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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부터 정돈하기.-안원전 담론 인연법줄과 마음자리

낙엽군자 2017. 3. 9. 20:51

 

 







안원전 담론73




















인연법줄과 마음자리- 비무탄로정난심(非無坦路正難心),진리의 패러독스와 달마의 가르침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큰 진리의 수레, 큰 인연 법줄의 수레에 올라타 초발 신심을 크고 확실하게 일으켜 열매맺어 주십사 하는 방법론이다.

어차피 속세의 일이 모두 연기론에 의해 상대적으로 존재하고 인연공덕에 의해 생명의 꽃을 피우고 윤회의 도덕률에 의해 열매맺는다면 마지막 남은 인연 법줄을 잘 찾아 큰 진리의 수레바퀴 위에 몸을 실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무엇이 큰 수레인지 알기가 어렵고 또 큰 수레가 있어도 왠지 전생의 겁기로 인해 작은 수레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 그래서 미륵부처님의 법줄을 붙들기가 그리 어려워 3생의 인연이 있어야 후천 개벽철에 미륵부처를 좇는 것이요,

만일 인연이 있는 자가 법줄을 만났다가 나가려 하면 신명이 등을 쳐서 잡아들이며 너는 이 곳을 떠나면 죽으리라 이르고 인연이 없는 자가 우연챦게 법줄을 만나면 신명이 너는 이 곳에 있을 자가 아니라고 이마를 내쳐 쫓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둘째의 내부적 요인이다.

진리가 눈앞에 있어도 자신의 아상과 아집이 물상과 본질을 굽어지게 만들어 멀쩡한 탄탄대로마저 굽어진 것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마음 한번 거두어 잡아들여 올바로 정심(正心)하고 일심(一心)하기가 너무나 힘들고 죽기보다 힘들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불교의 소승이 그랬고 유가의 수기치인(修己治人)과 심즉리(心卽理)가 그랬듯 마음공부를 최상에 두었다.

마음 하나 거두어 잡기도 힘든 판에 삼생에 인연이 없고 전생에 겁기가 많고 조상 대대로 적악지가의 핏줄을 타고 태어났다면 왠만한 법기(法器)일지라도 그러한 신명계적 핏줄의 인과응보와 윤회업보를 이기고 후천 문운으로 들어가기는 너무 어렵다.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천태학이 인간의 주관적 편견을 제거해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구하고 무아의 공관(空觀)을 외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희생제의까지 치룬 봉덕사의 신종을 만든 장인처럼 역사에 남을 만한 마스터피스를 만들고 싶어 한 한 조각가가 있었다.

숲 속에 수 백 년이 넘은 엄청난 재목감이 있어 새벽부터 괴나리봇짐을 하고 주먹밥 몇 개를 넣은 채 이른 새벽부터 산 넘고 물 건너 길을 나섰다.

몇 십리를 가다 발을 삐끗하고 삔 데다가 술 생각에 산언저리의 주막에 들렀다.

어린 시절의 벗을 만나 술 한 잔 하고 골패를 한다는 것이 여비마저 털리고 빚까지 졌다.

할 수 없이 며칠 동안 품팔이 보시를 해주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심심풀이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버릇이 되어 바야흐로 버릇은 불치의 숙명이 되고 운명이 되듯이 업이 쌓은 훈습(薰習)은 곳곳에서 암초가 되어 인간의 한 생애를 발목 잡는다.

가는 곳 들르는 주막마다 끼리끼리 만난다고 가는 곳마다 술꾼과 골패 꾼 만 만나 행보가 더디어진 장인은 마음을 굳게 먹고 늪과 호수, 절벽을 타고 넘으며 넘어지고 다치고 하며 우여곡절 끝에 문제의 재목에 당도했다.

그런데 겨우 베어 간다고 벤 것이 목재가 아니라 이파리 하나 쭈욱 훑은 것에 불과했다.

이 이야기는 진리를 향해 가는 길이 쉬워 보여도 그 만큼 자신의 참모습을 찾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고 있다.

가는 도중에 왜 여기에 이러고 있지? 하고 삶의 목표의식이 희미해지다가 종내에는 목표마저 상실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인가 하면 목표를 잡았다고 생각하면 겨우 잎사귀만 약간 훑고 마는 것이 바로 허무한 인생이다.

망양지탄(亡羊之歎)이란 말처럼 마음의 양이란 한번 잃으면 결코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막상 베어 오기로 한 대목은 쳐오지 못하고 겨우 목적지에 당도해 쳐 온 것이 아무 쓸모 없는  잔가지 내지 잎사귀 만 잔뜩 훑어 왔다.

그럼 과연 누가 빈 껍데기 잎사귀만 훑게 만들었는가.  그건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시킨 것도 아니므로 그 누구의 책임도 결코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각종 행동양식에 있어 훈습(薰習)의 주인인 자기 마음자리 하나  스스로  건사하지 못한 전적인 자기 책임이다.

탄탄대로가 자기 눈앞에 있어도 마음하나 거두어들이지 못해 땅 도깨비 같은 무명의 안경을 쓰고 옆길로 새어 빠져나갔으니 바로 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마음자리 한번 잃어버릴 때마다 선지식이나 대선사가 이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마음의 보약으로 처방해 준 것이 바로 이를 시정하는 방편의 기술인 선교(善巧)였던 것이고

선교는 바로 꿩 잡는 게 매라는 격언이 시사하듯이 바로 방편의 입장에 서 있던 것이다.

꿩 잡는게 매라는 말을 보면 참으로 심오하고도 함축적인 뜻이 들어있다.

꿩 잡는 게 매라. 이 말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시켜준다는 의미에서 본령만 잡으면 지엽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 일종의 성취원리를 전해주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상극의 천적인 필요조건을 말하고 있다.

먹이사슬의 아킬레스관계는 1에서 2로 2는 3으로 끝없이 펼쳐지듯이 또 하나의 거짓말은 새로운 거짓말을 낳고 그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듯이 1이라는 진리는 2의 보완을 필요로 하고 2의 진리는 필경 3을 끌어다 설명해야 한다.

이처럼 마치 괴델의 「결정 불가능성 정리」 또는 「불완전성의 정리」를 생각하게 하듯이 방편상의 가르침이라는 일환으로 꼬리에 꼬리를 문 말이 바로 팔만대장경처럼 불교를 엿가래 늘어나듯이 늘어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아하, 거짓말도 거짓말 자체로 거짓말을 증명할 수 없듯이 진리도 진리 스스로는 진리를 증명하지 못한다.

이 것이 바로 동방삭이의 궤변이자 모순이며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이 리샤르의 패러독스라든가 괴델의 정리다. 그리하여 대 철인은 말한다.

팔만대장경을 한 글자로 줄이면 '공(空)'이라는 한 글자뿐이라고. 생각해 보라. 지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 바로 성인인데, 그러한 성인들조차도 진리를 진리의 말로 증명할 수 없어서 시끄러울 정도로 말을 제일 많이 했던 사실을.

그러다 보니 패러독스의 모순율이 오히려 진리의 정곡을 찌르고 대강을 아우를 때가 많다.

가령 노자가 말하는 천지는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초개처럼 버려두고(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추구;짚으로 만든 개),  성인은 어질지 않아서 백성을 초개처럼 버려둔다(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고 했다.

또 하늘과 땅 사이는 그 커다란 풀무와 같으니(天地之間其猶  乎) 텅비어 끝남이 없고 움직이면 만물이 쏟아져 나온다(虛而不屈,動而愈出)고 했다.

이럴 때 과연 인으로 가득찬 천지가 과연 불인하여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초개(草芥)로 여기어 내 팽개치고 인(仁)으로 가득찬 성인이 과연 불인하여 백성을 초개(草芥)로 여기어 내팽개칠까?

우주 대자연은 불역의 법칙으로 변화해 나아가되(변역) 그 법칙 위에 몸을 싣고 스스로 유유자적하니 이것이 바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며

이를 닮은 성인 또한 만물을 이루면서도 스스로 공적을 자랑하지도 차지하려고도 관여하려고도 하지 않음에 영원히 그 공덕을 가질 수 있고 생명 또한 무한하기에 간여하지 않는 것뿐이다.

같은 자식인 선과 악이 싸울 때 스스로의 우주 도덕률과 인과응보의 윤회와 연기에 스스로 맡긴 것뿐이다.

그리하여 노자는 상덕은 부덕하여 오히려 유덕하고(上德不德, 是以有德),

하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므로 오히려 무덕하다(下德不失德, 是以無德)고 하고

상덕은 인위적인 것이 없이 무위하여 인위적인 것이 없고(上德無爲而無以爲)

하덕은 억지로 갖추려 하여 인위적이라 말하고 있다(下德爲之而有以爲 上人爲之而有以爲).

진리의 패러독스는 대개 이와 같은 것이다.

한번은 노나라 정 공이 한마디(一言)로써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때 공자는 대답하기에 앞서 말이란 원래 그렇게 한마디로 뜻하는 바를 정확히 찔러 다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한다.(言不可以若是其幾也)

따라서 성인들도 나름대로 최고의 경제적인 방법을 찾은 것이 바로 방편의 입장에 서 있는 매크로 적인 우화나 촌철살인의 경구를 종종 사용한 것이다.

모든 성자들이 수많은 각종 우화를 이용해 우매한 대중에게 진리의 메스를 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매크로 적인 방법은 우회적이면서 두리뭉실하다. 어쩌면 비 선형 다차원 방정식인 복잡 계의 대우주 자연과 윤회의 시공을 넘나들며 사는 인생사를 설명하는 데 마이크로 적인 방법을 써서 설명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초로(草露)와 같은 하루살이 대중들이 1에서 무한대까지 펼쳐 보이는 성인의 원맨쇼를 다 지켜본다는 것은 숨 넘어가는 짓으로 원래부터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이 태백의 「도리원서」에 부천지자(夫天地者)는 만물지역려(萬物之逆旅)요 광음자(光陰者)는 백대지과객(百代之過客)이라는 말이 있다.

즉, 무릇 천지라 하는 것은 만물이 잠시 쉬었다 가는 여관과 같은 것이요, 세월이라 하는 것은 영겁을 스쳐 지나가는 길손과 같은 것이다.

천지만물도 세월도 모두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같이 유한하거늘 그보다도 더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임에야 성인의 원맨쇼를 보네 못 보네 논하는 것 자체가 언급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본시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君子之德風) 소인의 덕은 풀잎과 같아(小人之德草), 바람이 불면 풀잎은 거기에 따라 몸을 세워 춤을 추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아기는 사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10여 분 밖에 되지 않는다.  인간은 우주의 어린 아기와 같아서 어렵고 긴 가르침을 모두 다 경청해 듣기에는 집중력이 모자란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같이 눈 깜짝하는 동안 꿈 한번 꾸고 마는 허망한 우리의 인생은 장황하게 풀어헤치는 성인들의 장구한 말씀을 모두 다 지키고 앉아 집중해 듣기에는 너무나 집중력이 모자란 철부지 아기이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에서 베짱이는 열심히 일하는 개미 옆에서 여름 내내 깽깽이 만 켜고 게으름을 펴다가 막상 겨울이 되면 개미들에게 구걸하러 가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베짱이는 매미와 똑같이 여름 한 철만 살고 장막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겨울철까지는 살 수 없는 비운의 존재이다.

그들은 인류보다도 먼저 농사를 짓고 술을 빚은 개미처럼 열심히 일 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여름 한 철 안으로 짝짓기를 해서 번식을 끝내야 하므로 목숨을 걸고 울어대는 매미와 똑같이 짝을 찾는 연주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

우화 내용과는 정 반대로 패러다임을 바꾸어 베짱이 입장에서 생각하면 베짱이는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개미보다도 더 열심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유한한 삶도 실상 이들과 크게 다를 리 없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성인이 마이크로적인 방법으로 자잘하게 가르침을 늘어놓을 리 없다.

비록 말이란 원래 그렇게 한마디로 뜻하는 바를 정확히 찔러 다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言不可以若是其幾也) 해도 중용에 천지지도(天地之道)는 가일언이진야(可一言而盡也)라 한 것처럼 천지의 도는 가히 한마디로도 다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물상 너머에 존재하는 관념의 세계까지 담보해 주는 자연어는 자연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자연어의 논리인 상수철학에 의한 고차원적 우주 해석학(주역, 정역, 풍수지리 및 사주철학 등이 여기 속하겠지)과 고등수학을 받아들이기 힘든 중생들에게 보다 다양하고도 쉬운 메타포(Metaphor:隱喩)라는 메뉴로

한 단계 낮추어 친절히 써빙 해 줌으로써 핵심을 전달해 주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효과적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유, 불, 선, 기독의 공자, 석가, 노자, 예수 및 그 외의 장자라든가, 달마대사를 비롯해 6조 혜능에 이르기까지 마하가섭의 도통맥을 이어받은 선가의 고승대덕들 역시

대국적 차원의 우화와 각종 선문답을 통해 매크로적인 진리의 방망이를 크게 휘둘러 제자들의 머리를 굵직하고 확연하게 돈오시킨 것이다.

남종선의 돈오(頓悟) 견성(見性)의 사상으로  일체법이 무상무념임을 밝힌 혜능의 게송 "깨달음에는 본디부터 나무가 없고 맑은 거울도 역시 바탕이 아니다.

본래 활짝 열려 아무것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나 티끌이 있을손가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태(明鏡亦非台) 본래무일물하처유진애(本來無一物何處有塵埃))"라는 일구라든가

아니면 달마조사가 2대 조사인 혜가에게 가르침을 준 다음의 우화성 가르침은 견성의 진리의 몽둥이였다.

제자 혜가(慧可)가 물었다 .

" 불도를 얻고자 하면 어떤 법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하겠습니까 ?"

달마스님은 대답했다 ."오직 마음을 관(觀)하는 법이 모든 행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이 법이 가장 간결하고 요긴하다."

" 어째서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거두어들인다 하십니까 ?"

"마음이란 모든 것(萬法)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을 다 갖추는 것이다 .

이를테면 여기 큰 나무가 있다고 하자. 그 나무의 가지나 잎이나 열매는 모두 뿌리가 근본이다. 나무를 가꾸는 사람은 뿌리를 북돋을 것이고, 나무를 베고자 하는 사람도 그 뿌리를 베어야 할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마음을 알고 도를 닦으면 많은 공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이룰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수도한다면 부질없이 헛된 공만 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마음 밖에 따로 구할 도가 있다면 옳지 않은 말이다."

"어떻게 마음을 관하는 것이 마음을 아는 것이라 하십니까 ?"  

"보살이 반야바라밀다 (般若波羅蜜多)를 행할 때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본래 공하여 실체가 없음을 밝게 하며, 또 자기 마음을 쓰는 데 두 가지 차별이 있음을 분명히 본다. 두 가지란 맑은 마음(淨心)과 물든 마음(染心)이다.

맑은 마음이란 번뇌가 없는 진여(眞如) 의 마음이요, 물든 마음이란 번뇌가 있는 무명(無明)의 마음이다.

이 두 마음은 본래부터 갖추어 있어 비록 인연 따라 화합하기는 하지만 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맑은 마음은 항상 착한 인연을 즐기고, 물든 마음은 악한 업을 생각한다.

만약 진여의 마음을 깨쳐 그것이 물들거나 때묻지 않는 것인 줄 깨달으면 이 사람은 성인이다. 그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물든 마음을 따라 악한 짓을 하면 온갖 괴로움과 어둠이 몸에 감기고 덮이게 되니 이를 범부라 한다 .범부는 항상 삼계(三界) 에 빠져 갖가지 괴로움을 받으니, 그것은 물든 마음으로 말미암아 진여의 마음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
십지경(十地經)에 말하기를

'중생의 몸 가운데 금강석처럼 굳은 불성(佛性)이 있어 해와 같이 밝고 원만하며 광대무변 하지만, 오온(五蘊)의 검은 구름에 덮여 마치 항아리 속에 있는 불빛이 밖을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였고,

또 열반경 (涅槃經) 에 말하기를 '일체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으나 무명에 덮여서 해탈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성이란 깨침이다. 스스로 깨치고 깨친 지혜가 밝아 번뇌에서 벗어나면 이것이 해탈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善)은 깨침이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깨침이 근본이 되어 모든 공덕의 나무가 무성하고 열반의 열매가 여문다. 이와 같이 마음을 관하는 것을 마음을 알았다고 한다."

"진여 불성(眞如佛性)의 모든 공덕은 깨침이 근본이다는 것은 알았으나 무명인 마음과 온갖 악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습니까 ?"

"무명인 마음에는 팔만 사천의 번뇌와 정욕이 있어 악한 것들이 한량없으나 그 모두는 삼독 (三毒)이 근본이다. 삼독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인데, 이 삼독심에는 저절로 모든 악한 것이 갖추어져 있다.

마치 큰 나무가 뿌리는 하나이나 가지는 수없이 많은 것처럼, 삼독의 뿌리는 하나이지만 그 속에 한량없이 많은 악업이 있어 무엇으로 비교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삼독은 본체에서는 하나이나 저절로 삼독이 되어 이것이 육근(六根)에 작용하면 육적 (六賊)이 된다 .

육적은 곧 육식(六識)이다. 육식이 육근을 드나들며 온갖 대상에 탐착심을 일으키므로 악업을 지어 진여를 가리게된다 .그러므로 육적이라 이름한다 .

중생들은 이 삼독과 육적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생사의 구렁에 빠져 육도 (六途)에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받는다.

이를테면 강물이 원래 조그마한 샘물에서 시작하여 끊이지 않고 흐르면 시내를 이루고 마침내는 만경 창파를 이루게 되나, 어떤 사람이 그 물줄기의 근원을 끊으면 모든 흐름이 다 쉬게된다.
이와 같이 해탈을 구하는 사람도 삼독을 돌이켜 삼취정계(三聚淨戒) 를 이루고 , 육적을 돌이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이루면 저절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삼독과 육적이 광대 무변한데 마음만을 보고 어떻게 한없는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삼계에 태어남은 오로지 마음으로 되는 것이니 만약 마음을 깨달으면 삼계에 있으면서 곧 삼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삼계라는 것은 곧 삼독이다.

탐내는 마음이 욕계(欲界)가 되고, 성내는 마음이 색계(色界)가 되며,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無色界)가 된다.

삼독심이 갖가지 악을 짓고 맺어 업을 이루고 육도에 윤회하게 되니 이것을 삼계라 한다.

또 삼독이 짓는 무겁고 가벼운 업을 따라 과보를 받는 것도 같지 않아 여섯 곳으로 나뉘게 되니 이것을 육도라 한다. 그러나 악업은 오로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거둬 그릇되고 악한 것을 버리면 삼계와 육도를 윤회하는 괴로움은 저절로 소멸되고,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니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달마조사가 말했다. "삼계가 어지럽게 일어나는 것은 모두 한 마음으로 돌아가니 전불(前佛) 후불(後佛)이 이심 전심하시고 문자를 세우지 않으셨다."

제자가 물었다. "만약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습니까?"

"네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네 마음이며, 내가 너에게 대답하는 이것이 내 마음이다. 만약 내가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 너에게 대답하겠으며, 네가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 나에게 물을 수 있겠느냐.

나에게 묻는 것이 곧 너의 마음이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지금까지 전해 오는 모든 말과 행동과 장소와 시간이 다 네 본심이며 너의 본분이니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도 이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버리고 따로 부처를 구할 수 없으며, 이 마음을 떠나서 보리나 열반을 찾는다면 옳지 않다. 자성(自性)은 진실하여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며, 법은 곧 마음이니 자기 마음 이것이 보리요 열반이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나 보리가 따로 있다면 옳지 않으니 마음 밖에 부처와 보리가 어디에 있다고 하더냐.

비유해 말하면,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는다고 할 때 허공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 모양이 없으니 잡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누구나 부처를 찾고자 하면 반드시 견성(見性)을 해야 한다.

만약 견성하지 못했으면 염불을 하거나 경을 외우거나 계(戒)를 지켜도 별로 이익이 없다.

염불하면 인과를 얻고, 경을 외우면 총명을 얻고, 계를 가지면 천상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된 과보를 얻기는 하나 부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밝게 깨닫지 못했으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생사의 근본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선지식은 견성한 사람이니 견성하지 못했으면 선지식이라 할 수 없다. 비록 대장경을 설하더라도 역시 생사를 면치 못해 삼계에 윤회하며 괴로움을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

옛날 선성(善星)비구가 대장경을 다 외웠어도 윤회를 면치 못한 것은 견성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선성 비구도 그러했는데, 요즘 사람들이 경론(經論)을 서너 권 배워 가지고 불법으로 삼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진실로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면 한가롭게 문서나 외워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으나, 만약 알지 못한다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가 간절하게 힘써 구해야 한다.

생사가 큰 일이니 헛되이 지내지 않도록 하여라. 돌이켜 보아라. 비록 보배가 산과 같이 쌓이고 권속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다 하더라도 눈을 뜨면 보이지만 눈을 감고는 볼 수 없다.

유위법(有爲法)은 모두 꿈과 같으며 꼭둑각시와 같은 것이다. 스승을 찾아가라. 급히 스승을 구하지 않으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된다.

불성은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지만, 스승을 인연하지 않고는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이니 스승 없이 깨친 자는 만의 하나도 드물다.

검고 흰 것도 분별하지 못하면서 망녕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다고 하면, 이것은 부처를 비방하고 법을 어지럽히는 짓이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설법하기를 비 오듯이 하더라도 모두가 마군의 말이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 스승은 마왕이요 제자는 마왕의 권속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의 지도로 인해 생사 고해에 떨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견성하면 부처요, 견성하지 못하면 중생이다.

그러나 불성이 중생의 성품을 떠나지 않았다. 중생의 성품을 떠나 따로 불성이 있다면 부처가 이제 어느 곳에 있겠느냐. 중생의 성품이 곧 불성인 것이다.
성품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는 곧 성품이니, 이 성품을 버리고 따로 부처가 없으며 부처 밖에 성품도 없다." 제자가 물었다.

"견성(見性)하지 못했더라도 염불하고 경을 외우며 보시하고 계를 지녀 부지런히 복된 일을 지으면 성불(成佛)하지 않겠습니까?"
"못한다!" "어째서 못합니까?"

"조그마한 법이라도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위법이며 인과(因果)에 얽매인 법이므로 과보를 받고 윤회를 받게 될 것이다. 생사도 면치 못했으면서 어떻게 성불할 수 있겠느냐. 성불은 반드시 먼저 견성을 해야한다. 견성하지 못하면 인과를 얻는 법 같은 것도 모두가 외도들의 법이다. 법을 구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외도법을 배우겠느냐. 또 어떤 사람이 인과를 무시하고 부지런히 악한 업을 지으면서 망녕되이 말하기를 '본래 공한 것이다. 악한 일을 하더라도 허물이 없다'고 하면 그는 무간 지옥에 떨어져 영영 나올 기약이 없을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찌 소견을 가지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