노령지방의 독립운동을 비약적으로 고양시키는 일에도 결정적으로 공헌을 한 것입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한국민족 독립운동사에서 몽양 선생님의 업적은 영원불멸의 빛나는 것이라고, 우리 민족 성원이라면 누구나 당당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출처 : 블로그 > 위대한 한국인 범재 김규흥 | 글쓴이 : 푸른 하늘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