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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경대전 서문> 출간 축하!♤♤●●증산 상제님은 진주치기 노름을 하시며 모두 트라 하셨습니다.-金剛 大仙師

낙엽군자 2022. 12. 12. 19:03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

 

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
초중말복 5진주 세명(5진주를 율곡은 <참 5>인 <달고나 참외>로 표현 ). 5+5+5(6)=15(16).마지막 5진주는 판모리 6서시. 따라서 15진주 수는 참5 달고나 참외 5진주 3명이 합해 이루어지며(1,3,5,7,9 양수의 황극수5를 취한 것) 마지막 5진주는 음수 2,4,6,8,10의 후천 황극수 6도 가능하므로 한 끗수가 튄 16수도 된다. 말하자면 마지막 말복 5황극수 진주는 11귀체에 의해 11성도에 대한 5의 보수 6도 되므로 15진주, 16진주수도 되는 것이다.

 

청음남주관련:

청음남주 본질과 정체.pdf

통합경전 에센스 다이제스트PDF:  파일 다운!

뉴- 에센스 축약다이제스트통합경전.pdf

 

<통합경전>다음 밴드에 들어가면 전체 파일 다운됩니다. 비회원 입장 가능.엄밀히 말하면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밝혀지는 '천지공사 진법을 설명해주는 안내서'로 <통합경전 서문>입니다.<통합경전> 전체는 본문 포함 기독교 신구약 두배가 넘는 분량입니다.
http://band.us/#!/band/61758246

 

범증산계통합경전-십경대전 서문 5월31일 출간! 전국서점 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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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라 목차가 없음
동지한식백오제 천지공사 105년간의 종통인사 비밀을 모두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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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공사와 도사에 있어 청음 남주의 본질과 정체 모아보기-청음 이상호, 남주 이정립(성영)은 🇯🇵조선총독부 경성 경무국 🇰🇷조선인 탄압 책임담당 동광회 회장 김태석-태식& 경기도 경무국 후지모토 국장에게 이중으로 포섭, 매수된, ~600만 민족종교 보천교 해체의 행동책~🎭으로 직접 이들 양 쪽 일제 순사 8 명을 거느리고 당시 일제에게 정체불명였던 차교주가 은거해 있던 함양 황석산 우전리로 찿아가 차교주를 반강제적으로 협박 일제 첩보대에 비밀조직을 공개하는 소위 '보천교 양해사건'을 일으켜 일제 수사관들과 차경석 교주를 직접 대면케 해 비밀교주의 정체를 폭로 공개하고 비밀 결사조직인 보천교 조직의 실체를 처음 공개케 한다.

청음남주에 의한 '보천교 양해사건'으로 인해 6백 만 민족종교 보천교는 발가벗겨진 채 조선총독부의 '보천교 신법제정'과 함께 해체되는 운명에 처한다. 청음 남주는 이 사건 이후 조선 총독부를 등에 업고 그들의 목적에 부응해 '독립운동자금의 산실' 보천교 해체를 위한 행동책으로 보천교 혁신운동을 본격적으로 일으키고 보천교 출교 이후 조선총독부 조선인 거물 친일파 종교 전문 밀정인 *조선총독부 촉탁* 김환金丸의 기획에 의해 동화교를 창교하고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파로 처단되어 체포 구금대기 중 이승만의 야만적인 반민특위 해체명령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다.

또한 이 상호(본명:明鐸)·이 성영(본명:誠鐸) 형제 두 사람은 목포에 수감되었을 적에 모든 책임을 얼굴도 모르는 태모님에게 덮어씌워 태모님으로 하여금 감옥생활 하게 만든 적도 있고 보천교 교주로 차경석을 옹립한 뒤 실권을 쥔 뒤 다시 축출하고 교권을 차지할 욕심으로 곤존 고수부님을 공개적으로 축출운동을 벌여 결국 조종골로 내쫓은 파렴치한이었습니다. 뒤에는 자신들이 주인공 추수사명자인 해도진인(海島眞人)으로 자처하여 욕속부달(欲速不達)의 허황된 욕심으로 자신들에게 진리를 전해준 스승이자 이종물 사명자인 차 경석 교주를 조속히 옹립시킨 뒤 조선총독부를 등에 업고 차 교주를 축출하여 교권을 차지하고자 공개적으로 보천교 혁신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청음과 남주가 무진년 동지 대각다리 인암 박공우 성도 조우사건과 의통해인 전수에 대해 스스로를 해도진인으로 착각하며 진사성인출의 비결에 의거 무진기사년의 연도에 맞추어 마침내 1928(무진)년 일제의 협력을 얻어(조선총독부 종교계 고등밀정인 "촉탁" 신분 김환과 정무총감 조선인 비서 채기두의 협조로  ‘동화교’를 창교하고 차경석 교주와 김형렬 미륵불교를 배신하는 배사율을 범하면서 자료를 취합한 그들 형제는 <서전 서문>의 기사(1929) 삼월기망(3.16)에 맞추어 ‘대순전경’을 발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대국적으로 무진년은 곤존 태모 고수부님의 무진년 구월도 공사로 임술생 문왕 추수사명자를 영적으로 깨우는 공사로 상제님과 태모님은 무진년 공사로 술부戌符 문왕사명자와 자부子符 사명자 병립하게 하여 문왕추수사명자를  청음으로 하여금  은폐시키시고서불徐市의 서徐씨 해원공사를 서鼠=子 띠 생 청음 이상호에게 부쳐 이악충자以惡充者로 해원하게 하셨습니다.

*<甑山道 道典 들어가는 말>*김자현 성도의 손자 김택식에 의하면 “조부님은 이상호에게 증언을 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김자현 성도는 김형렬 성도, 김갑칠 성도에게도 당시 보천교에서 출교된 뒤 태운장의 미륵불교 신도로 들어온 이상호에 대해 “한 판 차려 보려는 다른 뜻을 품고 있으니 전해 주지 마시오.” 하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한다. 이상호에 대한 이런 비판적인 의식은 당시 주요 성도들에게 널리 파급되어 있었다.(참고: 임술 생 김형렬 성도의 손자 김현식씨의 증언도 김자현 성도의 손자 김택식의 증언과 동일하게 청음 이상호가 수차에 걸쳐 상제님 성적을 들려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들려주지 않았다고 증언함)
<甑山道 道典 들어가는 말>*백운동의 안내성 성도는 몇 차례 찾아와 증언을 구하는 이상호에게 단 한 마디도 응대해 주지 않고, 멀리 구성산만 바라보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소년 시절에 곁에서 이를 지켜본 아들 안정남이 증언한다. 또 안필성은 이상호와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도인이 일찍 봉사가 되었다.’고 그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그래서 주요 성도들 못지않게 상제님과 삶을 함께 하고 상제님에게서 큰 도
수를 부여받았음에도, 그 내용을 깊이 있게 증언해 주지 않았다.
<甑山道 道典>(도문(道門)과 성도(聖徒) 3편 192장<측각주>)* 안내성 성도의 입문 과정이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까닭을 그의 아들 정남은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 아버님 생전에 이상호 씨가 와서 뭔가를 알려고, 뿌리를 캘려고 했는데 안 가르쳐 줬어. 그 이유가 있어. 이상호가 가고 나면 아버님이 ‘저놈이 역천을 해도 보통 역천을 하는 놈이 아니다. 책을 쓴다고, 우리 대선생님을 빙자해서 종교 장사를 한다. 그런 놈한테 내가 뭣 하러 알려 주냐.’ 그러고 ‘저놈이 얼마 안 가서 천벌을 맞는다.’ 했거든. 결국 이상호는 눈도 못 보고 살다가 운명을 했다고 하더만.”

<태모님께서 아들 삼으신 이용기 성도 휘하 이교승 신도 증언>* ‘이상호 형제가 세상 떠나기 전에 태모님이 살아계신데도 “우리가 종통 계승자다. 일이 여기서 된다.”고 하며 감 놔라, 대추 놔라 했다.’ <안내성 성도 아들 증언 내용>* ‘이상호 형제는 녹용을 한 가마씩 쌓아 놓고 금 궤짝을 갖다 놓았다. 이상호가 죽었을 때, 큰 형님이 가서 보니까, 그 집안에서 그런 물건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걸 자기 눈으로 직접 봤다고 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당국자 중에서 이 상호(李祥昊)와 친밀한 사람이 있어 이 상호를 권고해 가로대 군(君)이 조선 내에서난 피신할 곳이 없으니 만주 방면에 건너가 개척 사업에 종사하면 우리도 될 수 있는데 까지 원조하고 선도 하겠다 하고 김 응두(金應斗)를 수행케 하야 만주에 들어가라 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 상호(李祥昊)는 당국자의 지도 후원 아래에 상등(上等) 양복(洋服)을 착용(着用)하고 금은보석(金銀寶石)의 장신품(裝身品)을 갖추며(俱) 그 첩(妾)인 여학생도 극(極)히 사치적(奢侈的)으로 장식하야 동반(同伴)으로 만주에 들어가 이름(名字)을 바꾸어(改) 전라남도 이(李) 모(某)라 가칭하고 백만장자로서 만주 토지를 매수하려 왔다고 선전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런대 금전이라 하면 친자식 사이(親子)도 모른 체 하는 만주 각 사회단체 등은 이 상호(李祥昊)의 내력을 철저히 탐사한 후에 그 사람(彼)은 보천교의 금전을 절취하야 왔으니 그 재물을 우리들이 나누어 먹음(分食)이 가하다 하야 주야로 협박 공갈하여 일방으로난 지나 관헌에게 불량분자로 고발하야 이 상호를 포박(捕縛) 수금(囚禁)하였다.

 

공동리더

금강
2022년 12월 8일 오전 11:25

 

 

♤♤

●●증산 상제님은 진주치기 노름을 하시며 모두 트라 하셨습니다. -

●가구 진주치기 노름을 하시는데, “다 터라.” 하시고
척사(윷)를 들고 탁 치시며
●“○씨가 판을 쳤다” 하시고 다 긁어 들이시고,
●● “끝판에 ○씨가 있는 줄 몰랐지야.
●●판 안 끝 수 소용 있나.
●●끝판에 ○씨가 나오니 그만이로구나.
●●나의 일은 판 밖에 있단 말이다.-*

☆☆
<강증산실기(1961년. 전남대도서관)>에는 <동곡비서>와는 다르게 ‘서씨’ 혹은 ‘○씨’가 아닌
●● 6 끗수를 상징하는 전라도 노름판 용어
●● ‘서시’로 표기.

전라도 가구판 노름판에
*9 끗수는 갑오,
**6 끗수는 서시로 가구판의 진주 6 서시가 나오면 판모리로 끝낸다 함.
**安이 서시 6 끗수 획이며 **말복도수 인사문제 역시 새끼손가락 막둥이 6수에 부쳐놓음.
**오성산 교단도 서시가 나와 끝맺는다고 알고 있음.
ㅡ과거 이를 모르는 서백일이 서(徐)씨를 자처한 바 있음.

☆☆서씨관련 대국의 이해
ㅡ비경전 참고자료인
<대법천사님 유서 김형렬 김자현 가 보존서(大法天師님 遺書 金亨烈 金自賢 家 保存書)>에 보면

**갑오甲午는 진주眞主가 아니라 진주에 비견하는 준주准主로 준주갑오치기가 있음을 밝힘과 동시에
**교운사敎運史에 서徐씨를 상징하는
**쥐띠 생 청음 이상호가 서불徐市 해원 공사로 내세워진 인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진주노름은 십오 진주노름이고 **갑오노름은 가구판假九板 노름으로 진주가 못되지만
중복 지도자로서 말복지도자에 버금가는 준주노름의 주인공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
서徐씨는 다름아닌 진시황(秦始皇)을 속인
서불徐市(일명徐福)을 말하는 것으로
경남 남해군 상주리 석각화에 서불徐市이 지나갔다고 하여 ‘서불과차徐市過此’ 혹은 서불기배일출徐市起拜日出이라는 고대어(산스크리트어) 석각화가 전하지만
서불徐市은 일본에 들어가 일본인의 선조로 떠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추사 김 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받던 시절 정방폭포에서
상주리 석각화와 동일한 석각화를 탁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서불이 남해를 거쳐 제주도를 통해 일본으로 들어갔다가 서귀포를 거쳐 다시 돌아간다 하여
서귀포西歸浦 시市가 되었다고 하여 지금도 정방폭포에는 서불徐市공원이 있습니다.

일본 화가산현 기이紀伊에
**서불이 자기의 이름을 적어놓은 각서가 있습니다.(日本紀伊有徐市題名之刻)
**우리나라 서귀포도 서불과차徐市過此 즉, 서불이 장차 여기를 지나 서쪽 진(秦)나라로 돌아간다 해서 서귀포西歸浦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일본의 이국신궁伊國新宮에 유서불묘사운有徐市墓祠云이라 해서 서불이라는 사람의 무덤과 사당이 있다 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삼황내문) 서불은 진시황을 속이고 동남동녀 각각500씩 천 명을 거느리고
(일설엔 3천 동남동녀)
불노초와 신선을 찾으러 경상도 남해-제주도-일본으로 갔으나 다시는 고국 땅을 못 밟고 일본사람의 시조로 추앙됩니다. 일설엔 신무천왕이 바로 서불이라고 봅니다.

●● 상제님께서는
○1. 서불徐市의 서徐씨 해원 공사를
서鼠=子 띠 생에게 부쳐 이악충자以惡充者로 해원하게 하셨습니다.
(현무경 子符) 쥐띠는 바로 청음 이 상호입니다.
2. 불로초 영생불사 신선의 꿈을 꾼.
*진시황은 의약복서종수지문의 대보책 공사로 해원시키고.
*서불(서복)은 일본 왕실 조상신의 혼반본국 공사로
청과 조선의 경제개발에 역사케하여 증산도 후천 개창에
일조케 하셨다.
☆☆☆
대향진설도 혼반본국공사는
진묵과 문명신ㆍ도통신의 혼반 본국외에 일본왕실의 혼반본국도 포함되어 있다.
☆☆
일본 왕실의 본향은 천불(천시)원이라는 경상도 가야산줄기 가조분지입니다.
일본(왕실)은 신라박씨 연오랑 세오녀 후손. 백제 부여씨 후손.
고구려 고씨 진나라 서불씨 후손들의 복합 왕조입니다.
((일본은 수많은 왕국이 있었다))


●●
명치는 나의 양장이니라

1 상제님께서 하루는 “조선 국운을 일본에게 맡기려면 명치(明治)를 불러와야 하리니 이제 명치의 혼을 부르리라.” 하시고

2 명치를 불러 물으시기를 “네가 조선 일을 보겠느냐?” 하시니

3 명치가 아뢰기를 “아무 보답도 없이 인명만 상할 터인데 어찌 남의 일에 쉬이 나서겠나이까?” 하며 완곡하게 사양하고 물러가니라.

4 이튿날 상제님께서 명치를 다시 불러서 혼을 내신 뒤에 물으시매 역시 사양하므로 돌려보내시더니

5 사흘째 밤에는 크게 화를 내시며 “이놈! 이놈!” 하고 밤새도록 불호령을 내리시니라.

6 이에 명치가 마지못해 굴복하여 “조선 일을 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7 상제님께서 명치와 더불어 여러 공사를 보시고 돌려보내시니라.

8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명치 그놈, 참 잘난 놈이다. 명치만큼 똑똑한 놈이 없다. 똑똑하고 무서운 놈이니 장차 서양 세력을 물리치리라.” 하시고

9 또 말씀하시기를 “항우(項羽)는 한 고조(漢高祖)의 양장(良將)이요, 명치는 나의 양장이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5:51)

1절 51:1 명치. 메이지. 일본의 제122대 왕(재위 1867∼1912).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여 최고 통치권자로서 천황 친정(天皇親政)의 왕정복고를 실현하고 메이지 신정부를 구성.

☆☆
명치는 광명이세 광명의 다스림이라는 배달의 통치철학입니다.

☆☆
일본 육사 출신 장교.
연오랑 세오녀의 박씨 후손.
금오산 금오탁시의 기운으로 나온 금까마귀 박정희((옳바른 밝음))
를 한민족의 혁신과 경제개발에 역사케 도수로 보신 이유입니다.


♤♤
天長地久 申命無窮 말복도정의 마지막 5진주 수는
5 이면서도 가구판을 종결시키는 6수 서시였으므로 105제 이전에는 그 정체가 드러날 수 없었습니다.

***즉, 말복 5진주는 윷판도수의 종결자인 6서시로
**105제 이전의 5+5+5=15진주 수는
**사실상 한 끗이 튄 5+5+6=16 수 였던 것이죠.

엄밀히 말하면
***마지막 진주는 5이면서도 6이므로
초복 5+ 중복 5=10,
다음 말복은 진주 수 5이면서 판모리 서시 수 6이므로 5+5+5=15 수인 동시에 5+5+6=16 수이다.

초, 중복이 같은 5진주 수 종통이지만 아직은 동지한식백오제 다음 진법이 열리기 이전 과도기 종통이므로 15 수가 차질 못했다.

105제 지난 말복진법이 열려15수가 차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말복은 5 진주 종통이면서도 판모리를 하는 서시 6수이다.
15 수이면서 16 수인 것이다.

**15수가 안 찬 초ㆍ중복 5, 5+5의 10수는 판모리를 할 수 없다. 왜? 5수이자 6수인 마지막 주자가 들어서지 않은 과도기이므로. 5, 6은 11成道, 11歸體에 의해 5=6인 새끼손가락 천지정리 무기토. 그러면 왜 가구판이냐 하는 문제. 15진주 수 전체 세살림 얼개와 한 끗 수가 튄 6서시로 16수가 되는 인사문제가 동지한식백오제 이후 열리는 사오미 개명장의 정체가

**초중복시절의 5수, 10(5+5)수 시절엔 6서시 등장 이전의 과도기이므로 (넷째이면서 다섯째인 4+5)갑오 노름이었다. 그나마 가짜 갑오가 서로 진주인 척 하는 가짜 가구假九판이었다.

즉 참 9는 갑오(4와5로 된 갑오)인데, 알팔(1,8)/비칠(2,7)/쎄륙(3,6)패로 기세농민하는 판이었다.


○○
보천교 일개 신도였던 조 철제가 “예로부터 계룡산鷄龍山의 정씨왕국鄭氏王國과 가야산伽倻山의 조씨왕국趙氏王國과 칠산七山의 범씨왕국范氏王國을 일러오나 이 뒤로는 모든 말이 영자影子(그림자)를 나타내지 못하리라 그럼으로 정씨鄭氏를 찾어 운수運數를 구求하려 하지 말지어다<보천교 교전>” 하시어 가야산(伽倻山) 조씨(趙氏) 등극(登極)을 허사로 돌린다고 명명백백히 천지공사로 집행했음에도 불구하고(<보천교 교전>,<용화전경>,<이중성 대개벽경>,<정영규 천지개벽경>) 자신도 천지공사를 본다 하여 증산 상제님을 붙박이 하늘상제 천존(天尊)으로 만들어놓고 스스로 땅 상제 지존(地尊)에 오른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12 사도, 바울 등 남성 사제 권력에 의해 막달레나가 삭제처리 되었듯이 상제님 도권 천하에서도 동일하게 태모 고 수부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종통의 낙종물 교단개창 사명 역시 정산 조 철제, 우당 박 한경에 의해 원천적으로 삭제처리하고 그 여백을 메꾼 것입니다.

현재 대순출신 신도들의 가장 큰 맹점은 무극도와 태극도 시절 이후 황진규가 일개 호령(분소 도장 책임자) 이었던 윤금현의 거짓말 창작 소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조작한 소위 <태극진경>을 그대로 받아들여 조철제, 박한경 사후에도 그들이 싸질러놓은 조작된 말을 무슨 황금덩어리 보물이라도 되는 양 오직 그 속에서 만 퍼즐찾기를 하고 비결 짜 맞추기놀이에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대순진리회의 <전경>은 이러한 조작된 정산 조철제의 행록을 삽입한 것. 대순 신도는 <전경>과 <대순전경>의 차이 그리고 <태극진경>과의 상관관계도 제대로 알지못한다)

태극진경의 저자 황진규도 스스로 태극진경은 조작된 책이니 신도들은 보지 말라고 고백했음에도 그들은 대순의 잘못된 교리 신앙조직 속에 마취되어 대국을 볼 줄 모르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살아생전 박한경도 조작된 태극진경을 보지말라고 했겠습니까. 다시말하지만

●●증산상제님 진리는 9년 천지공사 내용 이념이며 천지공사 자체가 곤존 태모 고수부님의 10년 천지공사(신정공사)와 음양짝을 이루어 증산상제님이 포석이되는 큰 밑그림을 청사진화 하셨으며 곤존 여성하나님이신 태모 고수부님이 보다 구체적인 10년 인사문제의 신정공사로 완성한 사실입니다.

​○
그런데 대순에서는 도문개창자인 낙종물사명자이자 10년 천지공사의 주인공이신
○곤존 고수부님을 신앙권에서 삭제처리하고
○그 자리의 위상을 정산 조철제로 대치해 신앙인들을 속여왔으나 이제는 9년천지공사와 10년 신정공사 음양합덕 본래의 진법 천지공사의 정체를 알아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조철제 박한경의 그림자에 포획되어 서로 박한경의 종통 계승자를 자처하며 정저지와로 세상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소위 짝퉁교리를 진본으로 알고 신앙한 나머지 진본교리를 가르쳐 주어도 진본을 짝퉁이라 주장하는 어리석음과 같은 것입니다.


​●●
건존 증산 상제님 9년 천지공사와 곤존 태모 고수부님 10년 음양짝 공사의 주인공은
●초,중,말복 도안都安 세살림을 여는 운암강수만경래 숙구지 문왕 추수사명자입니다 .

●이를 모르면 100년을 공부해도 모두 빈껍데기일 뿐입니다.

그나마 이 사실도 동지한식백오제 105년간 철저히 숨겨져 있다가 105년만의 사오미 개명장(2013, 2014,2015)에
●●수지지어사마소 도수의 시절화 주인공 등장과 함께 밝혀지도록 천지공사 도수로 質定, 攝理되어 있습니다.


《참조》
<무극도 해산 고찰, 권지1-22>*그간 무극도를 계승한 당사자임에도 대순진리회 측의 기록은 연구자들에 의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그 결과 무극도의 사정을 잘 모르는 외부 학자의 책이 많이 채택되어 왔다. 여기에 편승해 태극도의 『진경전서』(87년 출간)와 같은 서적조차 상당한 근거를 가진 문헌으로 묻어가고 있다. 『진경전서』는 2년 후인 89년에 『진경』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진경』은 「무극진경」과 「태극진경」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태극진경」이 도주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부 수도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 내용이 전혀 신빙성이 없는 소설이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도주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무극도의 해산사례에서 보듯이 정확한 근거 없이 지어진 「태극진경」을 자주 접함으로써 나중에는 그 내용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는 병폐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자제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외부의 학자들이야 도를 모르는 사람들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잘못된 설을 가지고 종단 내부에서까지 주장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차제(此際)에 『典經』의 신성성(神聖性)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극도 해산 고찰, 권지1-22>*「태극진경」 즉 『진경』의 저자인 황 진규의 진술에 따르면 윤 금현의 기록을 참조해서 썼다고 한다. 윤 금현은 1952년에 도주님(정산 조 철제)을 처음 뵈었고, 당시 직위가 호령(지금의 교정)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일단 1952년 이전의 내용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1952년 이후도 도주님을 계속 가까이서 시봉할 위치는 아니었다. 그런데 「태극진경」의 내용은 계속 곁에서 시봉했던 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부분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확률이 매우 높다. 「태극진경」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면을 통해 소개할 예정이나 우선 대표적인 한 가지만을 들자면 ‘태극주’ 문제를 들 수 있다. *** 재세시에는 ‘정산님’ 또는 ‘도주님’이라는 두 가지 호칭 외에는 쓰이지가 않았으며, 당신께서 스스로를 ‘태극주’라고 지칭하신 적은 더욱 없었다. 그런데 「태극진경」에는 ***께서 당신이 ‘태극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과 ‘태극주’라는 호칭이 여러 군데 나오고 있다. 이는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자가 임의로 지어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다.


<이중성 대개벽경(大開闢經)>*하루는 대흥리에서 다수의 양지조각에 각기 옥황상제라 쓰시고 뒷간에 가시어 후지(后紙)로 쓰시니라. 성도 물어 여쭈기를, “지금에 옥황상제라 쓰시어 후지(后紙)로 쓰시니 어찌된 연고이나이까.

○○
” 말씀하시되, “천하에 어느 누가 감히 이같이 하리오. 천지만신이 목을 자르고 몸을 찢어발기노라. 이 뒤에 하늘을 거스르고(패천) 도를 어지럽히는(패도) 자가 있어, 혹 패가망신하고 세상을 그르쳐 백성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정녕 경계함을 보인 것이나니 내가 고심함이 이와 같노라.”


<대순전경>*계룡산鷄龍山의 정씨왕국鄭氏王國과 가야산伽倻山의 조씨왕국趙氏王國과 칠산七山의 범씨왕국范氏王國을 일러오나 이 뒤로는 모든 말이 영자影子를 나타내지 못하리라


*태극도, 대순계열 성도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조 철제가 종통이 되려면 그의 인생족적과 삶이 경만장 안 내성 추종성도에게 내린 도안 세 살림 사명과 부합해야 하며 역경만첩의 문왕의 사명자 도수와 부합하여야 합니다. 만일 종통을 안 씨가 아니라 조 씨 가문에 내렸다면 천지수기를 돌리는 안 씨 추원재 재실공사는 조 씨 추원재 재실 공사로 되었어야 하고 학암 이중성 선생의 <대개벽경(천지개벽경)>에 ‘평생불변심 안**’이 아니라 ‘평생불변심 조**’라 되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상제님 주요 추종성도 중엔 조 씨 성을 가진 분이 아예 안계십니다. 동시에 가야산 조 씨 왕국이란 말이 그림자를 나타내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을 안 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조 철제 가문의 3부자에게 초중말복 세 살림을 내렸다면 안 내성 성도에게 모든 종통공사를 돌돌몰아 보신 천지공사를 조 씨 성을 가진 추종성도를 통해 보셨을 것입니다. 동시에 3초 끝에 대인출세 공사에 ‘이곳이 도안(都安)의 집’이 아니라 ‘이곳이 도조(都趙)의 집’이라 공사 보셨을 것이며 종통 세 살림 사명기와 성장, 예장, 신장 세 살림 공사도를 안 내성 성도의 순흥 안 씨 사가가 아닌 조 씨 사가에 맡겼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무경도 안 내성 성도 집이 아닌 조 씨 성도 집을 택해 남기셨을 것입니다. 그간 교단개창이라는 종통의 시발점이 태모 고 수부님이라는 수부사명을 삭제 처리한 교리 구조위에 빈 공간을 조철제의 행록으로 대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통을 주장한다면
동지한식백오제 공사대로 기유년(1909)으로부터 105년째인 사오미 개명장(2013 계사, 2014 갑오, 2015 을미)에 진법이 그 교단을 중심으로 나오되

조 씨 가문의 도조(都趙) 3부자 문왕의 도수 세 살림 진법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조 철제를 상제로 만들어 천지공사를 행했다는 『태극진경』의 저자 황 진규는 스토리텔러였던 윤금현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확률이 매우 높으며 조 철제 살아생전 ‘정산님’ 또는 ‘도주님’이라는 두 가지 호칭 외에는 쓰이지가 않았으며, 스스로를 ‘태극주’라고 지칭한 적은 더욱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태극진경」에는 조 철제를 ‘태극주’라고 부르는 호칭이 여러 군데 나오고 있는데
☆☆
“이는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자(윤 금현)가 임의로 지어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 라 밝혔을 뿐입니다.
심지어 박한경 도전都典도 「태극진경」이 정확한 근거 없이 지어져서 사실처럼 느껴지는 병폐가 있으니 삼가라 공표했을 정도입니다.

((대각기원))

 
표정짓기

안원전 총사수께서 쓰신 글을 많이 참조ㆍ인용하였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