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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군과 병사 소장파 몽양 선생의 활약 6편

낙엽군자 2006. 1. 5. 10:33

장군과 병사-소장파 몽양 여운형 선생의 활약 6편

기억도 제목도 희미한 아주 오래된 영화 중에
적군에 포로가 된 병사들에게 너희 대장이 누구냐?고 묻자 한사람 한사람 일어서며
자신이 대장이라고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대장을 보호 하기 위한 충성심 입니다.

삼국지 소설 속에서 적장의 목을 베면 오합지졸들은 혼비 백산 하여
36계 로 도망가기 분주합니다. 총 책임자의 위치의 중요성은 표현 할수 없습니다.

동서고금 혹은 세계 역사에도 정상회담 혹은 장군들의 회담이 있으면
비슷한 격의 사람들이 만나 회담도 하고 지원도 약속 합니다.

존경하는 교수님의 말씀 이지만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하여야 합니다.

2~3 개월 전에 서점 직원에서 만주 노령 연해주에 와서 연합군 사령관과
회담을 하고 청산리 전투에 필요한 무기도 헐값으로 구입하여 청산리 전투도 승리로
이끌었다고 말씀 하시지만 과연 몽양 선생의 업적 일까요?배후는?

소장파의 활약 1편의 사진을 기억 하세요. 동제사 총사령관의 위상으로 타국의 장성 혹은
책임자와의 교섭은 100% 범재 선생의 후광 혹은 범재 선생의 참여로 보아야 합니다.

3-40 여년 전 건달과 깡패 세계에도 족보가 있었습니다.
타 동네 건달과 마주치면 너희 구역 누구 누구와 나는 친구야!
이 한마디에 상대방은 기가 죽어 형님죄송 합니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하고 넙죽 인사를 합니다.

적어도 연합군 사령관과 회담을 할 때는 이쪽도 비슷한 명함이 있어야
대화가 됩니다.일제 강점기에 절대 비밀 이라고 몇개월전 학생이며 서점 주임이
회담의 주체라고 생각 하는 것은 범재선생을 전혀모르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수정 하여야 합니다.

중국군 총참의 겸 육군 소장 이였으며 당시는 대한만국
독립군 동제사 총 사령관이라고 하여야 대등한 위치에서 회의가 있었으리라
생각 합니다.

신교수님의 말씀 데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위대한 업적은 영원 불멸의
업적이라고 칭찬 하시지만 영원불멸의 업적은 범재 김규흥 선생에게 돌아가야
그것이 진실된 우리의 독립운동사 입니다.

그러나 몽양 선생 역시 위대한 독립운동가 입니다.
범재선생의 태산 보다 더 큰 업적을 수 십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나누어 가져도
전부 위대한 업적이며 중국인들까지도 나누어 가저서 대한민국
건국 훈장 1~2 등급을 무더기로 가졌습니다.현명하신 판단은 여러분이 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신교수님의 글 한 대목만 기재 합니다.


몽양의 활동은 시베리아 주둔 연합군과의 외교활동에 성공하여 연합군사령관 체코인 카이더 장군 등의 적극적 지원을 획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몽양이 카이더를 방문해서 원조를 요청했고, 약소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상호연락을 토의하며 몽양의 은사의 소개와 몇차례의 토론 끝에 의기투합하게 된 사령관 카이더 장군은 직접 자기의 부관 조세프 헌치를 보내서 대동케 하고 군용열차를 태워주어서 무사히 상해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3.1운동 후 즉, 1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체코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 할 때 막대한 최신 무기들을 모두 한민족의 독립군에 헐값으로 넘겨주어서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서 많은 독립군 전투의 승리를 결과적으로 도와주게 된 일이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이미 오양 선생이 이전에 닦아놓은 연대 외교활동 기초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카이더 장군이 귀국 도중에 상해에 들렀을 때 몽양 선생이 앞장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건국 축하의 기념패를 만들어 주고, 연희를 열어 그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 것은 모두 몽양의 사전활동과 관련선상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몽양은 이와같이 눈부신 활동을 하고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해서 1919년 3월 6일 경에 하얼빈 여관에 도착했다가 그곳에서 국내에서 3.1 운동이 전국적 봉기로서 계속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급히 상해로 돌아왔습니다.



 
출처 : 블로그 > 위대한 한국인 범재 김규흥 | 글쓴이 : 푸른 하늘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