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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탐구) 1. 두문동 성수 (杜門洞 星數) - 두문동 이야기

낙엽군자 2017. 8. 19. 14:53

증산 상제께서 후천 도통의 길을 알려준 중요한 공사가 '두문동 성수(杜門洞 星數)'입니다. 그렇다면 '두문동'이란 무엇일까요? 두문동이란 말에는 고려와 조선이 바뀌는 시점에서 터진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을 모티브로 합니다. 그리고 훗 날 이 사건은 영조에 의해, 충의와 절개라는 왕조의 으뜸 표상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상에 공표됩니다. 


그리고 증산 상제께서는 '두문동 72현'이라는 '세상(시속)에 있는' 사건으로 '선후천 공사'에 붙이시는데, 이는 임금과 군신 간의 원과 한과 척이 맺힌 것을, 후천에는 군사부일체가 되어 '성사재인' 해야 하므로 이들을 해원(解寃)시켜 두문불출하던 군자들을 출세(出世)로 바꾸기 위한 공사로상제님의 '제출진(帝出進)'을 '재출진(再出進)'으로 천지공사에 붙여서 마무리를 하시는 매우 중요한 공사로 쓰십니다.



고려 말- 조선 초 전환기의 비극적 사건


1392년 7월 16일, 고려의 공양왕으로부터 '선위' 형식으로 왕권을 물려받은 이성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고려의 사대부들로부터 선위의 합법적인 인정을 이끌어 내 정권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 정권의 기틀을 위한 가장 중요한 행사가 과거 시험을 통한 인재 발굴입니다. 그래서 이성계는 조선의 첫 과거를 고려로 부터 선위받은 이듬해인1393년에 시행해, 최초 합격자 99명에 태조가 직접 3명을 추가로 합격시켜 최종합격자 102명을 선발합니다. 102명이란 숫자는 새 왕조에 출사할 사람들은 거의 다 했다는 것이고 과거 볼 사람들은 다 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태종(이방원) 때, 전국적인 과거 시행을 공고했음에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지역 50여 대가(大家)가 이를 거부하고 현재 (북한 지역인)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인 두문동(杜門洞)에 들어와 역조(易朝) 즉, 새 왕조 조선에 출사하지 않고 '두문불출'함으로서 왕조의 분노를 사서 마을 전체가 불에 살라져, 이곳에 숨어있던 72명의 고려 충신들이 모두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진실에 바탕할까요?



세상(시속)으로 드러난 두문동 이야기


이 스토리는 조선 건국 350년 뒤인 영조 때부터 세상에 나타납니다. 1740년인 영조 16년 9월 1일, 영조는 개성으로 능행길을 떠나는데, 이에 대한 기사가  다음처럼 나타납니다.


[임금(영조)이 연(輦)을 타고 가면서 시신(侍臣)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命名)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하니, 주서 이회원(李會元)이 아뢰기를, “태종(太宗)께서 과거를 설행했는데, 본도의 대족(大族) 50여 가(家)가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부조현 앞에 이르러 교자(轎子)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근신에게 말하기를,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했다는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뒤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마음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하여 칠언시(七言詩) 한 구를 쓰게 하니, 이르기를,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 [勝國忠臣勉繼世]’ 하였다. 수가(隨駕)하는 옥당과 승지·사관으로 하여금 시(詩)를 이어서 지어 올리게 하였으며, 또 직접 부조현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그 터에다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두문동의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해 볼 점은 '72현'이란 말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문동 72현이라는 얘기는 이로부터 10년 후인 영조 27년(1751년)에 나오기 시작합니다. 다음은 영조 27년 9월 27일 기사입니다.


[고려(高麗)의 두문동(杜門洞) 72인(人)의 충신(忠臣)에게 제사(祭祀)를 지내도록 명하였으니, 개성 유수 서종급(徐宗伋)의 장문(狀聞)으로 인한 것이었다. 또 어필(御筆)로서 ‘고려 충신이 지금도 그 명성이 남아 있으니 특별히 그 동(洞)에 세워 그 절개를 표창한다.[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는 열 네 글자를 써서 내리고 비(碑)에 새겨서 세울 것을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두문동 72인 가운데 이제 단지 임(林)·조(曹) 두 성(姓)이 있을 뿐이라고 하니, 매우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두 성(姓) 가운데서 직임(職任)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해부(該府)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게 하여 즉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하였다.]


과거를 거부한 그 지역 50여 가(家)가 10년 사이에 두문동 충신 72명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당시 밝현진 사람은 임, 조 즉 임선미와 조의생 가문 외에는 두문동 72인이 누군지도 아예 알 수 없다고 나옵니다. 따라서 영조 대에 밝혀진 임선미, 조의생을 제외하면 다른 관련 인물 전원이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는 것이며, 또한 지금 나와있는 72명의 명단도 각 자료들마다 제각각 다릅니다. 



영조의 정치적 의도와 72현 탄생


그렇다면 영조는 왜 이 두문동 스토리를 꺼내서 그 후손을 찾아내 중용하라고 했을까요? 두문동 72현 이야기가 이렇게 널리 알려지게 된 건 영조의 정치적 의도로 인한 것입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를때부터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고 정미환국과 이인좌의 난 등 영조에 반발하는 무리가 즉위 초부터 만만치 않았고, 또 영조 16년은 경종 시해 음모죄로 처형된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이 무죄이며 영조의 충신임을 선언한 경신처분이 있었습니다. 


즉 영조에게는 왕을 따르는 일편단심 충직한 신하들과 모범이 될 만한 이들이 매우 절실했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능행길에 두문동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세상에 알리고, 신하들에게 왕에 대한 충정을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72현까지 배양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두문동 충신들에게 제사가 거행되고 비석을 세워 기념하게 하며, 이들의 후손을 특별히 등용한 것도 모두 영조대에 이르러 시행된 정책입니다.


그렇다면 '72현'은 어떻게 태어나 것일요?  ‘두문동 72현’이라는 용어의 ‘72현’은 공자의 제자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의 제자는 3,000명이었는데 몸소 육예(六藝 : 禮, 樂, 射, 御, 書, 數)에 통달한 제자는 72인이었다.’라고 나옵니다. 따라서 ‘72’라는 숫자는 구체적인 사람의 수를 지칭하기보다는 ‘다수의 현인(賢人)’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해야 하고, 성리학이 국가의 근본 사상적 토대인 조선에서 72현을 모심으로서 대외적 명분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두문동 성수 공사의 핵심


이제 증산 상제께서 왜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두문동 사건'을 선후천 천지 공사의 재료로 활용하셨는가 라는 의문이 따릅니다. 쪽박골을 비롯해서 시속에 있는 일상적인 것을 토대로 공사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증산께서 말씀하신 다음의 공사 원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일을 있는 말로 만들면 아무리 천지가 부수려고 할지라도 부수지 못할 것이고, 없는 말로 꾸미면 부서질 때 여지가없느니라."  (교운 1장 36)


상제께서는 이 세상에 이미 있어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을 재료로 공사(公事)를 보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말은 모두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고, 따라서 인구에 회자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쪽박골을 비롯 두문동은, 말의 발음에서도 차용해 공사를 보셨다는 것인데, 상제께서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 후천에는 한글로 통일된다 하시고, 옥편을 불사르는 공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지명, 종도 이름의 발음 기운을 빌려 쓰셨습니다.


1. 일본 신호 공사는 우리나라의 신방축 공사로써 처결하셨는데 이는 어음이 같음을 취하였다고 하심

2. 청주 만동묘 공사를 청도원이라는 지명 발음을 통하여 공사 보심

3. 안중근 의사가 암살한 공사는 안내성을 통하여 처결하였는데, 이는 安(안씨성을 가진 사람) 乃(마침내) 成(이루다)과 같은 의미를 포함

4. 서울 경(京)자 가진 사람의 기운을 쓰신다면서 경학, 경수집에 대학교와 수명소 공사를 보심. (경수(京洙)--수명소)에서 보듯 한자와는 관계없이 발음이 같음을 취하여 공사보심


그렇다면 왜 두문동일까요? 두문동을 차용해 공사를 보신 이유는, 두문동 사건의 핵심인 군신 간의 갈등과 척을 해원시켜 미래의 '군사부 일체'를 통한 도통군자를 탄생시키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두문동"이란 발음에서도 차용을 하셨는데, 즉 '2개의 문'(두문)이란 것을 통해 도통이 이뤄짐을 강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두문동'을 한자대로 차용해 '두문(杜門)' 즉 막힌 문인 선천을 열어 후천을 열겟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증산도나 대순진리회를 모르는 분들은 매우 난해한 말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3편으로 계속)

출처 : 종단 대순진리회 010-4422-9617
글쓴이 : 혜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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