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달마 혈맥론6

낙엽군자 2017. 4. 26. 10:51



<달마 혈맥론6> 마지막 회.

16. ―― 수행을 권하는 말씀을 맺음――

바라노니, 수도하는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을 깊이 음미하여 다시는 사소한 의혹을 일으켜서 물러서는 일이 없도록 하라.
대장부의 의지를 세우고 위없는 불도를 구하는 이라면 이 길을 버리고 어찌하리요?
간절히 바라노니, 글에만 집착하지 말고 곧바로 본뜻을 알아서 낱낱이 자기에게로 돌아가게 하여 근본 종지에 부합한다면 스승없는 지혜가 자연히 나타나고 천진한 진리가 또렷하여 어둡지 않아서 지혜의 몸[慧身]을 이루기에 다른 깨달음을 말미암지 않으리라.
이 묘한 취지가 비록 모든 사람의 경지이기는 하나 전생부터 반야종지(般若種智)를 심은 뛰어난 근기가 아니면 한 생각도 바른 믿음을 내지 못하리라.
어찌 믿지 않을 뿐이리요, 더구나 비방해서 도리어 무간지옥의 결과를 부르는 이가 종종 있느니라.
비록 믿지는 않으나 한번 귓전을 스쳐 잠깐 인연을 맺으면 그 공덕을 이루 헤아릴 수 없나니, 유심결(唯心訣)에 말씀하시기를 「듣고 믿지 않을지라도 오히려 부처 종자[佛種]의 씨앗을 맺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인간이나 하늘의 복을 뒤덮어서 성불할 바른 인(因)을 잃지 않는다」하였느니라.
하물며 듣고 믿으며 배워 이루어서 잘 지키어 잃지 않으면 그 공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요?

지난 세상에 윤회한 업을 돌이켜 생각하건대 몇 천겁 동안을 흑암지옥과 무간지옥에 빠져서 갖가지 고동을 받았으며, 몇 차례나 불도를 구하려 했으나 어진 벗을 만나지 못해 여러 겁동안 빠져 헤매면서 캄캄하게 깨닫지 못한 채 온갖 나쁜 업을 지었던고?
가끔 한 번 생각하면 모르는 결에 긴 한 숨이 나오는도다. 어찌 방일하다가 지난날의 재앙을 다시 받으랴?
또 누구의 힘으로 내가 이제 사람으로 태어나서 만물의 영장이 되어서 바른 수행의 길을 잃지 않았던고? 실로 눈먼 거북이 나무토막을 만난 격이며 작은 겨자씨를 바늘 긑에 던진 격이라. 그 다행스러움을 어찌 다 말로서 표현하리요?
내가 이제 물러설 생각을 내거나 게으른 생각을 내어서 항상 뒤로 미루다가 깜박 사이에 목숨을 잃고 나쁜길에 빠져서 온갖 고통을 받게 되면 비록 단 한 귀절의 불법을 들어 믿고 이해하고 지니어 고통을 벗어 나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위급함에 임하여 뉘우친들 아무 이익도 없느니라.
바라건대 수도하는 사람들은 방일한 생각을 내지 말고, 탐음에 집착하지 말고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공부하기를 잊지 말지어다.
무상한 세월이 빨라서 몸은 아침의 이슬 같고 목숨은 지는 해와 같다.
오늘은 살았으나 내일을 보장키 어려우니 부디 명심하고 부디 명심하라.

우선 세간의 유위의 선을 의지하기만 하여도 三도의 괴로운 윤회를 면해서 하늘세계와 인간세계에서 수승한 과보를 얻어 온갖 쾌락을 누리거늘 하물며 이 가장 높고 심히 깊은 법문을 의지하는 경우이겠는가?
잠깐 동안 믿음을 낼지라도 이루는 공덕은 어떤 비유로도 그 조그만치도 설명할 수 없나니, 경에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의 七보로 그 세계의 중생들에게 공양하여 모두가 만족하게 하며, 또 그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四과(果)를 얻게 한다면 그 공덕이 한량없거니와, 밥 한 술 먹을 사이에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여 얻은 공덕만 못하다」하시니, 이것으로 알건대 우리의 이 법문은 가장 높고 가장 귀하여 어떠한 공덕으로도 미칠 수 없도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기시를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이 도량이라, 항하사 수효의 七보탑을 세운 공덕보다 수승하도다. 보배탑은 끝내 부서져 먼지가 되거니와 한 생각 깨긋한 마음은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하시니, 마라건대 수도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되새겨서 부디 유의 할지어다.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생에 이 몸을 제도하리요.
이제 닦지 않으면 만겁에 어긋나거니와 이제 억지로 닦으면 닦기 어려운행도 차츰 어렵지 않아져서 공행(功行)이 저절로 증진하리라.
애닲다. 요즘 사람들은 시장하던 차에 성찬[王膳]을 만났으되 입을 댈 줄 모르고, 병 끝에 큰 의원을 만났으되 약을 먹을 줄 모르나니, 그야말로 「어찌 할꼬, 어찌 할꼬! 하지 않는 이는 나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또 세간의 유위의 일은 그 형상을 볼 수있고, 그 공능을 징험 할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한 가지 일만 얻더라도 희유하다고 찬탄하거니와, 나의 이 심성을 밝히는 종풍[心宗]은 모양도 볼 수 없고 형상도 볼수 없는지라 언어(言語)의 길이 막히고 마음의 갈 곳의 끊어졌느니라.
그러므로 하늘・마군・외도가 헐뜯을 문이 없고 제석・범천등 하늘이 찬탄할 길이 없거늘 하물며 식견이 앝은 범부의 무리가 비슷할 수나 있으랴?
슬프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어찌 푸른 바다의 넓음을 알며, 돌여우가 어지 사자의 영각을 하리요?
그러므로 말법의 시대에 이 법문을 듣고 희유하다는 생각을 내어서 믿고 받들어 지니는 이는 이미 한량없는 겁동안에 여러 성인을 받들어 섬기면서 모든 선근(善根)을 심어서 큰 지혜의 바른 인을 심은 가장 높은 근성(根性)임을 알지니라.
그러므로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이 귀절에 대하여 믿음을 내는 이는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께 온갖 선근을 심은 줄 알라」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대승(大乘)의 마음을 낸 이를 위하여 말하며, 최상승(最上乘)의 마음을 낸 이를 위하여 말한다」하시니라.

바라건대 도를 구하는 사람들은 겁내는 생각을 내지 말고, 용맹한 마음을 일으키리라.
전생의 착한 인연이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니라.
만일 수승한 도리를 믿지 않고 못난이로 자처하거나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금생에 닦지 않으면 전생의 선근이 있더라도 이제 끊었으므로 어려움이 가득해져서 더욱더욱 멀어지리라. 이제 이미 보배 있는 곳에 왔는지라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나니,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 겁에 회복하기 어려우니라.
바라노니, 삼갈지어다. 어찌 지혜로운 이가 보배 있는 곳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고서 오래도록 외롭고 가난함을 원망하리요?
보배를 얻으려는 가죽 주머니[皮囊=생명]를 던져버릴지니라.』

Ⅳ、보조 진심직설

1. ―― 참마음의 바른 이해 ――

화엄경(華嚴經)에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라 모든 선근(善根)을 자라게 한다」하셨으며, 또 유식(唯識)에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물을 맑히는 구슬[水淸珠]이 능히 흐린 물을 맑히는 것 같다」하시니, 이것으로써 만 가지 선(善)이 생기는 데는 믿음이 앞잡이임을 알겠도다.
그러므로 불경 첫머리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하는 말씀을 둔 것은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한 것이니라.
어떤이가 물었다.
『조문(祖門=선문)의 믿음과 교문(敎文=학교)의 믿음이 어떻게 다른가?』
대답이라.
『여러 가지로 같지 않으니, 교문에서는 인천(人天)의 무리로 하여금 인과의 법을 믿게 하되 복락(福樂)을 즐기는 이는 十선(善)을 믿음으로써 뵤한 인을 삼고, 익간과 하늘로써 즐거운 결과를 삼게하며, 공적(空寂)을 즐기는 이에게는 생멸의 인연을 믿음으로써 바른 인을 삼고 고집멸도(苦集滅道)로써 거룩한 결과를 삼게하며, 불과(佛果)를 즐기는 이에게는 三겁(劫)과 六도(度)를 믿음으로써 큰 인을 삼고 정각(正覺)을 이룸으로써 바른 과로 삼게 하거니와 조문의 믿음은 앞의 것과 매우 다르니라.
온갖 유위의 인과를 믿지 않고 오직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것만을 믿게하니, 천진한 자기 성품이 사람마다 구족하고 원각의 묘체(妙體)가 낱낱이 원만히 이루어져서 남에게 구할 필요가 없이 원래 스스로에게 갖추어 있느니라.
三조(祖)께서 말씀하시기를 「원만하기가 허공 같아서 모자람도 남음도 없건만 취하고 버리려는 생각 때문에 답지 못하다」하셨고, 지공(誌公)께서 말씀하시기를 「형상있는 몸 속에 형상없는 몸이요, 무명의 길 위에 생멸없는 길이라」하셨으며, 영가(永嘉)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곧 부처님 몸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라」하시니, 이것으로써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 알 것이다.
이미 바른 믿음을 내었더라도 반드시 잘 알아야 하나니, 영명(永明)이 말씀하시기를 「믿고도 알지 못하면 무명만을 더하고, 알고도 믿지 않으면 사뙨 소견만 더한다」하시니 이것으로써 믿음과 견해가 겸비하여야 도에 들어감이 빠른 줄 알리라.』
어떤 이가 다시 물었다.
『처음으로 발심해서 아직 도에 들어가지 못했더라도 이익이 있겠는가.』
대답이라.
『기신론(起信論)에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 겁내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이 사람은 결정코 부처 대를 이을 것이라 반드시 부처님들의 수기를 받으리라. 가령 어던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해서 모두가 十선(善)을 닦게 하더라도 다른 어던 사람이 잠깐이라도 이 법을 바로 생각한 것만 같지 못하니, 앞의 공덕보다 곱이나 수승하여 비유할 수 없다」하셨으며,
또 반야경(般若經)에 말씀하시기를 「한 생각이라도 깨끗한 맏음을 내는 이는 부처가 모두 알고 모두 보나니 이 중생들은 이와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받으리라」하셨으니 이것으로써 보건대 천 리의 길을 가려거든 첫 걸음을 바르게 해야 할 것임을 알겠도다.
첫걸음을 틀리면 천리가 모두 틀리는 것 같아서 무위국(無爲國)에 들어가려면 첫걸음인 믿음을 바르게 하여야 하나니, 처음의 믿음을 잃으면 만 가지 선이 모두 물러나니라.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털끝만치의 차이 만 있어도 하늘땅이 아득히 막힌다」하심이 이 도리이니라.』

2. ―― 참마음의 다른 이름 ――

어떤 이가 다시 말했다.
『바른 믿음은 이미 내었거니와 무엇을 참 마음이라 하는가?』
대답이라.
『허망하지 않으므로 참[眞]이라 하고, 신령스럽게 비추므로 마음[心]이라 하나니, 능엄경(楞嚴經)에서 이 마음을 밝히었느니라.』
다시 물었다.
『참마음이란 이름 뿐인가? 아니면 다른 명칭이 있는가?』
대답이라.
『부처의 가르침과 조사의 가르침이 이름 지은 길이 같지 않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는 보살계(菩薩戒)에서는 마음바탕[心地]이라 하였으니 만가지 선(善)을 내기 때문이요,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법계(法界)라 하였으니 얼기설기 엇바꿔 어울리기 대문이요,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여래(如來)라 하였으니 온 곳이 없기 때문이요,
반야경에서는 열반(涅槃)이라 하였으니 뭇 성인들이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이요,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는 여여(如如)라 하였으니 참되고 항상하여 변하지 않기때문이요,
정명경(淨名經)에서는 법신(法身)이라 하였으니 보신(報身)‧화신(化身)‧이 의지하는 곳이기 대문이요,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진여(眞如)라 하였으니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이요.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불성(佛性)이라 하였으니 삼신(三身)의 근본 바탕이기 때문이요, 원각경(圓覺經)에서는 총지(緫持)라 하였으니 공덕(功德)을 흘려내기 대문이요, 승만경(勝曼經)에서는 여래장(如來藏)이라 하였으니 가리워졌으되 두루 머금기[隱覆含攝]때문이요, 요위경(了義經)에서는 원각(圓覺)이라 하였으니, 어두움을 깨뜨리고 홀로 비추기 때문이니라.
이런 까닭에 수선사(壽禪師)의 유심결(唯心訣)에 말씀하시기를 「한 법에 천 이름이라, 인연 따라 이름을 세웠다」하시니, 여러 경에 갖추어 있는지라 다 인용하지 못하노라.』
어떤 이가 다시 물었다.
『부처의 가르침은 이미 알았거니와 조사의 가르침이란 어떤 것인가?』
대답이라.
『조사의 문중에는 이름도 말도 모두 끊어져서 한이름도 세우지 않았거니 어찌 여러 가지 이름이 있으리요마는 느낌에 응하고 근기에 따름에는 그 이름 또한 적지 않으니라.
어떤 때엔 정안(正眼=바른 안목)이라 하니 모든 유위(有爲)의 모습을 비추어 밝히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묘심(妙心=묘한 마음)이라 하니, 비고 신령스럽게 고요히 인지(認知)하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주인옹(主人翁)이라 하니 원래부터 짊어졌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무저발(無底鉢)이라 하니 간 곳마다 생활이 풍족하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다함없는 등불[無盡燈]이라 하니 미혹한 유정을 비추어 깨뜨리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뿌리없는 나무[無根水]라 하니 뿌리와 꼭지가 견고하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취모검(吹毛劒)이라 하니 번뇌의 뿌리를 끊어 버리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함이 없는 나라[無爲國]라 하니 바다 같이 편안하고 강 같이 맑기 때문이요, 어떤 때엔 열쇠없는 자물쇠[無 鎖]라 하니 여섯 가지 감정을 막아버리기 때문이요, 나아가서는 진흙소[泥牛]‧나무말[木馬]‧마음근원[心源]‧마음도장[心印]‧마음거울[心鏡]‧마음달[心月]‧마음구슬[心珠]등 갖가지 딴 이름이 있지만 다 수록하지 못하노라.


만일에 참 마음을 깨달으면 모든 이름을 다 깨달을 수 있거니와 이 참마음을 어둡히면 모든 이름에 모두 막히리라.이
그러므로 참마음에 대하여 반드시 자세히 살필지니라.』

3. ―― 참 마음의 묘한 본체 ――

어떤이가 물었다
『참마음의 이름은 이미 알았거니와 그 본체는 어떠한고?』
대답이라.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말씀하시기를 「반야는 형상이 없는지라,생멸의 모습이 아니라」하시고, 기신론(起信論)에 말씀하시기를 「진여의 자체는 온갖 범부・성문・연각・보살・부처에 증감(增減)이 없어서 예전에 생긴 것도 아니며 미래에 멸할 것도 아닌지라, 끝내 항상하여 원래부터 성품 스스로가 온갖 공덕을 갖추었다」하시니, 이런 경론(經論)에 의하건대 참마음의 본체는 인과를 뛰어났으며 고금(古今)을 꿰뚫었도다.
범부와 성인을 세우지 않아서 상대할 것 없음이 마치 허공이 모든 곳에 두루한 것 같아서 묘한 본체는 조용하고 고요하여 온갖 장난말(戱論)이 끊였느니라.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있지도않고 없지도 않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아서 고요히 항상 머무나니, 옛날의 주인옹(主人翁)이라 부지르며, 위음왕이전의 사람[威音那畔人]이라고도 부르며,공겁(空劫=천지창조 이전)이전의 자기라고도 부르거니와 한 생각 평탄하면 털끝만치의 티도 없느니라.
온갖 산천과 초목과 숲과 삼라만상과 온갖 더럽고 깨끗한 법들이 모두가 그 속에서 흘러나왔나니,그러므로 원각경(圓覺經)에 말씀하시기를 「선남자(善男子)야, 위없는 법왕(法王)이 큰 다라니문(陀羅尼門)이 있으니 원각이라 이름한다.
온갖 청정한 진여와 보리와 열반과 바라밀을 흘려내 보살들을 가르친다」하시고 환하여 신령스럽게도 밝아서 가고 옴이 없는지라 가만히 三제(際=과거・현재・미래)에 통하고, 중간도 밖도 아닌지라 환하게 十방(方)을 뚫었도다.
나지도 멸하지도 않거니 어찌 네 산[四山]이 가히 해칠 수 있으며, 성품도 형상도 멸했거니 어찌 다섯 빛[五色]이 능히 어둡힐 수 있으리요」
하였느니라.
또 영명(永明)의 유심결(唯心訣)에 이르기를 「이 마음은 뭇 묘함과 모든 신령함이 모두 모였는지라 만법의 왕이 되고, 三승(乘)과 五성(性)이 가만히 의지하는지라 천 성인의 어미가 되도다. 홀로 높고 귀중하여 견줄 이도 짝할 이도 없으니, 실로 대도(大道)의 근원이며 참법의 골수로다.
믿는다면 三세의 보살이 함께 배운 것이 대개 이 마음을 배운 것이요,三세의 부처가 같이 증득한 것이 이 마음을 증득한 것이요, 일대장교(一代藏敎)가 표현한 것이 이 마음을 표현한 것이요, 모든 중생의 미혹함이 이 마음을 미혹한 것이요, 모든 수행인의 깨달음이 이 마음을 깨달은 것이요, 모든 조사들의 서로 전함이 이 마음을 전한 것이요, 천하의 납자(衲子)들이 두루 참문하는 것이 이 마음을 참구하는 것이로다.
이 마음을 통달하면 물건마다 다 옳으며 일마다에 완전히 드러나고, 이 마음을 미혹하면 곳곳에 뒤바뀌고 생각마다 미치광이가 되리라.
이 본체는 모든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이며, 모든 세계가 생겨 난 근원이로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축봉(鷲峰)에서 침묵[良久]하시고, 선현(善現)이 바위 밑에서 말을 잊으셨으며 달마(達磨)는 소실(小室)에서 벽을 관하시고, 유마거사는 비야리(毗耶離)성에서 입을 다무셨다」하시니, 모두가 이 마음의 묘한 본체를 밝히신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음으로 조사의 문 안에 들어온 이는 반드시 먼저 이 마음의 본체를 알아야 하느니라.

4. ―― 참 마음의 묘한 작용 ――

어떤이가 물었다.
『참마음의 묘한 본체는 알았거니와 어떤 것이 묘한 작용인가?』
대답이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이면 마음이 나무를 흔들고, 구름이 일면 성품 위에 티끌이 인다. 오늘의 일을 밝힌다면 본래의 사람을 어둡힌다」하시니, 이것이 묘한 본체에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참마음의 묘한 본체는 본래 움직이지 않아서 평안하고 고요하고 참되고 항상하거니와 참되고 항상한 본체 위에 묘한 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니 흐름에 따라 묘함을 얻음이 무방하리라.
그러므로 조사께서 이렇게 송(頌)하셨다.


마음이 경계를 따라 바뀌나
바뀌는 곳마다 그윽하도다.
흐름 따라 성품을 바로 알면
기쁨도 근심도 모두 없으리.

그러므로 항상 움직이고 분별하되 동으로 가고 서쪽으로 옮기며, 밥먹고 옷을 입으며 숫갈을 들고 저를 잡으며, 왼쪽과 오른쪽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모두가 참마음의 묘한 작용이 앞에 나타난 것이어늘, 범부는 미혹하여 옷 입을 때엔 다만 옷 입는다는 생각만 하고 밥 먹을 때엔 다만 밥먹는다는 생각만 하나니, 모든 사업이 다만 형상만 따라 움직이므로 일상 생활 속에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눈 앞에 있건만 알지 못하는도다.
만일 성품을 아는 사람이라면 움직이고 분별 할 때에 전혀 매(昧)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태에 있으면 정신이라 하고, 세상에 있으면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으면 본다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 하고, 코에 있으면 맡는다 하고, 입에 있으면 말한다 하고, 손에 있으면 잡는다 하고, 발에 있으면 달린다 하니, 두루 나타나면 법계에 꽉 차고 거두어 모이면 한 티끌에 들어간다. 아는 이는 불성인 줄 알거니와 모르는 이는 영혼[精魂]이라 한다」하시니, 그러므로 도오(道吾)가 홀(笏)을 들어 춤추었고, 석공(石鞏)이 활[弓]을 들었고, 비마(秘魔)가 작대기[杖]를 휘둘렀고, 구지(俱胝)가 손가락을 세웠고, 흔주(忻州)가 땅을 쳤고, 운암(雲岩)이 사자를 놀린, 이 모두가 이 큰 작용을 드러낸 것이니라.
일상생활에 미혹하지 않으면 자연히 가로 세로에 걸림이 없으리라.』

5. ―― 참 마음의 본체와 작용은 같은가 다른가 ――

어떤이가 물었다.
『묻노라,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은 하나인가 다른가?』
대답이라.
『형상으로 보면 하나가 아니요, 성품으로 보면 다르지 않느니라. 어째서 그런 줄 알겠는가? 시험삼아 변론하리라. 묘한 본체는 요동치 않아서 모든 상대가 끊어져서 온갖 형상을 여의었으니, 성품을 통달하여 깨달음에 계합한 이가 아니면 그 이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묘한 본체가 인연을 따라 만 가지 형태에 응하거든 망녕되게도 허망한 형상을 세워서 형상이 있는 듯이 여기나니, 이렇게 형상있음과 없음에 의하므로 하나가 아니니라.
또 작용은 본체로부터 일어났는지라 작용이 본체를 여의지 않았고 본체가 능히 작용을 일으키는지라 본체가 작용을 여의지 않나니, 이렇게 서로 여의지 않음에 의하여 다르지 않느니라.
마치 물은 습기[濕]로써 본체를 삼나니 본체에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요, 파도는 움직임으로써 형상을 삼나니 바람을 인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의 성품과 파도의 성품이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 때문에 하나가 아니니라.
그러나 파도 밖에 물이 없고 물 밖에 파도가 없는지라, 습기의 성품은 하나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나니, 본체와 작용의 하나와 다름을 가히 알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