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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의 뿌리와 역사

낙엽군자 2019. 7. 3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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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의 뿌리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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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1. 22:20

 

 

조철제(1895~1958) - 박한경(1917~1996) - 각 방면

 

대순진리회의 뿌리는 조철제가 만든 태극도이다. 조정산은 1895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만주 유하현에 이주하여 증산상제님을 생전에 만나본 적이 없고 다만 보천교 신도 김혁으로부터 진리를 듣고 신앙을 하기 시작하였고 1916년 귀국하여 충남 안면도에 거주하다가, 마침 그 지방을 순회하던 이치복 성도를 만나 상제님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1917년에는 상제닝의 누이동생인 20여 년 연상의 선돌부인을 유혹하여 천생연분이라고 속여 동거를 시작하고 1918년에는 김형렬 성도 교단에 가입하여 김형렬성도를 모시다가 1919년에는 약장과 괘를 도둑질하고 1921년 도통과 도판을 석권할 욕심으로 증산 상제님의 성골을 파헤쳐 도굴까지 하게 된다. 이는 만인이 공노할 사건으로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불의한 사건이었다. 태극도에서 발행한 ‘조정산 전기’에 보면 1921년 그의 나이 27에 정산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하였다고 하니 성골을 도굴한 그 즈음이었다. 그 후 1924년 4월에 전북 구태인에 무극대도교를 차린다. 이후 부산으로 옮기며 태극도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대순진리회를 만든 박한경은 충북 괴산출신으로 수안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에 종사하다가 27세(1943)에 일본으로 건너가 청삼에 있는 한 해군기지에서 일했으며 8.15해방 후 귀국한다. 박한경이 부산의 태극도에 입교한 것은 1946년, 그는 천지개벽과 구원의 십승지 부산, 그리고 도통을 내세운 태극도 교리에 심취하여 남달리 포교에 힘썼으며 조철제가 죽기 직전에는 태극도 내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부상하였다고 한다. 당시 태극도의 조직도 지금과 똑 같은 방면조직이었다. 그의 호 우당(牛堂)은 조철제가 지어준 것이다. 1958년 조철제가 사망한 후 우여곡절 끝에 조철제의 뒤를 이어 태극도의 대표격인 도전(都典)으로 10년간 있다가 1968년 분파되어 나와 1969년 서울 성동구 중곡동에 대순진리회를 차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1996년 1월 23일 대순진리회 발전 절정의 순간에서 뚜렷한 후계자 지명 없이 사망하였다.

대순의 교리와 정서로는 박한경은 사망해서는 안되는 존재, 인존으로서 살아서 개벽기에 도통을 내려 주어야 하는 절대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큰 충격을 주었고 후계자 지명없이 사망함으로써 분열사태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로 비화하게 된다. (1996.3.5 MBC PD수첩 ‘대순진리회를 아십니까’ 참고)

신문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집단 난투극의 한 원인이 죽은 박한경의 위상을 상제의 반열에 올리느냐 마느냐 였다고 한다. 천지인 삼계대권을 주재하여 우주를 다스리는 상제님은 오직 한 분 뿐이라는 것을 모르고, 난법교단을 이끌기 위해 상제관을 철저히 왜곡하여 교리를 조작해 왔기 때문이다. 대순 교리에 의하면 강증산 상제님은 구천상제이며 하늘 상제, 조철제는 옥황상제이며 땅 상제 그리고 박한경은 천지인 삼재 논리에 의해 암묵적으로 인간 상제였다. 그 사후 인간 상제로 모시는 문제가 터져나온 것이다. 여주 본부도장 책임을 맡았던 이유종 쪽은 박한경을 상제로 해야하고, 경석규 측은 태극도시절 조철제가 만든 방식 그대로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순의 모체인 태극도에서도 교주사후 교권다툼이 수년간 있었다. 증산 상제님은 시루이고 자신은 솥으로, 시루와 솥은 일체라는 논리로 자신에게 종통이 전해졌다고 한 조철제는 1958년 사망한다. 당시 조철제의 시봉을 맡은 시봉원의 책임자인 시봉도전이 되었다가 총도전이 된 박한경은 죽음에 임박한 조철제의 유명(遺命)에 의하여 교권을 전수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극도 측은 전혀 상반된 주장을 하였다. 즉 조철제는 죽기 직전에 박한경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도적놈이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주도권을 잡은 박한경은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간부임원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등 범죄행위를 저절렀다고 하고 끝내 자신의 신격화에 반대하는 간부들과 불화가 깊어지고 신도들간 내분이 진정되지 않자, 신도들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자기 서랍에 넣어두고 치성금과 조철제가 모아둔 금궤를 가지고 1968년 돌연 잠적하였다.

[참고 언론 자료]
○ 한국일보 1965.3.2일자 ‘폭력판치는 태극도촌’
○ 한국일보 1965.3.4일자 ’태극도 박교주 연행문초‘
○ 한국일보 1965.3.5~10일 ’태극도촌 실태‘
○ 부산일보 1968.8.3일자 ’태극도촌에 주도권 암투‘
○ 부산일보 1968.8.6일자 ’생신은 왜 잠적했나‘

이렇게 자취를 감춘 박한경은 처남 경석규를 비롯한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 1969년 새로운 교단을 차리는데 그 교명을 처음에는 ‘태극진리회’ 그 뒤에 ‘정신회’라고 했다가 다시 ‘대순진리회’고 고쳐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도전 박한경이 서울로 잠적하자 태극도는 부전(副典)이었던 유철교가 도전 서리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태극도 내의 박한경 반대세력과 추종세력간 충돌이 끊이지 않고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끝내는 경찰이 출동하였다. 결국 경찰 중재로 양측의 대표 수명이 합의하여 조철제의 셋째 아들인 조영래에게 사태수습의 전권을 위임하게 되었으나, 이미 상황은 박한경이 돈과 금궤를 가지고 사라진 뒤였다. 이후 태극도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차츰차츰 교세 쇠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



조작된 경전, 전경

대순진리회의 경전은 1974년 발행한 전경이다. 이는 대순전경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 진다.  증산상제님의 행적을 처음으로 담은 경전인 “대순전경”은 증산상제님의 모든 교단에서 근거로 하고 있다. 대순전경은 1929년에 1판이 출간된 후 2판, 3판, 4판, 5판이 출간되었고 이상호가 죽기 바로직전 1965년, 6판을 출간하게 된다. 6판은 이상호의 신앙의 고백서이며 총결산이 담긴 책으로 ‘임술생으로 수부를 천거하라’는 말씀, 수부님에 대한 말씀, ‘두 사람’을 ‘사람들’로 바꾸는 등 종통에 대한 새로운 말씀들이 대폭 추가, 수정된다. 하지만 바른 종통을 수용할 수 없었던 박한경은 전경을 새로 만들게 된다.

대순진리회의 모체인 태극도는 처음에는 독자적인 경전을 갖지 못하다가 박한경이 도전으로 있던 1965년 ‘선도진경’이라는 이름의 경전을 발행한다. 그 내용은 ‘대순전경’의 내용을 거의 베낀 것이 대부분이고, 자기들의 종통을 주장하는 조작된 성구를 새로 끼워 넣은 것이었다. 그러한 성구 중에 핵심 성구가 다시 ‘전경’속으로 그대로 삽입되었다. 태극도 시절에 썼던 ‘선도진경’에만 봐도 증산상제님께서 태모 고수부님에게 종통을 전한 성구가 부분적이나마 엄연히 실려있었으나 이후 전경에서는 대부분 삭제되고 대체된다.
전경은 95%는 이상호가 지은 ‘증산천사공사기’와 ‘대순전경’을 어투만을 바꾸어 장 절의 목차를 달리하여 재편집한 것인데 장병길은 증산 증산상제님으로부터 태모 고수부님으로 계승되는 종통전수에 관한 핵심말씀을 모두 삭제하고 대신 시루와 솥의 논리에 따라 정산 조철제 일생을 미화하여 67개 성구로 만들어 대체해 놓는다.

▶ 종통 조작을 위해 지어낸 대표적인 구절들
○ 부정리 쪽박골 : 대순전경(1929년 초판이후 현재 11판까지) 에 없음
○ 양산도 : 대순전경(1929년 초판이후 현재 11판까지) 에 없음
○ 선돌부인이 봉서를 줌 : 대순전경(1929년 초판이후 현재 11판까지) 에 없음


▶ 종통 조작을 위해 삭제된 대표적인 구절들
○ 태모님 종통 “내가 너 되고, 네가 나 되는 일이니라”
○ 태모님 종통 “나를 일등으로 정하여 모든 일을 맡겨 주시렵니까”
○ 태모님 종통 “천하사람의 두목이 되리니 속히 도통을 하리라”
○ 태모님 종통 “천지대업을 네게 맡기리라”
○ 태모님 종통 “저 양주는 둘이 똑같아서 천정연분이로다”


▶ 종통조작을 위해 왜곡한 대표적인 구절들
○ 내일은 수부가 되어야 -> (내 일)을 삭제하여 의미 약화시킴
○ 크나큰 세 살림 -> (세)을 삭제하여 의미 약화
○ 고수부, 무당도수 -> 고부인으로 낮추고 내용은 그대로둠. 과부해원으로 격하해석

 

▶ 종통조작을 위해 만든 허구적 사실과 교리
○ 도덕골이 아닌 도둑골
대순진리회 전경에는 옥황상제로 받드는 조철제가 태어난 곳을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에 도덕골로 기록하고(190쪽) 있지만 조작한 것이다. 실제는도덕골이 아니라 도둑골이다. 1998.6.29일 등록한 함안 군보 1055페이지에 “옛날에는 산적이 많이 출몰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적혀 있고, 현지 주민들도 모두 도둑골임을 증언하고 있다.

○ 부정리(扶鼎里) 쪽박골이 아닌 부정리(夫丁里) 좃박골
또 전경 2쪽에는 시루와 솥에 비유한 종통교리를 조작하기 위해 부정리의 한자를 원래 부정리(夫丁里)를 부정리(扶鼎里)로 왜곡한다. 정읍군 덕천 주민들은 물론 면사무소에 보관돼 있는 군지 기록에도 부정(夫丁)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루산->부정리->쪽박골은 증산->정산->박한경으로 종통이 이어진다고 만들기 위한 조작으로 실제는 부정리(扶鼎里)가 아닌 부정리(夫丁里)로 쪽박골은 좃박골이다.

○ 시루*솥 구조가 아닌 시루
대순은 금산사 미륵부처님 아래에 시루가 있고, 또 그 아래 솥이 있다고 하고 또 솥밑에 나무로 물을 땐다는 이야기로 종통이 증산->조철제->박한경으로 이어진다고 짜맞춘다. 하지만 불상 아래에는 통으로 되어있는 시루형태의 철수미좌 하나가 있을 뿐이고 그 시루는 원래 용소를 메워서 물을 깔고 있는 것이다.

○ 일개 신도가 옥황상제로 둔갑하게 된 사건들
1955년 4월 조철제의 측근 박중하 새벽에 한 꿈을 꾸었는데 그 속에서 조철제가 천상 옥경의 보좌와 면류관과 곤룡포를 입고 앉아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신비하게 생각하여 임원들이 회의를 거쳐 지존에 등극하라고 하는 일이 발생한다. (진경 533~534쪽) 이 외에 여러 가지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있으나 생략한다.

○ 정산이란 호
조철제의 호 정산은 원불교의 소태산이 먼저쓴 것으로 양산도라는 비결에 맞추기 위해 만든 것이다. 상제님의 호인 증산은 상제님께서 탄강하신 주산의 이름인데반해 소태산, 정산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고 양산도의 비결에 맞추기 위해 만든 호인 것입니다. 참고로 증산도 종도사님의 호, 운산은 종도사님께서 태어나신 지명에서 취하신 것이다. (충남 서산군 대산면 운산리)


○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
대순은 증산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 줄여서 구천상제라고 호칭한다. 전경 교운 제2장 32의 구절을 보면 1925년부터 조철제가 사용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하지만 이는 오직 대순에서만 쓰고 있는 술어이다. 옥추경을 보면 48신장 가운데 천존이란 호칭이 붙은 신장이 3명이나 되고 48신장 중 첫 신장이 바로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다. 천존과 상제는 그 위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증산상제님은 이 48신장을 사역시켜 개벽을 집행하는 분이다. 증산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라는 신장의 이름으로 부르고 이를 다시 구천상제라는 그럴듯한 말로 부르고 있는 대순은 천존(天尊)이 뭐고 상제(上帝)가 뭔지 모르는 난법 집단인 것이다.

 

▶ 기타 허구 사항들

○ 十二月二十六日(십이월이십육일) 再生身姜一淳(재생신강일순)
이 구절은 대순전경 초판부터 분명히 기록된 사항인데 전경에서는 ‘강일순’을 ‘ㅇㅇ’으로 조작하였다. 이는 해석의 여지를 만들어 조철제를 종통으로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 ‘전경’은 ‘대순전경’을 갖다 쓴 것이다. ‘두목’의 정체는 대순전경 6판에 드디어 나온다. 그분은 바로 고수부님이다. 대순에서는 ‘두목’이라고 쓰기 싫어서 전경을 따로 만들었다. 전경에서 10마디 사건을 조작하여 만들었다. 대순전경 6판은 이상호가 죽기직전 참회의 기록으로 가장 진실되다. 대순전경 6판부터는 11마디로 기록되어 있다.

○ 상제님께서는 정씨, 조씨, 범씨 왕국을 다 없애신다고 하셨다. 그림자 밖에 안남는다고 하셨다. 차경석성도가 정씨왕국 이었고, 가야의 조씨 왕국에 해당하는 단체는 대순의 조철제가 아닌가? 만약 조철제가 옥황상제라고 한다면 조화부린것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한 가지도 없다. 증산교사에 보면 회중전등을 이용하여 신기한 조화를 부린다고 사기를 치다가 도망다닌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참고 할 일이다.



사회에서 바라보는 대순진리회

○ 1984.4.8일 KBS 추적60분 ‘아내의 가출“
대순진리회에 들어간 후 결국 남편과 자식을 두고 가출하고 나자 어린 자식을 홀로 보는 장면이 나온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참으로 비극적인 내용이었다.

○ 1996.3.5 MBC PD수첩 ‘대순진리회를 아십니까’
대순진리회 옛 본부도장이었던 중곡도장 근처의 파출소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출한 아내와 자식들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방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중앙본부도장을 찾아 와도 신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족들은 근처의 파출소에 들러 신고를 하였지만 가출한 가족을 찾은 사람은 극소수였다고 한다.

○ 2009.9월 부산대학교 프랭카드 ‘대순진리회는 나가라’





증산상제님 종통의 뿌리는 고수부님


이정립이 쓴 “증산교사”에는 1909년 증산 상제님이 어천하신 후 종통을 계승하신 고수부님이 교단을 처음 열으신 역사 과정이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즉, 어천후 1911년 고수부님이 최초로 교단을 열었으며 1935년 선화하시기까지 상제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세 살림 도장 개척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셨는가를 큰 틀에서 말하고 있다. 만주에 가 있던 조철제가 귀국한 1917년에는 이미 종통을 계승한 고수부님의 교단 개창 및 차경석 성도의 개척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이다. 전국적으로 보펀교가 위세를 크게 떨치게 되며 태을주 소리가 메아리치게 된다. 한편 만주에서 귀국한 조철제는 1921년 증산 상제님의 초빈을 헤치고 성골을 도굴하여 이준세 재실에 모셔두고 도통을 꿈꾸며 수도를 하다가 문공신 성도의 공격을 받아 대전으로 도망을 치던 때였다. 당시 사회의 보천교 열풍을 동아일보는 1922.2.21부터 4회에 걸쳐 기사화 하여 연재하게 된다. 상제님의 행적이 최초로 기록된 ‘증산천사공사기’가 1926년에 발행되었는데 이보다 4년이 앞선 기록으로 큰 가치가 있는 기록이다.

 


<참고도서>

대순진리회의 비극 / 대원출판

대순진리회의 정체 / 대원출판

증산도 도전 / 대원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