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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진년 구월도 자던개(문왕사명자) 깨어나는 서산 각시바위 사진 최초공개! 문왕사명자 '무진년 구월도 공사'

낙엽군자 2025. 5. 2. 09:56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

 

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
초중말복 5진주 세명(5진주를 율곡은 <참 5>인 <달고나 참외>로 표현 ). 5+5+5(6)=15(16).마지막 5진주는 판모리 6서시. 따라서 15진주 수는 참5 달고나 참외 5진주 3명이 합해 이루어지며(1,3,5,7,9 양수의 황극수5를 취한 것) 마지막 5진주는 음수 2,4,6,8,10의 후천 황극수 6도 가능하므로 한 끗수가 튄 16수도 된다. 말하자면 마지막 말복 5황극수 진주는 11귀체에 의해 11성도에 대한 5의 보수 6도 되므로 15진주, 16진주수도 되는 것이다.

 

<통합경전>다음 밴드에 들어가면 전체 파일 다운됩니다. 비회원 입장 가능.엄밀히 말하면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밝혀지는 '천지공사 진법을 설명해주는 안내서'로 <통합경전 서문>입니다.<통합경전> 전체는 본문 포함 기독교 신구약 두배가 넘는 분량입니다.
http://band.us/#!/band/61758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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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한식백오제 천지공사 105년간의 종통인사 비밀을 모두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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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중복도정에서는 천지일월사체론으로 진辰유酉용봉을 성도사님과 종정 2인으로 각각 쪼개어 교리화했다. 그러나 바로 그 용봉 두 사람론에서 천하사가 마무리되지 못했다. 박금곡에게 전한 용봉서체는 진辰유酉겸비의 마지막 사마소 진인 한 사람을 상징하며 추수사명이 초중말복  도안 세살림으로 되어있음을 깨닫지 못한 동지한식백오제' 과도기 암흑천지근백년' 기간이었기때문이다. 심지어 봉황을 자처한 갑오종정은 봉황 유酉도 없이 갑오午 군화  청마를 봉황이라 견강부회했다. 경진 백룡 '시주'이므로 용은 될지 몰라도 유(酉)없이 청마가 봉황은 결코 될 수 없다.  '도안'은 모두all 도都 에 안安이다. 초중말복 도안 세살림 모두 삼련불성 安씨 3부자라는 것이다.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의 초,중,말복 세살림 도수에 의해 추수사명자인 안운산 문왕사명자의 3부자(현무경 서두 午,申,戌 符 인사문제인 甲午,丙申 壬戌) 삼련불성三聯佛成에 의해 천지공사종필 1909년 기유년 이후 동지한식백오제 105년간 숨겨져있던 진법이 마지막 수지지어사마소 진인에 의해 명백히 밝혀지게 되어 있었다. 중복 도정시절 문왕사명자에 대한 1928년 무진년 九月度공사 영적기두 수행의 각시바위가 드러나지 않았다. 말복도정에서 처음으로 그 실체를 밝힌다!

 

 

🌺🌺🌺 무진년 구월도 자던개(문왕사명자) 깨어나는 서산 각시바위 사진 최초공개! 문왕사명자  '무진년 구월도 공사'

 

각시바위-1922년 6월 16일생 임술생 운산 안세찬 7세 時, 1928년 무진년 九月度공사 영적기두 수행
나의 덕을 펴는 자는 무진년에 기두하노라.


손 의암 先眞主 이후 태모님의 잠자는 개를 깨우는 무진년(1928) 구월도 宿狗地공사에 의해 안운산 성도사님이 운암강수 만경래 경만장 세 살림의 초복도수를 일으키기 위해 後眞主로 일어나 해방이후 보천교 2변 교운(初伏도정)을 재건하게 된다. 성도사님은 다시 文王의 유리羑里 유폐도수인 말점도 20년 도수로 隱伏해 계시다가 74년 起頭하여 10년간의 과도기를 거치며 道局을 키워 84년 단체이름을 '증산도'로 대내외에 선포하고 본격적인 둘째살림 中伏도수를 개시한다. 그러나 이 중복도수를 해방직후 개척해 청음과 손잡은 초복도정을 보천교에 이은 '2변 도정'으로, 84년 대내외에 선포한 중복도정 '증산도'를 마지막으로 매듭짓는 '3변도정'으로 오인하고 만다. 물론 이러한 오인 마저도 대국적인 상제님 천지공사의 일부였음은 물론이다!

문왕사명자는 삼초끝에 대인출세의 기본 관문을 통과한 전제하에 무진년 9월도(戌月) 공사에 의거 영적으로 기두하여 쥐띠 청음 이상호와 무진년을 매개로 한 '무진년 동지,기사3월 기망' 공사를 중심으로 특히 무진년 공사로 병렬 매개되어 1945년 해방이후 문왕 사명자가 개창한 '숙구지 문왕 초복살림'에서 조우되게 해 놓으셨으니(문왕사명자의 숙구지 9월도 공사를 청음 이상호의 무진년 동지 대각다리 박공우 조우 사건으로, 대각다리 의통해인 전수를 추수사명자 해도진인으로 각각 착각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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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 집은 하루저녁 잘 수도 없어. 집 구조가 안방, 건너방, 뒷마루. 정읍에 명주베라는 것이 왜 거기서 발전이 됐냐면, 보천교 때 보천교 신도들이 거기 들어와서 다 떨어먹고 굶어죽게 생겼단 말여, 농사터전이 있나. 저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전국적으로 수많은 신도들이 들어와서 가지고 온 재산 다 떨어먹고 굶어죽게 생겼거든. 그래서 강화의 한 인희 아버지 한 호석 씨가 강화에 직조하는 것을 모방해서 명주베라도 짜서 밥 먹구 살아야겠다구 구황방을 내 놓았어. 구황방을 해서 생식을 하고 사니 그게 살 수가 있어? 생식도 한 달에 쌀 한 되는 있어야 할 거 아녀. 그래서 직조를 하게 된 거여, 보천교 신도들이 다 망하면서 베 짜서 먹고 살았어. 이 상호씨도 직조기를 한 대 갖다 놨는디 아마 서너 필이 감겼는지 다 헝클어져서 말여. 내 던진 베틀 하나 있어(폐기물로 던져두고 이사 간 빈 집.장님이라 직조불가). 그러고 가만히 보니께 쌀도 없어. 그래서 쌀 한 가마 값이나 주고, 그런 인간적인 정으로...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리고 박 모 모씨 집에서 며칠 묵다 올라왔는데, 구황방 얘기를 보충하면 내가 11살 땐가 생식을 8개월을 해 봤어. 각시바위 구멍에서 며칠 있은 후로 생식을 시작했는디, 한 8개월 나중에는 전혀 화식이란 걸 먹지 않고 쌀가루, 콩가루 먹었어. 한 8개월하고 났는디, 내 어머니께서 따라서 굶으시더란 말여, 어머니 때문에 할 수 없이 밥을 먹었어. 생식을 하면 한 9일, 10일 만에 똥을 요거만한 새까만 똥을 싸고 말어. 세상에 안 먹고는 살 수 있나... 그래서 어려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어. 구황방도 쌀이 있어야 되는 건데, 보천교 신도들이 구황방 갖고 생활을 한다 해도 돈은 벌어야 될거 아녀. 그래서 대흥리에 직조가 유명해졌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리고서 내가 정읍서 그 얘기를 하고 떠나 집으로 와서 한 바퀴 돌고 다시 정읍을 갔어. 가서 이 한우 씨한테 가서 의통제작을 하는데 쓰라고 돈을 주고 왔어. 뒤에 가서 보니께 6임조에 근거해서 내 도장을 하나 마련해 놨더라고. 책임감도 있고 그래서 집으로 와서 보천교 신도들한테 이제 너희들도 의통준비를 하고 다시 그때는 내가 교주할 욕심도 없고, 다 같은 신도들이고 하니께 누가 뭐가 되고 그러는 걸 따지기 전에 동지적인 입장에서 뭉쳐서 단체도 구성하고, 상제님 사업을 하고 그러는 거지. 보천교 신도들은 차 경석씨도 꼭 신앙하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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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도수 세 살림의 서막을 알리는 안 운산 숙구지 문왕 도수 )-4 어린시절 몰래 가출해 서산 대산면 운산리 각시바위 9일간 수도 공부! 이후 13세때 2주수행 끝에 광명도통!

아래 사진은 각시바위 전경. 바위 아래 검푸른 페인트로 희미하게나마 각시바위라 씌어져 있으나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막상 촬영하니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보인다. (2024. 10.20. 중흥 장엄장 용화도장 일요치성 후, 안원전 촬영. 장락, 현광 추적탐사 동참) 인근에 중복도정 증산도 서산도장도 있으나 이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것으로 보아 아직 위치는 모르고 있는듯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접근하는 길이 무인지경으로 전혀 산길이 없이 자취가 끊긴 채 온갖 덤불로 가득차 이를 헤쳐 길을 만들며 겨우 나아가야 할 정도였다. 마치 누구도 접근하지 않은 듯 보였다.
이번 각시바위 현장탐사 추적 발굴 사진은 안원전, 장락 김동희, 현광 윤도진 탐사팀 3인이 처음 찿아 도사에 처음 공개하는 것으로 실로 의미가 아주 크다! 안원전이 맨발 벗고 직접 위에 올라가 보니 아이 한둘 겨우앉을 만 하고 강론에서 말씀하신대로 위가 뻥 뚫려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위에서 아래로 찍었다.

"우리 동네 각시바위, 신랑바위라는 큰 바위가 서북으로 조그만 온 판때기 같은 바위가 서 있었는데 서쪽은 각시바위 거기서 보면은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어서 사람 두어 명 가서 앉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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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찍으니 '판때기' 같은 절편 바위가 맞다!



아래 장락 대선사 촬영추가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과연 내가 자진해서 걷어 치워 버리구 집에서 앉아서 보니 머리고 도로 길어. 그래서 머리를 또 길렀어.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만날 보천교 신도들 와서 널려서 하는 이야기, 무슨 안동은 어떻고 영동은 어떻고 부산은 어떻고 전라도는 어떻고 함경도는 어떻고 전국 신도가 다 몰려 드니께. 그런디 그런 이야기 들을 때에 그것만큼 폐부가 열리는 것은 틀림없이. 이 세상은 얼마만큼 사람이 고통스러운가 궁금해서 우리 동네 각시바위 신랑바위라는 큰 바위가 서북으로 조그만 온 판때기 같은 바위가 서 있었는데 서쪽은 각시바위 거기서 보면은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어서 사람 두어 명 가서 앉을 수 있게 되었다. 거기서 닷새를 있으니깐 목이 말라서 못 있겠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밤에 마을에 내려와서 물을 실컷 먹구서. 물을 실컷 먹구서 그 옆에 호박을 심어서 매달려 있는데 그 놈을 들구서 보니께 배가 고프니 비린 것도 모르고 먹고 또 산에 가서 각시바위에 숨어 있었어. 그렇게 9일인가 했어.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께서 아들 잃어 버렸으니께 다들 난리가 났지. 동네가 뒤집어지고. 어딜 갔다 왔냐! 어딜 갔다 왔는지 그냥 굶어봤다고. 그런 식의 생활을 했어. 13살 먹어가지고 쓰지 않는 방 하나가 있는데 거기다가 아마 동짓달쯤 지나서 거기 자리를 펴구서 거기서 수행을 했어. 태을주 수행을 했는데 2주를 수행을 했어. 태을주 수행 2주를 했는데 어떤 성과를 거뒀냐하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우리 어머니가 상 들려주고 다 먹으면 어머니가 상 들고 가고. 3일에 내가 아주 대 광명을 얻어가지고. 그때는 내가 하늘 끝까지를 환히 통했어. 이런 이야기는 비밀에 붙여두고 싶었는데. 그 때에 아마 내가 화권만 얻지 못했지 무불통지. 참 내가 그런 도통을 했어. 해서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어. 10리 밖의 것도 다 듣고, 그렇게 참 달통을 했었어. 이렇게 안 것은 신명이 뵈여준다고 하기 이전에 순간적으로. 예를 들어 생각을 하면은 그냥 환해져. 일순간에 신명의식이 들어와 버려. 그러니께 세상에 내가 모른 넋이 없다 말여.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거기서 14일 하고나니 더 할게 없어. 그래서 걷어치워 버리고 말았거든. 거기서 수승화강 돼 가지구서 지금도 몸에서 참 아주 시원한... 수승화강 되면 그래, 그러면 병도 없어. 그래서 내가 평생에 한 번도 앓아보지도 않았고. 간혹 나이가 드니 감기가 들려고 그려. 콧물이 혹 나올려 한다든지. 얼마 전에도 1달 전에는. 콧물 나올라 해서 콘택 600 한 알을 먹으니께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30분 후에 또 한 알 먹었어... 그런 정도. 내가 아프다면 그런 것 밖에 없어. 내가 본래 선천적으로 체질적으로 건강하게 태어나서 그런 건지, 그때 수련을 해서 그런 건 지 모르지만, 그 때 그러고 나서 내가 눈으로 한번 보고 귀로 슬쩍 스치듯 지나가면 생전 잃어버리지도 않고, 책도 그 전에 책 한번 쥐어보면 그 속에 뭐 있는지 다 알어. 그러니 공부한 새도 없이 다 알거든. 사람을 상대하면 그 사람이 하고 싶은 얘기를 그 사람보다 앞서 나가서 내가 알아버려~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래서 그렇게 14일 동안 수련을 하고 나서 우리 어머니 보구, 세상 사람구경 한번 가고 싶습니다. 돈 좀 타 주십시요 허니, 옛날 양반들은 남편 주머니 하나 안 뒤져보거든. 그 옛날 분이 남편 몰래 돈을 빼내려니 될 리가 없지. 하도 내가 졸르니께 나도 모른다, 모른다 나는, 니가 돈을 훔쳐 가든 말든 니 맘대로 하라 고 그런 묵계를 받았어! 내가 너덧 댓 달 살 수 있는 돈을 빼 가지구서. 아니, 아버지 돈 좀 가져가는 게 그건 도둑질하는 것 아니쟎어. 헌디 그때는 내가 세상만사가 환하고 해서 생각해보니, 내가 상제님 신앙하는 자로써 세상 실정을 좀 알어야겠다. 남남북녀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이야기 하나 알고 싶잖어. 그래서 내 머리 속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기위해서 한번 세상을 다녔다.





<도기 125년(1905) 을해 단기4328 기사모음집. 모 월간지 손 광주 기자 대담>*충남 서산군 대산면 운산리에 태어난 그는 유년시절부터 좀 ‘특별한 길’을 걷는다. 조부는 ‘논에서 놀고 있는 황새를 쫓아도 안 씨네 땅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대지주였는데, 그가 증산 신도였다. 아버지는 친구의 권유로 운산을 신식학교에 보냈지만 그는 자진해서 학교를 그만둬 버렸다고 한다. ‘별로 배울게 없었다’는 게 어린 운산이 내세운 이유였다. 어느 날 그는 색다른 체험을 시도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어느 정도 고통스러울까’ 생각한 그는 마을의 각시바위 옆 작은 동굴에 들어가 조부가 읽던 태을주(太乙呪:증산도 주문)를 읽으며 5일간 굶었다.


장락 대선사 촬영 첨가분

 

 

♤♤ 판밖성도의 천지도수.-金剛 大仙師
中 대장장이 딸 이야기


부안(扶安)은 지명의 의미 자체만으로 문왕의 도수를 돌리는 근원지임을 알 수 있다. 부안의 안(安)은 지명으로서의 의미로서만이 아닌 인사에서 천하사의 인물로서서의 의미도 있다. “편안할 안(安) 자(字), 안씨한테 내가 인신합덕을 해서 지상에 와서 일을 본다”는 김천수씨의 증언은 “가을용을 찾는다”는 천하사 추수를 맡은 가을용이 도안(都安)의 집으로 태전에서 나오게 됨을 “어떤 선생이 가을용인가, 태전을 어떻게(어째서) 찾는가? 구릿골서~신태인으로, 구태인으로 해 가지고서, 임피로 거기 가서 개 술자, 말하자면 개산(술산) 가서 망량신한테 대접을 하고, 태전을 오다가~”라고 밝히고 있다.


변산(邊山)이라는 궁벽한 변두리의 산이란 이름표를 찾아가는 길은, 우선 부안읍에서 내변산으로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 약 10km 정도를 가면 도화사거리가 나온다. 내변산에서 내려오는 주상천을 사이에 두고 거북등을 닮은 열세개의 고인돌 유적이 있는 하서면 석상리 구암(龜岩) 마을과 상서면 통정리 도화(桃花) 마을이 마주보고 있다. 사시사철 한결같이 맑은 시냇물이 흘러내려오는 주상천은 봄이면 벚꽃과 복숭아, 살구꽃이 만발하여 내변산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서해안의 별천지로 가는 관문의 정취를 듬뿍 안겨다 준다. 변산을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서 ‘예로부터 천부(天府)로 일컫는다’고 한 이유를 그 입구에서부터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주상천 서쪽의 석하삼거리 방향으로 가면 변산해수욕장으로 가는 해안도로로 연결되어 외변산으로 직행하게 되는데, 멀리 옥녀봉 아래의 석상리(石上里)와 석하리(石下里)라는 웃돌마리와 아랫돌마리라는 이곳의 아랫돌마리에 대략 높이 2m에 아래둘레 직경 4m 정도되는 바위가 땅 속에서 솟아난 것처럼 있다. 이 바위를 ‘풀무바위’라고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각씨바위’라고 부른다. 석하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더 가면 마전삼거리가 있다. 서울에 마포가 있는데 지명에서 마(麻)의 의미는 꼭 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마포(麻浦) 삼개나룻터를 마포(馬浦)라고 하니 마(麻)와 말(馬)은 음동으로 서로 통하는 의미로 쓰였으며 익산 삼기산 앞 들판이 또한 마전(麻田)이고 더 동쪽이 금마(金馬)인 것도 서로 접속되는 이치이다.

하서면 사무소 소재지의 섶못(新池, 쇠못)과 더불어 이 풀무바위에 얽힌 전설은 이곳이 쇠를 달구는 대장간 터였음을 알 수 있다. 풀무는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데 이용되는 기구로 풀무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풀무질'이라고 하는데, 지역마다 방언으로 풀무를 풍상(風箱) 풍로 풍구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풀무는 고어 불무에서 온 말로 불길을 강하게 당겨붙이는 도구의 원래 의미가 곡물에서 알곡을 선별하기 위하여 검불과 쭉정이를 날려보내는 도구로까지 의미가 확장되어 사용되었다.

이곳 '각씨바위'의 전설은 풀무쟁이와 효녀 딸에 얽힌 사연을 전한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하서면의 서해안 일대는 매우 번창하여 탐랑(貪狼)이라는 큰 저자거리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아래 돌마리 입구에 살던 대장장이 아버지가 추운 겨울에 늙어서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그의 딸이 대장간 일을 하면서 간호를 하다가 지쳐서 풀무 옆에 쓰러져 죽었다. 딸이 죽게 되자 대장장이도 간신히 기어 나와 풀무 옆에서 죽은 딸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 대장간 풀무 옆에서 큰 바위 하나가 풀무 모양으로 솟아났다.

弟子問曰, 俗에 有慶尙道大冶之歌하니 何以乎잇가. ​曰, 慶尙道에 醫世大冶가 出焉하나니라.

시속에 경상도에 대야의 노래가 무슨 뜻인지 여쭈니, 답하여 가라사대 경상도에 세상을 고칠 큰 그릇이 나오느니라 하시니라.(천지개벽경)

천지개벽경의 이 구절을 혹자는 경상도에 풀무가 있어서 경상도 사람이 대두목인 것처럼 끌어다 주장하기도 하는데, “풀풀 불어라 부어라 딱딱 풀미야 이 쇠가 어데 쇠냐 경상도 안동 땅에 제비원의 쇠로구나”라는 경상도 풀무가와 대전에서 어린 아이를 걸음마 시키면서 엄마가 어르는 소리로 ‘불무 불무’는 의미상으로 회통되면서도 각론에서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만수야 에라 대신이야 성주야 성주로구나 성주근본이 어디메뇨 경상도 안동 땅의 제비원의 솔씨 받아 봄 동산에 던졌더니만은 그 솔이 점점 자라나서 황장목이 되었구나”라는 성주풀이는 “성주 본향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러라”고 하여 천지공사에서는 판밖 남조선 뱃도수의 출발점인 원평에 솔씨를 뿌려서 청장목이 되고 황장목이 된다고 하였으며 성주풀이의 “에라 만수야 대활면에 내리소서”라고 하는 천하를 크게 구제하는 활방에서 나오는 인물이 성주임을 예고하는데, 금만경에 광활면이 있음은 풀무가와 어울려 그 의미를 되새겨 볼만하다. 또한 춘산채지가 달노래에서 “성주사 늙은 중이 문안차로 내려올제......”라고 하였는데 성주사는 생문방 충청도의 보령에 있음도 의미심장하다.

대야(大冶)는 합천에 있는 지명으로 합천(陜川)은 독음인 섭천이 셥->셔->시(xia)로 강과 산 사이의 좁은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한데 시내가 쇠내로 곧 쇠가 나는 마을이란 의미로 통한다. 경상도의 대불무와 전라도의 소불무라는 속설을 천지공사에서는 전북칠읍에 압축하면서 이 지명을 군산의 대야면으로 대응시켰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합천의 야로(冶爐)라는 지명이 곧 불무를 말하는데, 고지명으로는 적화(赤化)로도 표기되었다. 쇠를 녹이고 제련을 하는 의미로 불무라는 지명은 대장간이 있는 놋점(鹿), 쇠점(金, 新)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와 관련된 지명은 구릿소(가야면), 구릿골(가야면 대전)을 비롯하여 우거리(牛巨), 우실, 우두산(가야면) 등의 지명이 합천 일대에 산재하고 있는데, 가야(gayasirsa)는 범어로 소(牛)이다. 쇠를 소로 음차하여 표기한 사례이다. 또한 합천 가야의 매화리라는 마을은 불이 빈번하여 적화리(赤火里)라고 불렀는데, 마을 이름을 바꾸고 우물 세 개를 파면 화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하여 우물 세 개를 파고 마을 이름을 적화리에서 매화리(梅花里)로 바꾸었다고 한다.

“후천이 축판”이라는 것에서 소의 의미는 쇠를 나타내는 금(金)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소판은 불판인 불무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민간의 전승을 천지공사로 이화시켜서 불무를 불무(佛戊)로 불지형체의 황극 중궁의 실체로 등장시키는 공사인 것이다. 이는 태인 도창현 성황산 치마 바위에 올라서시어, 여러 가지 공사를 행하시고 김경학 성도에게 “처녀 치마 밑에서 대도통이 난다” 혹은 “처녀 뱃속에서 대도통이 나온다”는 공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불무와 관련하여 또 다른 공사가 있다.

하루는 글을 많이 써서 종도들에게 주사 태인 신방(神濠)죽 쇠부리깐에 가서 그 풀무불에 넣어 살르라...(대순전경)

하루는 공우를 데리고 용화동(龍簧)을 지나며 이르시기를 “이곳이 곧 용화도장이라. 이 뒤에 이곳에서 사람이 나서거든 부디 정분을 두고 지내라.” 하시니라. 하루는 용화동 뒤의 계룡봉(鷄龍峯)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이곳이 불무 발판이니 불무는 두 발판을 부지런히 밟아야 바람이 나는 것이라. 그러니 이곳을 자주 밟아야 바람이 나게 되리라.” 하시니라. 또 하루는 안필성(安弼成)을 데리고 계룡봉에 올라가시어 말씀하시기를 “앞을 보아라, 참 좋구나. 노승(老僧)이 팔대장삼을 입고 있는 형국이로구나. 또한 용이 누워 있는 형국이니 용은 뿔이 나야 되느니라.” 하시고 계룡봉을 내려오시다가 한 곳을 가리키시며 “필성아, 여기가 네가 들어갈 자리다.” 하시니라.(도전)

☆안필성 이름의 뜻.

필 자는 궁궁 두분(상제님 태모님)을 안씨가 보필ㆍ보좌하여 (온전할 백 일백 백) 완전히 이룬다는 뜻입니다.

弼도울 필
[부수] 弓 (활궁, 3획) [획수] 총12획 인명용
1. 돕다2. 보필하다(輔弼--)3. 바루다4. 바로잡다5. 도지개(트집난 활을 바로잡는 틀)6. 돕는 사람7. 보좌(補佐ㆍ輔佐)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