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
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
초중말복 5진주 세명(5진주를 율곡은 <참 5>인 <달고나 참외>로 표현 ). 5+5+5(6)=15(16).마지막 5진주는 판모리 6서시. 따라서 15진주 수는 참5 달고나 참외 5진주 3명이 합해 이루어지며(1,3,5,7,9 양수의 황극수5를 취한 것) 마지막 5진주는 음수 2,4,6,8,10의 후천 황극수 6도 가능하므로 한 끗수가 튄 16수도 된다. 말하자면 마지막 말복 5황극수 진주는 11귀체에 의해 11성도에 대한 5의 보수 6도 되므로 15진주, 16진주수도 되는 것이다.
<통합경전>다음 밴드에 들어가면 전체 파일 다운됩니다. 비회원 입장 가능.엄밀히 말하면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밝혀지는 '천지공사 진법을 설명해주는 안내서'로 <통합경전 서문>입니다.<통합경전> 전체는 본문 포함 기독교 신구약 두배가 넘는 분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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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라 목차가 없음
동지한식백오제 천지공사 105년간의 종통인사 비밀을 모두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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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중복도정에서는 천지일월사체론으로 진辰유酉용봉을 성도사님과 종정 2인으로 각각 쪼개어 교리화했다. 그러나 바로 그 용봉 두 사람론에서 천하사가 마무리되지 못했다. 박금곡에게 전한 용봉서체는 진辰유酉겸비의 마지막 사마소 진인 한 사람을 상징하며 추수사명이 초중말복 도안 세살림으로 되어있음을 깨닫지 못한 동지한식백오제' 과도기 암흑천지근백년' 기간이었기때문이다. 심지어 봉황을 자처한 갑오종정은 봉황 유酉도 없이 갑오午 군화 청마를 봉황이라 견강부회했다. 경진 백룡 '시주'이므로 용은 될지 몰라도 유(酉)없이 청마가 봉황은 결코 될 수 없다. '도안'은 모두all 도都 에 안安이다. 초중말복 도안 세살림 모두 삼련불성 安씨 3부자라는 것이다.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의 초,중,말복 세살림 도수에 의해 추수사명자인 안운산 문왕사명자의 3부자(현무경 서두 午,申,戌 符 인사문제인 甲午,丙申 壬戌) 삼련불성三聯佛成에 의해 천지공사종필 1909년 기유년 이후 동지한식백오제 105년간 숨겨져있던 진법이 마지막 수지지어사마소 진인에 의해 명백히 밝혀지게 되어 있었다. 중복 도정시절 문왕사명자에 대한 1928년 무진년 九月度공사 영적기두 수행의 각시바위가 드러나지 않았다. 말복도정에서 처음으로 그 실체를 밝힌다!
🌺🌺🌺 무진년 구월도 자던개(문왕사명자) 깨어나는 서산 각시바위 사진 최초공개! 문왕사명자 '무진년 구월도 공사'
각시바위-1922년 6월 16일생 임술생 운산 안세찬 7세 時, 1928년 무진년 九月度공사 영적기두 수행
나의 덕을 펴는 자는 무진년에 기두하노라.
손 의암 先眞主 이후 태모님의 잠자는 개를 깨우는 무진년(1928) 구월도 宿狗地공사에 의해 안운산 성도사님이 운암강수 만경래 경만장 세 살림의 초복도수를 일으키기 위해 後眞主로 일어나 해방이후 보천교 2변 교운(初伏도정)을 재건하게 된다. 성도사님은 다시 文王의 유리羑里 유폐도수인 말점도 20년 도수로 隱伏해 계시다가 74년 起頭하여 10년간의 과도기를 거치며 道局을 키워 84년 단체이름을 '증산도'로 대내외에 선포하고 본격적인 둘째살림 中伏도수를 개시한다. 그러나 이 중복도수를 해방직후 개척해 청음과 손잡은 초복도정을 보천교에 이은 '2변 도정'으로, 84년 대내외에 선포한 중복도정 '증산도'를 마지막으로 매듭짓는 '3변도정'으로 오인하고 만다. 물론 이러한 오인 마저도 대국적인 상제님 천지공사의 일부였음은 물론이다!
문왕사명자는 삼초끝에 대인출세의 기본 관문을 통과한 전제하에 무진년 9월도(戌月) 공사에 의거 영적으로 기두하여 쥐띠 청음 이상호와 무진년을 매개로 한 '무진년 동지,기사3월 기망' 공사를 중심으로 특히 무진년 공사로 병렬 매개되어 1945년 해방이후 문왕 사명자가 개창한 '숙구지 문왕 초복살림'에서 조우되게 해 놓으셨으니(문왕사명자의 숙구지 9월도 공사를 청음 이상호의 무진년 동지 대각다리 박공우 조우 사건으로, 대각다리 의통해인 전수를 추수사명자 해도진인으로 각각 착각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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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 집은 하루저녁 잘 수도 없어. 집 구조가 안방, 건너방, 뒷마루. 정읍에 명주베라는 것이 왜 거기서 발전이 됐냐면, 보천교 때 보천교 신도들이 거기 들어와서 다 떨어먹고 굶어죽게 생겼단 말여, 농사터전이 있나. 저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전국적으로 수많은 신도들이 들어와서 가지고 온 재산 다 떨어먹고 굶어죽게 생겼거든. 그래서 강화의 한 인희 아버지 한 호석 씨가 강화에 직조하는 것을 모방해서 명주베라도 짜서 밥 먹구 살아야겠다구 구황방을 내 놓았어. 구황방을 해서 생식을 하고 사니 그게 살 수가 있어? 생식도 한 달에 쌀 한 되는 있어야 할 거 아녀. 그래서 직조를 하게 된 거여, 보천교 신도들이 다 망하면서 베 짜서 먹고 살았어. 이 상호씨도 직조기를 한 대 갖다 놨는디 아마 서너 필이 감겼는지 다 헝클어져서 말여. 내 던진 베틀 하나 있어(폐기물로 던져두고 이사 간 빈 집.장님이라 직조불가). 그러고 가만히 보니께 쌀도 없어. 그래서 쌀 한 가마 값이나 주고, 그런 인간적인 정으로...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리고 박 모 모씨 집에서 며칠 묵다 올라왔는데, 구황방 얘기를 보충하면 내가 11살 땐가 생식을 8개월을 해 봤어. 각시바위 구멍에서 며칠 있은 후로 생식을 시작했는디, 한 8개월 나중에는 전혀 화식이란 걸 먹지 않고 쌀가루, 콩가루 먹었어. 한 8개월하고 났는디, 내 어머니께서 따라서 굶으시더란 말여, 어머니 때문에 할 수 없이 밥을 먹었어. 생식을 하면 한 9일, 10일 만에 똥을 요거만한 새까만 똥을 싸고 말어. 세상에 안 먹고는 살 수 있나... 그래서 어려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어. 구황방도 쌀이 있어야 되는 건데, 보천교 신도들이 구황방 갖고 생활을 한다 해도 돈은 벌어야 될거 아녀. 그래서 대흥리에 직조가 유명해졌어.
<2변 도운 121(1991).3.4 강론>*그리고서 내가 정읍서 그 얘기를 하고 떠나 집으로 와서 한 바퀴 돌고 다시 정읍을 갔어. 가서 이 한우 씨한테 가서 의통제작을 하는데 쓰라고 돈을 주고 왔어. 뒤에 가서 보니께 6임조에 근거해서 내 도장을 하나 마련해 놨더라고. 책임감도 있고 그래서 집으로 와서 보천교 신도들한테 이제 너희들도 의통준비를 하고 다시 그때는 내가 교주할 욕심도 없고, 다 같은 신도들이고 하니께 누가 뭐가 되고 그러는 걸 따지기 전에 동지적인 입장에서 뭉쳐서 단체도 구성하고, 상제님 사업을 하고 그러는 거지. 보천교 신도들은 차 경석씨도 꼭 신앙하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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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도수 세 살림의 서막을 알리는 안 운산 숙구지 문왕 도수 )-4 어린시절 몰래 가출해 서산 대산면 운산리 각시바위 9일간 수도 공부! 이후 13세때 2주수행 끝에 광명도통!
아래 사진은 각시바위 전경. 바위 아래 검푸른 페인트로 희미하게나마 각시바위라 씌어져 있으나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막상 촬영하니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보인다. (2024. 10.20. 중흥 장엄장 용화도장 일요치성 후, 안원전 촬영. 장락, 현광 추적탐사 동참) 인근에 중복도정 증산도 서산도장도 있으나 이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것으로 보아 아직 위치는 모르고 있는듯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접근하는 길이 무인지경으로 전혀 산길이 없이 자취가 끊긴 채 온갖 덤불로 가득차 이를 헤쳐 길을 만들며 겨우 나아가야 할 정도였다. 마치 누구도 접근하지 않은 듯 보였다.
이번 각시바위 현장탐사 추적 발굴 사진은 안원전, 장락 김동희, 현광 윤도진 탐사팀 3인이 처음 찿아 도사에 처음 공개하는 것으로 실로 의미가 아주 크다! 안원전이 맨발 벗고 직접 위에 올라가 보니 아이 한둘 겨우앉을 만 하고 강론에서 말씀하신대로 위가 뻥 뚫려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위에서 아래로 찍었다.
"우리 동네 각시바위, 신랑바위라는 큰 바위가 서북으로 조그만 온 판때기 같은 바위가 서 있었는데 서쪽은 각시바위 거기서 보면은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어서 사람 두어 명 가서 앉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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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소거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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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소거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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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찍으니 '판때기' 같은 절편 바위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