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YouTube에서 '김원봉, 그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한번에 정리해 드립니다' 보기

낙엽군자 2019. 7. 23. 18:59






공동리더

금강

24명이 읽었습니다.




아래 동영상은 일부 긍정할 부분이 있지만 대국은 잘못 된 견해. 한국이 이승만 외교론으로 독립했다는 것은 이승만의 외교론 독립과 김구의 무장항쟁론 독립에 혼돈을 주는 부분. 이 사람은 요즘 조선 동아 애국당 류의 이승만 지지론자. 지금의 아베 경제 봉쇄의 문제의 근원인 징용,징병,위안부 문제에 대해 미국이 공식적인 코멘트를 못하는 이유는 지금은 인권을 외치는 미국 스스로가 당시 일본과 함께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어(미국의 태프트 외무장관과 일제의 가쓰라 수상이 필리핀과 조선반도의 식민지 조차를 서로 인정하고 불간섭한다는 식민지 경영에 대한 조약) 필리핀과 조선반도에 대한 식민지 조차승인과 동시에 배타적 권리를 상호 승인해준 더러운 식민지 제국주의자였기때문. 미국은 일본에 의한 이러한 한국의 인간살륙과 위안부 문제가 불거져 나와도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정책에 공식적으로 승인해 준 같은 식민지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죄악때문에 양심상 외면할 수밖에 없다. 


 김원봉이 북에 간 것이 이승만이 대통령직에 오르기 전이라 노덕술때문이라 하는 것은 모순이라 하는 것도 하지군정 시절 이승만의 권력 횡포를 전혀 이해 못해서 그런 것.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들어간 것은 당시 당시 중국상황이 국공세력이 혼재되어 있었고 김은 결국 모택동 세력이 아니라 연안쪽에 합류되지 않고 민족주의 진영으로 합류했으며 장개석쪽에 있었으며 황포군관학교 교장도 장개석이었으며, 중국에 있었다 해서 모두 공산주의자인 양 하는 것은 큰 오류, 당시 만주의 독립운동자들이 무기살 돈이 없어 볼셰비키와 손잡은 것은 이미 역사에 밝혀진 사실. 해방정국에서 공산주의자는 모스크바대 공산당 출신,박헌영, 건국준비위원회 당수 모스크바대 공산당원 출신 여운형 그러나 공산주의를 공부한 그는 사실상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고 학계에 잘 알려진대로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한국 정치사에 100년을 앞서 나아간 불운한 민족주의자였다.


  또 우남 이승만의 가장 강력한 정적으로 진보당 당수 조봉암 3인이 일반적으로 겉으로 드러난 3인 공산주의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과 달랐고 사회주의자 조봉암은 교활한 이승만에의해 간첩 양명산 사건에 엮여 법정 사형선고 이튿날 마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처럼 신속하게 사법살인으로 처형시켰다. 우남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으로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모스크바로 북경으로 협조를 구하러 가게 되고 평화통일론을 부르짖던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았다. 6.25의 근원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기여한 바 크다. 맥아더 원수 마저 회고록에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때문에 북으로 밀고 들어갈까봐 남한에 무기를 줄 수 없어 3.8선 부근에 경비행기 하나 없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당시 모든 사람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막는다는 이승만의 말이 크게 유행했다. 여기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1950년 1월 12일에 발표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에 의해 발표된 '에치슨 선언'이다. 여기서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은 그 선언에서 발표된 미국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극동방위선인데, 1950년 1월 10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비밀회담에 참석한 애치슨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한반도를 제외시켰다. 북진통일론으로 북조선을 위협하여 김일성으로 하여금 러시아 중국으로 전쟁참가를 지원 내지 후원 독려하게 하고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던 당시 야당을 빨갱이로 압살했던 이승만이 6.25 한국전쟁에 책임이 지대하다면 과연 억지가 될까?


김원봉의 오류는 북한에 넘어간 것이고 이러한 잘못된 판단이 공산주의자로 매도될 빌미를 확실히 준 것이고, 이전의 독립운동 공로가 매도된 것. 객관적으로 북한으로 넘어가 공헌을 했는지에 대한 공적인 사료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 평가는 후일로 미루는 것이 옳다고 보고, 문재인 대통령도 좌우 이념이 서슬퍼런 이때에 섣부르게 김원봉을 거론한 것도 현명하지는 않다고 본다. 이승만은 무장항쟁주의를 반대한 사람으로 당시 식민지제국주의 국제관계 속의 미일 가쓰라테프트 조약 당사자인 미국에게 한국독립의 외교론을 들고 나온것은 자가당착이므로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김구 김원봉 같은이는 만주의 무장항쟁을 했던 것이고 무기 살 돈이 없어 볼셰비키의 힘을 빌렸던 것이 이미 사료로 드러나 있으며 한국의 독립은 이승만의 외교론으로 인한 것이 전혀 아니고 김구 휘하의 윤봉길 의사 홍코우 무장항쟁 의거를 보고 크게 감명받은 장쩨스가 6억5천만의 대국인 중국도 못 이룬 쾌거를 2천만 소국인 대한인이 이루었다 하여 조소앙이 명명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처어칠, 루우즈벨트, 장개석 3인 '카이로 정상 회담'에서 정식 의제로 채택하겠다 약속하고 실제 이집트 카이로 회담에서 장쩨스의 집요한 요구로 적절한 때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정식의제에 포함 시켜 마침내 대한민국이 독립하게 된 것이다. 외교론자인 이승만은 임정 독립운동 자금만 하와이에서 축내며 호사생활을 했을 뿐, 카이로 독립의제 선택과 전혀 상관도 없었고 한국독립에 전혀 상관없다.


일본패망과 한국독립에 전혀 관련이 없다. 이승만의 무장항쟁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조소와 폄하에 의하면 안중근 장군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윤봉길, 이봉창 나석주 의사등의 외롭고 고독한 무장항쟁은 비난받고 조소받아야 할것이다. 실제 일본의 극우 전범그룹 사사카와 재단이 돈 대 만든 연세대(이사장 조선 방우영) 아세아제단과 연계된 뉴라이트 출신들이 안중근 의사, 백범 김구를 테러리스트라 주장하는 것을 보면 일본극우재단에 연구비 받아먹고 친일하는 이들 학자들이 제 정신이 아니지만 이승만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아마 이들과 똑같은 테러리스트 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카이로 대한민국 독립의제에 올린 상황도 김구가 장개석으로부터 제일 먼저 소식을 받았지 이승만은 처음에 이러한 상황을 알지도 못했다.


당시 장개석은 우리 임정도 장개석의 행보에 상응해 임정도 따라 움직이도록 배려했다. 중요한 것은 의열단이 김원봉 한사람만의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었는지라 동영상에 보듯이 저렇게 얼렁뚱땅 도매금에 매도해서는 안된다. 저 동영상의 주인공은 그저 선동꾼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하면 단재 신채호 같은 분이 만주로 달려가 촛불 하나 켜 놓고 칼을 입에 물며 의열단에 입단한 이유도 이승만이 외교독립론을 말하면서 상해 임정으로 보내져야 할 독립운동자금을 미국에서 가로채 독식하며 미국 정계에 직제에도 없는 임정의 대통령이라(뒤에 임정국격을 생각해 고육지책으로 추인) 명함을 나눠주고다니는 꼴이 미워 박차고 나가게 된 이유다.


신채호는 양두구육의 이승만 때문에 임정을 박차고 나가 1923년 이후에 이회영과 유자명, 그리고 중국인 이석증 교수와 교류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1923년 의열단장 김원봉이 신채호를 만나기 위해 북경을 방문하고 만나서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화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신채호는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상하이로 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한달 동안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한 것이다. 이승만은 6.25 한국전쟁당시 정부는 서울을 포기하지 않는다 방송해 놓고 한강철교를 끊고 자신들만 부산으로 도망친 부도덕한 자이며 철수중에도 내무장관 조병옥 마저 따돌리고 김창룡 특무대장을(지금의 보안사령관) 시켜 정적탄압을 위해 만든 보도연맹에 무고한 양민을 집어넣어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 처형한 살인마이다. 이 사건의 내막이 21세기 초에 미국 국방성 자료에 의해 한국의 전국 교도소에서 민간인 학살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음이 밝혀진 바 있다.


 당시 한국일보에서 이승만이 김창룡 특무대장을 명해 처형한 것으로 보이는 양민숫자가 114만이다. 이승만은 부산에서도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사사오입四捨五入改憲개헌이라는 희대의 부정선거를 치루어 이에 반대하는 백성을 탄압했으며 4.19 혁명이후 헌법전문에 4.19 정신을 새겨 넣었으니 바로 반 이승만 정신이다.


그 내용이 이승만 독재의 '반 민주, 반 부패, 반 독재' 정신이다. 4.19 정신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이승만의 부패, 이승만의 독재, 이승만의 반 민주 정신을 교훈으로 새기고 영원히 역사 속에 묻어버리자는 정신이다. 지금도 아베내각에서 조선 총독부가 남기고 간 조선의 국부로 한국이 일어섰다 하지만 그것은 헌병 경찰국가로서 총칼로 압제한 무단정치로 조선인의 희생과 착취로 이루어진 조선내 조선총독부의 재산이었고, 오히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와 더불어 무조건 항복으로 인한 2차세계대전 패망으로 망해버린 일본이 다시는 일어서기 어렵던 1950년 요시다 시게루 내각 시절 6.25 한국동란 발발과 맥아더 사령부의 군수물자 보급기지의 지정은 요시다 시게루 내각 전원이 이제는 살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만세를 부르며 껴안았으니 실제로 6.25 한국동란 이후 일본경제는 눈부신 비약을 하게 되어 독일보다 빠르게 경제가 신속히 복구되어 동경 올림픽 유치까지 하게 되어 오늘날의 경제강국으로 되었던 것이다. * 그의 유명한 말 "이제 일본은 살았다!"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これぞ天佑!コレを足掛かりにして日本経済を立て直せる!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다! 이것(한국전쟁)을 발판으로 일본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


 즉 오늘날 일본이 세계속에서 영국, 독일, 프랑스보다 앞 선 경제강국이 된 것은 바로 대한민국 때문이다. 바로 대한민국이 일본경제강국의 은인나라이다.  일본판 <환단고기>를 번역한 가시마 노보루는 영국에서 건너가 뉴 프론티어 정신으로 인디언을 집단 종족살하고 건국한 미국은 자신들의 영적인 고향이자 고국 영국에 대해 항상 그리워하고(1970년대 골든 팝 시대에 영국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존 덴버를 영국 여왕이 초대해 영국왕실의 남작 기사 품계를 공식적으로 수여했다) 영국문화를 예찬하고 존경했지만, 일본은 이와는 정 반대라 주장했으니,  자신들의 고국이자 조상국인 한민족을 수탈하고(아키히토 일왕이 일본 왕실의 혈통이 사실은 백제 혈통이라 밝힌 바 있음),  식민지로 착취해 고혈을 빨았으며, 2차대전 전범국으로 원자탄 세례를 받고 100년 안에는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패망한 이후 그나마 한국전쟁 발발으로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군수물자 조달국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기사회생하여 독일, 프랑스, 영국보다 부강한 세계 제 2의 경제대국 반열에 올랐음에도 모국 한국에 대한 은공과 고마움은 물론 강제징병 징용,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는 커녕 강도적 독도 영토주장 등을 해대며 한국에 대한 무역분쟁을 일으키며 세계 경제를 교란시키고 있다.

YouTube에서 '김원봉, 그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한번에 정리해 드립니다' 보기
https://youtu.be/2WS_hKhDyhs


공동리더

제가 정치적인 얘기를 하고자함이 아니라 역사의 평가는 강과 온의 양면을 다보고자 함입니다 저의 소견이니 뜻이 달라도 이해 부탁합니다 ? !

댓글

인간은 권력이라면..

댓글

리더 안원전

일부 긍정할 부분이 있지만 대국은 잘못 된 견해. 한국이 이승만 외교론으로 독립했다는 것은 이승만의 외교론 독립과 김구의 무장항쟁론 독립에 혼돈을 주는 부분. 이 사람은 요즘 조선 동아 애국당 류의 이승만 지지론자. 지금의 아베 경제 봉쇄의 문제의 근원인 징용,징병,위안부 문제에 대해 미국이 공식적인 코멘트를 못하는 이유는 지금은 인권을 외치는 미국 스스로가 당시 일본과 함께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어(미국의 태프트 외무장관과 일제의 가쓰라 수상이 필리핀과 조선반도의 식민지 조차를 서로 인정하고 불간섭한다는 식민지 경영에 대한 조약) 필리핀과 조선반도에 대한 식민지 조차승인과 동시에 배타적 권리를 상호 승인해준 더러운 식민지 제국주의자였기때문. 미국은 일본에 의한 이러한 한국의 인간살륙과 위안부 문제가 불거져 나와도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정책에 공식적으로 승인해 준 같은 식민지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죄악때문에 양심상 외면할 수밖에 없다. 김원봉이 북에 간 것이 이승만이 대통령직에 오르기 전이라 노덕술때문이라 하는 것은 모순이라 하는 것도 하지군정 시절 이승만의 권력 횡포를 전혀 이해 못해서 그런 것.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들어간 것은 당시 당시 중국상황이 국공세력이 혼재되어 있었고 김은 결국 모택동 세력이 아니라 연안쪽에 합류되지 않고 민족주의 진영으로 합류했으며 장개석쪽에 있었으며 황포군관학교 교장도 장개석이었으며, 중국에 있었다 해서 모두 공산주의자인 양 하는 것은 큰 오류, 당시 만주의 독립운동자들이 무기살 돈이 없어 볼셰비키와 손잡은 것은 이미 역사에 밝혀진 사실. 해방정국에서 공산주의자는 모스크바대 공산당 출신,박헌영, 건국준비위원회 당수 모스크바대 공산당원 출신 여운형 그러나 공산주의를 공부한 그는 사실상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고 학계에 잘 알려진대로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한국 정치사에 100년을 앞서 나아간 불운한 민족주의자였다. 또 우남 이승만의 가장 강력한 정적으로 진보당 당수 조봉암 3인이 일반적으로 겉으로 드러난 3인 공산주의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과 달랐고 사회주의자 조봉암은 교활한 이승만에의해 간첩 양명산 사건에 엮여 법정 사형선고 이튿날 마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처럼 신속하게 사법살인으로 처형시켰다. 우남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으로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모스크바로 북경으로 협조를 구하러 가게 되고 평화통일론을 부르짖던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았다. 6.25의 근원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기여한 바 크다. 맥아더 원수 마저 회고록에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때문에 북으로 밀고 들어갈까봐 남한에 무기를 줄 수 없어 3.8선 부근에 경비행기 하나 없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당시 모든 사람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막는다는 이승만의 말이 크게 유행했다. 여기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1950년 1월 12일에 발표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에 의해 발표된 '에치슨 선언'이다. 여기서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은 그 선언에서 발표된 미국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극동방위선인데, 1950년 1월 10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비밀회담에 참석한 애치슨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한반도를 제외시켰다. 북진통일론으로 북조선을 위협하여 김일성으로 하여금 러시아 중국으로 전쟁참가를 지원 내지 후원 독려하게 하고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던 당시 야당을 빨갱이로 압살했던 이승만이 6.25 한국전쟁에 책임이 지대하다면 과연 억지가 될까?
김원봉의 오류는 북한에 넘어간 것이고 이러한 잘못된 판단이 공산주의자로 매도될 빌미를 확실히 준 것이고, 이전의 독립운동 공로가 매도된 것. 객관적으로 북한으로 넘어가 공헌을 했는지에 대한 공적인 사료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 평가는 후일로 미루는 것이 옳다고 보고, 문재인 대통령도 좌우 이념이 서슬퍼런 이때에 섣부르게 김원봉을 거론한 것도 현명하지는 않다고 본다. 이승만은 무장항쟁주의를 반대한 사람으로 당시 식민지제국주의 국제관계 속의 미일 가쓰라테프트 조약 당사자인 미국에게 한국독립의 외교론을 들고 나온것은 자가당착이므로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김구 김원봉 같은이는 만주의 무장항쟁을 했던 것이고 무기 살 돈이 없어 볼셰비키의 힘을 빌렸던 것이 이미 사료로 드러나 있으며 한국의 독립은 이승만의 외교론으로 인한 것이 전혀 아니고 김구 휘하의 윤봉길 의사 홍코우 무장항쟁 의거를 보고 크게 감명받은 장쩨스가 6억5천만의 대국인 중국도 못 이룬 쾌거를 2천만 소국인 대한인이 이루었다 하여 조소앙이 명명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처어칠, 루우즈벨트, 장개석 3인 '카이로 정상 회담'에서 정식 의제로 채택하겠다 약속하고 실제 이집트 카이로 회담에서 장쩨스의 집요한 요구로 적절한 때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정식의제에 포함 시켜 마침내 대한민국이 독립하게 된 것이다. 외교론자인 이승만은 임정 독립운동 자금만 하와이에서 축내며 호사생활을 했을 뿐, 카이로 독립의제 선택과 전혀 상관도 없었고 한국독립에 전혀 상관없다. 일본패망과 한국독립에 전혀 관련이 없다. 이승만의 무장항쟁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조소와 폄하에 의하면 안중근 장군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윤봉길, 이봉창 나석주 의사등의 외롭고 고독한 무장항쟁은 비난받고 조소받아야 할것이다. 실제 일본의 극우 전범그룹 사사카와 재단이 돈 대 만든 연세대(이사장 조선 방우영) 아세아제단과 연계된 뉴라이트 출신들이 안중근 의사, 백범 김구를 테러리스트라 주장하는 것을 보면 일본극우재단에 연구비 받아먹고 친일하는 이들 학자들이 제 정신이 아니지만 이승만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아마 이들과 똑같은 테러리스트 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카이로 대한민국 독립의제에 올린 상황도 김구가 장개석으로부터 제일 먼저 소식을 받았지 이승만은 처음에 이러한 상황을 알지도 못했다. 당시 장개석은 우리 임정도 장개석의 행보에 상응해 임정도 따라 움직이도록 배려했다. 중요한 것은 의열단이 김원봉 한사람만의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었는지라 동영상에 보듯이 저렇게 얼렁뚱땅 도매금에 매도해서는 안된다. 저 동영상의 주인공은 그저 선동꾼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하면 단재 신채호 같은 분이 만주로 달려가 촛불 하나 켜 놓고 칼을 입에 물며 의열단에 입단한 이유도 이승만이 외교독립론을 말하면서 상해 임정으로 보내져야 할 독립운동자금을 미국에서 가로채 독식하며 미국 정계에 직제에도 없는 임정의 대통령이라(뒤에 임정국격을 생각해 고육지책으로 추인) 명함을 나눠주고다니는 꼴이 미워 박차고 나가게 된 이유다.


신채호는 양두구육의 이승만 때문에 임정을 박차고 나가 1923년 이후에 이회영과 유자명, 그리고 중국인 이석증 교수와 교류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1923년 의열단장 김원봉이 신채호를 만나기 위해 북경을 방문하고 만나서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화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신채호는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상하이로 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한달 동안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한 것이다. 이승만은 6.25 한국전쟁당시 정부는 서울을 포기하지 않는다 방송해 놓고 한강철교를 끊고 자신들만 부산으로 도망친 부도덕한 자이며 철수중에도 내무장관 조병옥 마저 따돌리고 김창룡 특무대장을(지금의 보안사령관) 시켜 정적탄압을 위해 만든 보도연맹에 무고한 양민을 집어넣어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 처형한 살인마이다. 이 사건의 내막이 21세기 초에 미국 국방성 자료에 의해 한국의 전국 교도소에서 민간인 학살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음이 밝혀진 바 있다. 당시 한국일보에서 이승만이 김창룡 특무대장을 명해 처형한 것으로 보이는 양민숫자가 114만이다. 이승만은 부산에서도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사사오입四捨五入改憲개헌이라는 희대의 부정선거를 치루어 이에 반대하는 백성을 탄압했으며 4.19 혁명이후 헌법전문에 4.19 정신을 새겨 넣었으니 바로 반 이승만 정신이다.


그 내용이 이승만 독재의 '반 민주, 반 부패, 반 독재' 정신이다. 4.19 정신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이승만의 부패, 이승만의 독재, 이승만의 반 민주 정신을 교훈으로 새기고 영원히 역사 속에 묻어버리자는 정신이다. 지금도 아베내각에서 조선 총독부가 남기고 간 조선의 국부로 한국이 일어섰다 하지만 그것은 헌병 경찰국가로서 총칼로 압제한 무단정치로 조선인의 희생과 착취로 이루어진 조선내 조선총독부의 재산이었고, 오히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와 더불어 무조건 항복으로 인한 2차세계대전 패망으로 망해버린 일본이 다시는 일어서기 어렵던 1950년 요시다 시게루 내각 시절 6.25 한국동란 발발과 맥아더 사령부의 군수물자 보급기지의 지정은 요시다 시게루 내각 전원이 이제는 살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만세를 부르며 껴안았으니 실제로 6.25 한국동란 이후 일본경제는 눈부신 비약을 하게 되어 독일보다 빠르게 경제가 신속히 복구되어 동경 올림픽 유치까지 하게 되어 오늘날의 경제강국으로 되었던 것이다. * 그의 유명한 말 "이제 일본은 살았다!"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これぞ天佑!コレを足掛かりにして日本経済を立て直せる!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다! 이것(한국전쟁)을 발판으로 일본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


 즉 오늘날 일본이 세계속에서 영국, 독일, 프랑스보다 앞 선 경제강국이 된 것은 바로 대한민국 때문이다. 바로 대한민국이 일본경제강국의 은인나라이다.  일본판 <환단고기>를 번역한 가시마 노보루는 영국에서 건너가 뉴 프론티어 정신으로 인디언을 집단 종족살하고 건국한 미국은 자신들의 영적인 고향이자 고국 영국에 대해 항상 그리워하고(1970년대 골든 팝 시대에 영국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존 덴버를 영국 여왕이 초대해 영국왕실의 남작 기사 품계를 공식적으로 수여했다) 영국문화를 예찬하고 존경했지만, 일본은 이와는 정 반대라 주장했으니,  자신들의 고국이자 조상국인 한민족을 수탈하고(아키히토 일왕이 일본 왕실의 혈통이 사실은 백제 혈통이라 밝힌 바 있음),  식민지로 착취해 고혈을 빨았으며, 2차대전 전범국으로 원자탄 세례를 받고 100년 안에는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패망한 이후 그나마 한국전쟁 발발으로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군수물자 조달국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기사회생하여 독일, 프랑스, 영국보다 부강한 세계 제 2의 경제대국 반열에 올랐음에도 모국 한국에 대한 은공과 고마움은 물론 강제징병 징용,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는 커녕 강도적 독도 영토주장 등을 해대며 한국에 대한 무역분쟁을 일으키며 세계 경제를 교란시키고 있다.


안원전 德在於道 化在於德

글쓴이: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의 사무처장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의 사무처장을 하면서도 깊이 느껴보지 못한 점들이 객관적 사실로 다가왔다.

“오직 폭력만이 폭력을 부술 수 있다.”

이 말은 실존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가 아프리카 대륙의 북단 알제리 독립투쟁을 이끈 혁명가였던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자신의 유작이 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les damnés de la terre)>의 서문에 올려진 말로, 그 동안 무지의 소치로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하게 된, 단재 신채호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무장투쟁 선언이 사르트르 보다 훨씬 앞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신채호는 상하이에 와서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23년 1월, 70개의 독립단체의 대표 123명이 국민대표회의를 가졌는데, 이때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였다. 신채호는 창조파의 주동자로서 '민중의 폭력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정부정의자(아나키스트)로 동방 아나키스트 연맹에 참여하였다. 또한 독립을 위해서는 철저한 '비타협적 투쟁과 민중 중심으로 민중을 혁명의 본영’으로 규정하고 테러와 폭력을 인정하고 추구하였다. '민중에 의한 폭력혁명' 만이 답이라는 그의 사상은 사실은 세계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세계사적으로 평가받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가장 강력하게 조명 받아야 할 운동으로 근대사 속에서 100년 전에 조선 땅에서 일어난 비폭력 3.1운동(1919)에 이어, 대륙에서 조선독립군들의 항일 무장 투쟁과 더불어 중국에서도 조선의 3.1운동과 러시아 혁명(1917년)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5.4 혁명으로 이어지고, 이는 대륙을 넘어 인도로 가 조선을 '아시아의 등불'이라 칭송했던 간디에 의해서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번지고 다시 대륙을 넘어 아프리카의 북단 알제리에서 프랑스로부터 무장 투쟁 독립운동을 하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에게 이어지고, 아프리카에 번진 열강 제국에 대한 저항운동은 다시 대서양을 건너 전 남미로 전파되어 체 게바라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투쟁의 본질은 식민주의 제국에 대한 저항이며 제국으로 부터의 독립이 목적이다.

이 투쟁의 본 바닥은 '민중' 이다.

바로 단재 신채호가 말했던 바 ‘철저한 비타협적 투쟁과 민중 중심으로 민중을 혁명의 본영’으로 규정하고 테러와 폭력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가장 유효적절한 투쟁방법으로 규정하였다.

이와 맞물려 생각해 보면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정치권에 의한 정치 놀음의 결과가 아니라 촛불이라는 거대한 민초들의 힘에 의해 스스로 자멸한 결과이다.

즉 단재가 말한 민중을 중심으로 '민중을 혁명의 본영'이라 규정한 바, 바로 그대로인 것이다.

일제 36년을 지나면서 해방되었다는 1945년 이래로 한국은 일제의 마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친일 세력의 기득권을 수호한 수구세력에 의한 볼모 감금시대를 살아온 것이라 할 수있겠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날 이 시점에 우리가 처한 상황은 아직도 마감되지 않은 친일 잔존 세력의 철저한 파괴와 척결이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하는 중차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진정한 광복을 맞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