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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동성 엽기 인육 식습관

낙엽군자 2006. 1. 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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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해보면

 

신선한 태반이 있으면 얼리지 않는게 좋다.

리 박사가 우리에게 말하길 외지에서 직장을 구하러 온 두부부가 있는데

그들은 임신8개월된 여아가 있는데 그 태반을 먹고 싶으면

빨리 낳게 해서 먹을수도 있다.

기자는 그말에 반신반의해서 그 말를 믿지 않았는데

몇 일이 지나서 왕가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받았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몇 사람이 먹으려 한다는 소리를...

그들은 기자를 데리고 타이산에 있는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더니

그 곳 주방장이 희귀한 것들를 구경 시켜 주었다.

 

도마 위에 있는고양이보다 작은 5개월된 아이가 있었는데

주방장이 말하길 너무 작아서 미안 하다고 말했다.

주방장의 말에 의하면 시골에서 친구가 구해 왔는데

가격은 태반의 크기 개월수에 따라 틀린데 가격은 아직 말 하지 않았다고 했다.

왕가가 말하길 한 그릇에 3500원(인민폐)라고 하면서 기타에 대해서는

상관 안한다고 했다.

 

기자가 그들이 말하는 중에서 유산 됐거나 죽은 태아를 가져 올 때는

산파에게 몇 백 원 씩 주고 가져 오는데 막 출산한 아이를 가져 올 때는

양육 한다고 2500 원 주고 가져 온다고 했다

.그런데 가져오는 도중에 생사의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 중국의 식인풍습(퍼온글)

식인풍습

영화 <신장개업>을 보면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아방궁이라는 ‘중국집’은 자장면 맛이 일품이다. 그 원인은? 경쟁업체에서 추적하여 알아보니 인육, 즉 사람고기를 썼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중국집’으로 불리는 중화요리 식당은 음식 맛이 좋을 때 흔히 ‘인육을 쓴다’는 루머가 흘러나오기 일쑤였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인들은 청조 말까지 인육을 시장에서 거래했고, 중화민국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직후까지도 일부 지방에서는 인육을 먹었다!

 

 

 

공자도 인육을 즐겨 먹었다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다.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있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 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다.

 

복수할 때는 한 칼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 군중들(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먹었다고 한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 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 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 )’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

 

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다.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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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풍습은 5천여년간 합법적으로 존재했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졌습니다. 불과 얼마전 홍위병이 날뛰던 시기에도 중국전역에 광범위하게 식인풍습이 실존했으며 신용문객잔으로 대표되는 흑점이 존재했던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나이 30-40대에 속하는 층 일부는 그당시에 태어났을테고 그런 사회분위기 및 오랜전통이 그들 사고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판단하고 나름대로 분석한 것인데요.

 

광인일기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과대망상증은 노신이 정신병자를 묘사한것이 아니라 중국에서의 실제상황을 그대로 전하려했다는 점을 상기하시면 이해가 쉬우시리라 생각되어 집니다.(주인공은 주변 이웃이 자신을 살해하여 잡아먹으려한다는 피해망상증환자로 나옵니다.) 노신이 아큐근성과 식인풍습이 중국을 망치는 2대악으로 보고 이것을 근절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가를 짐작할수 있겠습니다.

 

중국인의 왜 남을 믿지 못하는가? 왜 돈을 중시하는가? 왜 먹는것에 집착하는가 왜 돈앞에선 적전분열하는가? 왜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져 죽어가도 여러사람이 주변에 삥둘러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기만 할뿐 조치를 취하지 않는 그 특유의 무관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왜 중국의 대가족제도는 3대뿐아니라 주변 친인척이 한집에서 모여사는가? 왜 부모자식간에도 못믿는가? 그 엄청난 인내심의 근거는 무엇인가? 중국계 기업의 조직문화는 왜 친인척위주인가(그래서 중국계기업의 수명은 다른나라 기업에 비해 짧습니다.) 등등의 문제 저변엔 식인풍습으로 인한 중국인이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이 큰 작용을 했다라고 봅니다. (노신은 중국인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부연설명이 없어서 이해가 잘되실지 모르지만 짧게 짧게 몇가지만 대충 추려말씀드리자면 오랜기간의 식인풍습은 노신의 말대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만들고 신의라는것 자체를 없에 버렷습니다. 중국인들이 신의를 말할때면 그들이 가장 위기에 몰렸을때입니다. 그때만 예나 도덕 신의등이 나옵니다. 식인풍습 즉 약육강식의 단순한 논리는 그들의 특징적인 속성..즉 강자앞에선 토끼가 되고 약자 앞에선 무서운 맹수가 되어버리는..을 잘 설명해주는 근거가 아닐까요? 일단 전쟁, 기근으로 식인풍습이 대대적으로 시작되면 잡아먹히는 인간의 종류와 순서에 일정한 법칙이 있었습니다. 일단 유괴하기 쉬운 어린이를 시작으로 여행자, 독신자 및 독거노인등으로 순서가 옮겨갑니다.

 

나중엔 비교적 소규모의 가족단위를 이루는..즉 처치하기 쉬운 가정을 다음차례가 되고 비슷한 규모의 가족단위간에는 관에 줄이있어 파벌에 속한자가 속한 가정이 그렇지 못한 가정을 잡아먹고.. 맨 마지막 단계에 가면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형이 동생을 잡아먹었습니다. 중국 특유의 대가족제도는 제가 보기엔 결국 식인풍습으로 부터 자기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제도이며 여러 명이 뭉쳐서 숫적우위를 바탕으로 잡아먹힐 확률을 낮추고 생존확률을 높이려는데 주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잡아먹히는 순서상 쪽수가 많은 가정이 맨 나중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인내력에 대해 살펴보면..그들의 인내력을 임어당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임어당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제도.. 삼대 뿐 아니라 외삼촌 가족 숙부 가족 고모 가족 등 등 그 많은 수의 가족이 한 가옥 내에 살면서 여러사람과 부딛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참아내면서 그들의 인내력이 성장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즉 식인풍습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제도를 만들어내고 대가족제도는 구성원에게 매우 큰 인내를 강요했습니다. 식인풍습이 발생하게 된 명분은 제가 말하는대로 고대중국부터 형벌의 하나로 성문법화 된 것 이외에 중국 특유의 황제제도, 식인의 미화, 등이 있었겠지만 가장 큰 직접 원인은 식량부족이었습니다. 그당시 식량이란 것은 지금의 식량이란 가치나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즉..식량=목숨이란 공식이 성립하였을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현대에 들어서 농업기술이 발달하고난 이후에 그 당시의 식량과 현재의 식량과는 다른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당시의 식량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것을 현대에서 찾자면 그건 바로 "돈"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중국인은 날때부터 장사꾼이라 돈을 밝힌다라고 합니다만 저는 그들이 "돈 때문에 장사꾼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오랜 전통의 식인풍습은 그들로 하여금 절박한 생존본능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그 본능은 대대로 유전되었으며 세대가 지날수록 더욱 더 강력해졌을 것입니다.

 

불과 30-40여년 전까지 홍위병이 날뛰던 문화혁명기에 농촌이 붕괴되자 여기저기서 서로 잡아먹는 식인풍습이 존재했던 중국이라면 그 본성과 본능은 지금 세대의 주축을 이루는 30-40대의 핏속에 생생히 살아있을 것이고 세상이 바뀌어 식량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과거 그들이 서로 잡아먹게 만들었던 그 "식량"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 "돈"에 그토록 무섭게 집착하는 이유를 식인풍습과 연계시킨다면 너무 무리한 확대해석일까요?

식인순서의 맨 마지막은 부모자식간, 형제간, 부부간에 서로 잡아먹는 순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과거 식인풍습이 난무하던 시대의 식량과 같은 의미를 갖는 "돈"앞에서 부모자식간, 형제간, 부부간에 서로 믿지 않는 그들의 사고가 전 이해가 아주 잘되는데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중국인은 일제침략과 내전 그리고 문화혁명등의 혼란기를 겪어서 그렇게 서로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가지 묻죠.. 우리나라는 일제침략이 없었나요? 중국은 절반만 먹혔지만 우리는 아예 35년동안 수탈을 당했습니다. 바로 이어 동족상잔의 비극 6.25사변이 터졌고 또 그 이후 4.19... 5.16...장기간의 군사파쇼 독재 등등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민족은 그들과 다른가요? 제가 생각하기엔 그들이 그 지경까지 된 것은 우리가 겪은 것과는 분명히 강도나 내용이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제가 생각한 바가 유치할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가지 중국인의 속성을 식인문화와 관련지어 나름대로 분석해낸바를 간단히 정리하여 짧게 올렸습니다. 일단 그다지 학문적이지못하고 자의적인 해석일수 있으며 식인풍습 한가지로 모든것을 설명하려는데 무리가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식인풍습 한가지로 모든것을 해석하려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어령님이 쓴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 계실겁니다.

 

과거 일본이 잘나가던 시절에 많은 서구인들은 일본인들을 매우 궁금해했고 나름대로 연구하여 국화와 칼등의 저서를 통해 접근하려 했지만 모두다 그들의 속성을 설명하는데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어령씨는 일본인의 사고, 문화, 언어습관, 조직의 특징등 모든것을 "무엇이든 축소하여 간단 명료화"시키는 단 한가지 명제를 가지고 그것들을 설명했습니다. 그 책을 읽은 서구인들은 경탄을 마지 않았고 일본 지식인들도 경탄을 금치 못했던걸로 기억합니다. 한 민족의 문화와 사고를 그토록 예리하게 판단한 것이 단 한가지 명제였다는데 무척 놀랐고 그 당사자가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였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고 일부 일본 지식인은 "무섭다"라는 표현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책을 중학교 2학년때 읽었으며 강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인을 이해할수 없다고 합니다. 과거 서구인, 우리 한국인들이 일본인들 보고 했던 말과 같죠? 도저히 이해할수 없다..제가 식인문화를 중국인을 파악하는데 사용한 "단일명제"로 이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식인풍습은 중국에서 5천년간 합법적으로 존재했고 그 대상은 황제부터 일반 민초 백성까지 였으며 노신이 그토록 박멸하고 싶어 혼신의 힘을 다해 책을 썼을정도로 중국인들 사이에 아무런 저항감없이 널리 퍼져 사람을 "즐겨"먹는 것이 중국인들에겐 아무런 흥미거리 조차 되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 하면 이는 분명코 간단히 보아 넘길 수 없는 범상치 않는 중국 만이 갖는 독특한 문화이며 이는 이어령씨가 일본인들을 분석할때 사용한 일본인 만이 갖는 독특한 축소지향의 풍습과 같은 정도의 중요성과 가치를 갖는 중국민족 특유의 풍속이라 생각되어지고 따라서 축소지향의 풍습과 식인풍습은 같은 용도로 사용되어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 책을 읽으며 노신과 오유 그리고 황문웅 등이 말한 바 "식인풍습은 중국 5천년사를 관통하며 이를 모르고 중국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중국역사는 식인의 역사다" 라는 말은 저로 하여금 더 큰 확신을 갖게 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의 사고를 이해하는데는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간단명료한 방법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 지식이 짧고 경험이 없어 더욱 더 학술적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던 점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중국을 나름대로 분석하기 시작한 지 몇 년 안되는 기간에 나름대로 이정도로 판단할수 있는 사고를 갖었다는데는 나름대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식인문화와 관련해 보신탕에 대한 기사를 보면 참고로 다음과 같다.


한국사람 개고기 먹는 것은 문명의 자랑(시평)
 
 
한국사람들이 개고기 먹는 것은 인류 문명사를 살펴보면 당연하며 자랑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기사는 동아일보 2002.12.4일자 기사이다. 개의 원산지는 바로 우리 동이 민족이 살던 동아시아이며 15000년 전 부터 가축화되기 시작했다는 기사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고대로 부터 개를 애완용으로 보질 않고 야생 동물로 보고 식육용 가운데 가장 단백질이 많은 동물로 보았기 때문에 다른 야생동물들과 같이 잡아 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문명의 역사가 길지 않은 서양사람들은 개가 애완용일 된 이후부터 즉 가축에서 애완용이 된 이후부터 알고 있기 때문에 개고기 먹는 것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식용 개를 狗(구)라 하고 인격화 된 고귀한 개를 犬(견)이라 하여 엄연히 구별하고 있으며 단군신화에서도 환웅과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벼슬 자리 5개 가운데 개가 포함돼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중국인들 마저 개고기를 안 먹는 것을 보면 우리 문명보다 훨씬 뒤진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 서양인들이 개고기 먹는 것 운운하는 것은 이 번 연구 결과로 증명되었다. 미트라콘드리아는 유전인자 속에서 생명의 기원을 밝히는 데 있어서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최근 '아프리카 이브' 즉 세계 최초 여성은 아프리칸이란 사실도 이를 통해 증명되었다. 서양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물론 한국인들의 개고기 먹는 것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연구 결과를 우리 문명 이해 수단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개고기를 함부로 먹자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서양이 문화 편견을 가지고 자기들 잣대로 다른 문화를 잴려고 하는 제국주의적 망상은 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기사) 2002.12.4
“개의 원산지는 동아시아, 1만5000년전부터 가축화”

지구의 모든 개는 동아시아가 원산지이며, 1만5000년 전부터 인간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스웨덴 왕립기술연구소 피터 사볼라이넨 박사와 중국과학원 징 류 박사는 “654종의 개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 개의 조상은 1만5000년 전 동아시아에서 살았다”고 미국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 11월 22일자에 발표했다.

 

연구팀이 개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 동아시아의 개들이 유전적으로 가장 다양했으며 이곳의 개에서만 발견되는 DNA 조각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동아시아에 개의 조상이 살았고, 이후 유럽, 아메리카로 이동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또 미국과 스웨덴 연구팀의 유전자 조사 결과 약 1만2000∼1만4000년 전 인류가 러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베링 해협을 건너면서 개를 함께 데려간 것으로 나타났다.

 

개는 처음에 인간에게서 먹이를 얻어먹으며 친해지다가 동물 중 처음으로 인간과 함께 살게 됐다. 이후 집 지키기, 양 몰기, 사냥, 운반 등에 사용되면서 인간과 가장 친한 동물이 된 것으로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이번 연구가 확실하지 않다고 보는 과학자들도 있어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한편 미국 하버드대 브라이언 헤어 박사는 개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진 이유는 사람의 신호를 잘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사이언스’지에 함께 발표했다. 연구팀은 개, 강아지, 늑대, 침팬지를 대상으로 먹이가 든 상자와 빈 상자를 놓고 사람이 눈짓이나 손짓 등 갖가지 신호를 보낸 결과 개와 강아지가 먹이가 든 상자를 더 잘 구별했다고 밝혔다.


김상연 동아사이언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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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밀매, 10만원에 사서 400만원에 팔아… ‘충격’
[고뉴스] 2005-11-24 19:23 
 
(고뉴스=황문성 기자) 중국에서 아기 매매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아기 매매를 주도한 사람들이 사회복지시설 책임자와 직원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하고 있다.24일 중국 상해청년보에 따르면 최근 후난성 치둥현 공안국이 27명의 밀매자를 검거했으며, 검거된 이들은 헝양현 복리원 소속 7명 등 대다수가 사회복지시설 책임자와 직원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전했다.

 

이들은 22일 밤 한 직원의 고발로 꼬리를 잡혔는데, 제보자는 19일 헝양현 복리원이 5명의 아이를 장샤모 복리원이란 곳에 6만위안(약 800만원)에 팔았으며, 이미 수년 전부터 이런 일을 저지러왔다고 폭로했다. 공안의 조사 결과 이들은 대략 아기 1명당 800위안(약 10만원)에서 1200위안(약 15만원)을 주고 산 뒤 8000위안(약 100만원)에서 3만위안(약 400만원)을 받고 팔아 넘긴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들 시설은 나라에서 양국보조금을 타내기까지 했으면서 이 같은 일을 저질러 온 것으로 드러났다.  공안당국은 사회복지시설의 원장과 간부 직원 등 여러 시설에서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영아 매매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후난성 내 전체 복지시설을 상대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http://news.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2746116&year=2005&rtlog=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