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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12 <칼利>

낙엽군자 2017. 7. 24. 14:26

都安_세살림_宗統사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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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12 <칼利>









 글쓴이 : 아사달




칠갑산이라는 노래가 있다. 주병선씨가 불러 국민 애창가요가 된 노래다. 칠갑산에 콩밭이라니 어째 벌로(허투로) 들리지 않는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이렇게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자면 삼복 무더위에 콩밭 매느라 베적삼이 흠뻑 젖어버린 아낙의 꿈이 떠오른다. 만약 이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콩대에서 콩이 열리지 않는다면 헛농사다. 아낙의 꿈은 깨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아낙은 아무 것도 모르는 한갓 심성만 착한 농부가 아니다.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는데도 콩대만 무성히 자라면 아낙은 잡초를 뽑아주는 보살핌의 일을 그만 두고 이제는 낫을 들어 무한히 자라려고만 하는 콩대의 윗동을 잘라버린다. 아낙은 이미 여러 해 농사 경험을 통해 실속 없는 무한성장에 제동을 거는 방법을 알았던 거다. 이렇게 해 놓으면 비로소 콩대에서 콩이 열린다.



태전太田에 증산도가 뿌리 내린지 어언 40년이다. 상제님 태모님의 베적삼이 삼복더위에 이미 흠뻑 젖었다. 그러나 아무리 공을 들여도 콩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실속 없이 몸짓만 불리고 있는 것이다. 생산성은 떨어지고 소모성만 늘어난다. 콩이 달려야 할 자리에 콩잎만 무성한 것이다. 더욱이 열매를 맺어야할 자양분이 사위님의 사리사욕에 의해 필요 없는 곳으로 새어나가고 있다. 이대로 두었다간 상제님 공사가 헛공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필자는 다른 상제님을 신앙하는 단체도 많은데 오직 태전의 증산도의 성패에 상제님 공사의 성패가 달려 있다 말하는가?



증산도는 상제님 천지공사 성사재인의 본줄기이다. 일찍이 상제님께서 내려주신 ‘선경건설의 푯대를 태전에 꽂았다’는 말씀과 ‘수부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말라’는 말씀이 태전의 증산도에서 그대로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상제님의 종통대권이 태모님께로 흘러 간 것을 증산도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증산도야말로 상제님 종통 맥을 바른 유일한 단체다. 이것이 태사부님의 존엄성 대한 여러 근거중 하나이며, 동시에 태사부님이 창도한 증산도의 위대성이다. 그리고 종정님께서 편찬한 ‘증산도 도전’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도 ‘고수부님’을 온 인류의 어머니 ‘태모님’이라 추존한 사실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용봉龍鳳’의 참뜻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용봉 두 글자는 상제님 친필이다. 1903년 계묘년 상제님께서 대원사 주지 박금곡에게 써 주신 글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상제님께서 직접 쓰신 글 ‘용봉龍鳳’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태모 고수부님에 대한 존재적 위치를 더욱 명확히 가늠해 볼 수 있다.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그 시절 상제님께서는 머리를 마주 댄 형식의 용봉을 쓰심으로써 태모님의 위격이 당신님과 동등한 것임을 온 인류에 선포하였다. 인사의 두 지도자에 대한 위격이 같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둘이라고 하는 것은 천지의 수리적 표현이다. 상제님 말씀 속에 둘이라는 표현은 상제님 태모님의 다른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천지, 일월, 건곤, 감리 등은 상제님 태모님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사의 지도자라 하는 것은 우주원리를 잘못 해석한 억지 주장이다.



천지간에 나온 만물은 천지를 닮아 모두 둘이라는 존재모습을 띠며 삼이라는 생장성의 법도를 따른다. 이 세상에 사람도 남여라는 두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역사 속에 천지의 이상이 펼쳐지는 것은 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두 삼천으로 이루어져 나간다. 그래서 성사재인의 지도자를 두 사람이라 제한하는 것은 마치 손가락이 두 마디로 이루어 졌다고 우기는 것과 같은 논리다. 손가락이 두 마디로 이루어져 있으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불구자다. 손가락 두 마디로는 이 앞에 놓인 연필 하나도 집지 못한다. 돌아보면 상제님 태모님 도정이 두 사람 론에 빠진 불구가 되어 성장이 이루지지 않는 것이다. 모사재천은 두 사람이 하지만 성사재인은 세 사람이 한다.



각설하고 도전에 의하면 상제님이 태모님을 만난 건 1907년의 일로 나온다. 이에 반해 용봉을 쓰신 것은 1903년의 일이고 보니 이 용봉이 태모님의 위격을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리일 수도 있다. 상제님께서 아무리 하느님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역사 속에서 만나지도 않은 태모님에 대한 위격을 나타내는 용봉이라는 글부터 쓰셨을 리는 없겠기 때문이다. 용봉을 쓰신 연대가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상제님이 태모님을 만나신 시기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태모 고수부님의 수석성도인 고민환 성도가 편찬한 선정원경에는 차경석 성도와 태모님이 상제님을 만난 시기를 1903, 계묘년이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향수님이 올려주신 선정원경의 내용을 보자.



<선정원경(仙政圓經)>*임인년중(壬寅年中:1902) 하루는 건존(乾尊) 증산(甑山)께옵서 도생(道生) 김형렬(金亨烈)에게 대(對)하여 말씀하시되 “세운(世運)이 박도(迫到)하야난 중(中) 천지공사미필지세(天地公事未畢之勢) 후천선계공사(後天仙界公事)가 고미결정(姑未決定)에 수부(首婦)를 찬정(撰定)하여야 제반공사(諸般公事)가 순서종결(順序終結)할 진대 수부(首婦) 미정(未定)하야 공사(公事)가 중체(中滯)인 즉(則) 수부(首婦)를 찬정(撰定)케 하라” 명(命)하시며 “수부(首婦)의 책임공사(責任公事)가 십여성상유여(十餘星霜有餘)라” 하시어 형렬(亨烈)이 고(告)하야 “제 여식(女息)이 방재(方在) 고년중(苽年中)이니 처분(處分)하사 용인(容引)하소서” 수차(數次) 고(告)한 즉(則) 그러하면 필가하시니라.



<선정원경(仙政圓經)>*그런 중(其然中) 형렬(亨烈) 부인(夫人)이 비밀리(秘密裡)에 생각(生覺)하되 연령(年令)도 다를 뿐아니라(不合不) 소위(昭謂) 양반(兩班)의 처지(處地)에 그러할 수 없어 타처(他處)로 결혼(結婚)하야 선폐금(先幣金) 오십량(五十兩)을 수납(受納)하야 시 연방시초리(烟房柴草裡)에 비밀리 감추어두던 중(秘藏中) 하루는 건존(乾尊)께옵서 늦은 저녁(暮夜)에 도착(到着)하시와 시장(嘶장)하니 식사(食事)를 가져오라 하신지라 적인(適因)하야 양식이 떨어져(絶粮) 저녁(夕時) 불기가 끊어진(絶火) 중(中)이라 고(告)한즉, 건존(乾尊)께옵서 “돈 두고 굶는 건 퍽 난심이라”하시니 형렬(亨烈) 되고(告)하되 가본즉(則) 과연(果然)이라 즉시(卽時) 매량(買粮)하야 취반(炊飯)이 헌공(獻供) 즉(則) 식사(食事)하시며 “그밥 맛있다” 누차(屢次)하시며 “양반(兩班)이 집안은 망(亡)친다”하시니라.



<선정원경(仙政圓經)>*그후(其後) 건존(乾尊)께옵서 차경석(車京石)에게 대(對)하야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수부(首婦)가 있어야 순서진행(順序進行)인 중(中) 수부가 없는 고(首婦不存故)로 공사 중간에 밀려있는 일이(公事中滯) 많음(多端)이로다. 독음독양(獨陰獨陽)이면 만사불성일뿐만 아니라(萬事不成不) 수부(首婦)의 책임공사(責任公事)가 중요산적(重要山積)이로다. 그러니(然而) 속히 수부(從速首婦)를 찬택(撰擇)케 하라” 특명(特命)하신지라. 마침 이때(適其時)하야 이종매(姨從妹) 고씨(高氏)께옵서 과거중(寡居中) 이 뜻을 고달(此意高達)이러니 건존(乾尊)께옵서 말씀하시되 “지척(咫尺)에 두고 미정(未定)이로다” 연이(然而) 경석(京石)이 매씨전(妹氏前) 이뜻(此意)을 권유(勸誘)하야 결연(結緣)한 즉(則) 그해가(是年) 계묘년(癸卯年:1903)이라.



종정님께서는 통일경전이라는 도전을 편찬하면서 선정원경의 기록을 채택하지 않고 이*호 이*립이 기록한 대순전경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아마 종정님은 용봉에 대한 의미를 상제님 태모님이라 생각하지 않고 인사의 두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태모님을 직접 모신 고민환 성도의 기록보다 대순전경의 기록을 더 신빙성 있다고 여긴 것인지 모른다. 종정님께서는 이*호, 이*립, 홍*렬의 계보를 그렇게 미워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처음 잘못 해석했던 두 사람 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만 것이다. 도전 초판에 메모해 둔 종정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이*영이 *립으로 개명한 것은 천지를 바로잡는다는 대두목 병 때문이다. 호도 남조선 배란 뜻의 남주라 했다. 이*호 이*립은 자기들이 ‘사람 둘’ 인줄 알았다. 그러나 이*호가 죽자 ‘사람들’로 고쳐놓아 종통을 왜곡하였다. (종정님)>



그러나 태사부님이 선화하시면서 종정님도 똑같은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이제 ‘두 사람’을 ‘한 사람’으로 고칠 것인가. 두 사람 론이 성사재인의 인사문제를 푸는 열쇠 즉 진리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태사부님의 선화는 이 두 사람 론에 있어서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사건이다. 두 사람 론은 이미 끝났다. 우리는 지난 경험을 통해 두 사람으로는 상제님 천지공사 성사재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콩은 열리지 않고 잎만 무성한 신도들의 혈성만 낭비하는 이 도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상제님 말씀을 들어보자.



일꾼된 자 강유를 겸비하여 한편이라도 기울지 아니하여야 할지니, 천지의 대덕이라도 춘생추살의 은위로써 이루어지느니라. (도전 8:62)



혁명은 상제님이 용천검을 빼어 든 역사적 사건이다. 혁명은 잎만 무성히 자라 도무지 콩이 열릴 것 같지 않은 콩대의 윗동을 잘라내어 열매를 맺게 하려는 춘생추살의 대덕으로 역사 앞에 등장 한 것이다.



콩대의 윗동이란 누구를 의미함인가. 종정님이라 생각하겠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사위님 내외분이다. 이 두 사람이 소모성 도정의 핵심이다. 이 두 사람이 종기로 말하면 근이다. 이 근을 뽑아내야 새 기운이 도는 것이다. 도전 개정판, 종정님께서 완간본이라 명명한 도전을 보면 10편 116장 17절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장 제목은 <천 년 묵은 곤륜산 두 여우 제어 공사>라 되어 있다.



<한편 서양으로 건너갔던 암여우는 사오미 개명도수를 흔들기 위해 제 3변 추수 도운의 포교 오십년 공부 종필 도수 해의 동지 전야로 발동하니라.>



이 도전 말씀을 다시 현도정의 시국에 맞게 재구성해 보면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다.


‘한편 서양으로 건너갔던 암여우는 생장성으로 이루어지는 천지공사 성사재인의 비밀이 밝혀지는 사오미 개명도수를 흔들기 위해 계사년 동지 전야로 발동하니라.’



이 사오미 개명을 통해 생장성으로 이루어지는 성사재인의 비밀이 밝혀지고 두 사람 론에 희생되었던 용봉이 본자리를 찾았다. 상제님 태모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의 로고처럼 이제 용봉이 상제님 태모님의 상징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결국 콩밭에 용봉기가 펄럭이면서 콩대에는 콩이 주렁주렁 열린다. 돌아보면 계사년 동지 전야로 사위님이 성사재인의 비밀이 밝혀지는 사오미 개명도수를 흔들기 위해 천륜을 파괴하는 고소전을 시작한 것이다.



태모님의 세 살림을 닮은 태전에서 이루어지는 추수도운의 세 살림은 상제님 천지공사 성사재인의 본류다. 온갖 곳을 흘러온 샛강들이 이제 이 본류로 흘러들어 합류를 한다. 이 긴 강은 흐르고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