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범재선생 마지막 불꽃 1편
기약 없는 망명길이 범재 선생 부부의 마지막 이승의 인연 일줄 이야 두 분은 상상도
못하였을 것 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여인들의 숙명으로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 안타깝고 화가 납니다.
겨례 의 불행과 민족의 고통만 눈 한번 감고 모른 척 하였다면?
본명도 떳떳이 밝히고 조선인으로 최초의 중국군 장군이며
중국의 고관 대작으로 임명된 범재 선생은 조선인의 자랑이며 영웅입니다.
일제로부터 많은 유혹과 작위수여 등 엄청난 땅을 주겠다고 제안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요즈음 반역자와 매국노의 후손들이 땅 찾으려는 눈물 나는 노력을 보며
반역자의 후손들이 모르는 사항이 있습니다.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거나 사기를 친 것은 장물이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매국과 반역으로 얻은 상금과 땅은 당연히 회수 하여야 우리 후세에
정의가 무엇인가 교육 시키는 것 이라고 생각 합니다.
절대비밀 알려지지 않은 영웅 범재 선생!!
손문 특사의 자격으로 잠시 조선을 방문 하였다고 하나 부부의 해후(邂逅)는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어느 출판물에 동양론 을 기고 하신 인연으로 일본정부의 초청을 받아
회담을 하였는데 범재 선생의 말은
”일본이 힘으로 팽창하여 동양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지배하려는
야심을 버려야 한다. 지배보다는 상호 협력으로 서양세력이 동점(東漸) 하는 것을
막으므로 동서양 힘이 균등 하여질 때 차별 없는 평화가 유지 될 것이다.
일본측에서는 이미 대세는 일본에 기울러저 있으니 팽창주의를
중단 할 수가 없다. 우리측에 협조한다면 최상의 대우를 하겠다고
유혹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답하기를 그러면 결국 일본은 패망 할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의 패망을 예언하고 당당하게 말 할수 있었던 범재선생
회담은 결렬 되었으나 일본당국은 선생을 계시던 곳까지 정중히
모셔드렸다고 합니다.(정확한 장소는 모르지만 추측하자면 중국군 장군을 혹은 장군 이었던분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물론 이름은 가명입니다)
범재 선생은 3박자의 중요성을 정확히 알고 있는 선각자 였습니다.
1.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인식하고 충북 옥천에 창명학원 (지금은 죽향 초등학교의 전신)을 사재로 설립하였으며 망명지 중국에서도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차려 젊은 청년에게 민족관 을 심어주고 독립군을 양성 하는 위대한 일을 하였습니다.
2. 언론의 중요성을 일찍 인식한 선생은 중국에 최초의 한국계 언론사를 경영하며
펜으로 전쟁을 시작 하였습니다.
3. 마지막 군자금의 필요성을 인식한 선생은 대외적으로 은행창립이지만
군자금모금과 군사통일회촉진 과 결사항전을 위한 둔전제로 만몽 국경지대에
대본공사를 설치하여 토지도 매입하고 동북삼성에 조선 독립군을 편성하려 실천에 옮기려 노력합니다.
선각자 이며 위대한 영웅의 피눈물 나는 노력에 찬물을 던지는 사람은
바로 우리의 동족이며 땅과 작위를 일제로부터 하사(?) 받은 매국노와 반역자 입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기약 없는 망명길이 범재 선생 부부의 마지막 이승의 인연 일줄 이야 두 분은 상상도
못하였을 것 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여인들의 숙명으로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 안타깝고 화가 납니다.
겨례 의 불행과 민족의 고통만 눈 한번 감고 모른 척 하였다면?
본명도 떳떳이 밝히고 조선인으로 최초의 중국군 장군이며
중국의 고관 대작으로 임명된 범재 선생은 조선인의 자랑이며 영웅입니다.
일제로부터 많은 유혹과 작위수여 등 엄청난 땅을 주겠다고 제안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요즈음 반역자와 매국노의 후손들이 땅 찾으려는 눈물 나는 노력을 보며
반역자의 후손들이 모르는 사항이 있습니다.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거나 사기를 친 것은 장물이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매국과 반역으로 얻은 상금과 땅은 당연히 회수 하여야 우리 후세에
정의가 무엇인가 교육 시키는 것 이라고 생각 합니다.
절대비밀 알려지지 않은 영웅 범재 선생!!
손문 특사의 자격으로 잠시 조선을 방문 하였다고 하나 부부의 해후(邂逅)는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어느 출판물에 동양론 을 기고 하신 인연으로 일본정부의 초청을 받아
회담을 하였는데 범재 선생의 말은
”일본이 힘으로 팽창하여 동양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지배하려는
야심을 버려야 한다. 지배보다는 상호 협력으로 서양세력이 동점(東漸) 하는 것을
막으므로 동서양 힘이 균등 하여질 때 차별 없는 평화가 유지 될 것이다.
일본측에서는 이미 대세는 일본에 기울러저 있으니 팽창주의를
중단 할 수가 없다. 우리측에 협조한다면 최상의 대우를 하겠다고
유혹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답하기를 그러면 결국 일본은 패망 할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의 패망을 예언하고 당당하게 말 할수 있었던 범재선생
회담은 결렬 되었으나 일본당국은 선생을 계시던 곳까지 정중히
모셔드렸다고 합니다.(정확한 장소는 모르지만 추측하자면 중국군 장군을 혹은 장군 이었던분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물론 이름은 가명입니다)
범재 선생은 3박자의 중요성을 정확히 알고 있는 선각자 였습니다.
1.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인식하고 충북 옥천에 창명학원 (지금은 죽향 초등학교의 전신)을 사재로 설립하였으며 망명지 중국에서도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차려 젊은 청년에게 민족관 을 심어주고 독립군을 양성 하는 위대한 일을 하였습니다.
2. 언론의 중요성을 일찍 인식한 선생은 중국에 최초의 한국계 언론사를 경영하며
펜으로 전쟁을 시작 하였습니다.
3. 마지막 군자금의 필요성을 인식한 선생은 대외적으로 은행창립이지만
군자금모금과 군사통일회촉진 과 결사항전을 위한 둔전제로 만몽 국경지대에
대본공사를 설치하여 토지도 매입하고 동북삼성에 조선 독립군을 편성하려 실천에 옮기려 노력합니다.
선각자 이며 위대한 영웅의 피눈물 나는 노력에 찬물을 던지는 사람은
바로 우리의 동족이며 땅과 작위를 일제로부터 하사(?) 받은 매국노와 반역자 입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출처 : 블로그 > 위대한 한국인 범재 김규흥 | 글쓴이 : 푸른 하늘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