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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통宗統.증산교 대법사-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교권탈취와 역사왜곡의 총정리

낙엽군자 2017. 3. 7.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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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향수
                                  
증산교 대법사-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교권탈취와 역사왜곡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교권탈취와 역사왜곡

해방 이후 운산 안흥찬 총사수가 일으킨 2변을 이상호 이정립이 조직을 탈취해 판갈이 한 후 <증산교사>를 통해 왜곡한 부분. 해방이후 동아흥산사 사건으로 60이 다되어 늙고 맹인인 된 이상호는 해방과 더불어 출옥해 정읍에 방한칸을 얻어 머물고 있다가 안운산 총사수를 만나 총사수의 직계간부 배동찬의 배려로 용화동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정립은 45년 7월 대구에서 출감해 서울 동생 이순탁 집에 있다가 서울 합정동 최위석 집에서 만난 안운산 총사수를 만나 역시 명을 받은 배동찬의 소개로 결혼을 하게 되어 용화동에서 신혼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관계로 24세의 젊은 총사수는 이정립과 가깝게 지내면서 6.25당시 한강철교가 끊어지면서 이들 부부와 이정립 처의 동생 장상달 등과 함께 한강을 건너 온양까지 차와 도보로 운명을 같이 하기도 한다.
 
배동찬, 김종렬 등 2변 교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안흥찬 총사수의 직계연비로 안흥찬 총사수의 명을 받들어 집행 된 것으로 이정립은 정작 그 핵심인 안흥찬이란 인물은 쏙 빼놓고 기술했다. 최위석 집에서 치성드린 인물이 수 십 여명 참여했음에도 이정립이 <증산교사>에 간부만 백 수십명 기록한 것도 가공된 허위며 조직도 모두 이정립이 조작한 명백한 거짓이다.(안운산 총사수 증언)  
 
  

안운산 총사수와 이상호의 조직 강탈의 내막!! 

 1945. 8.15해방 이후 초복살림(소위 2변) 개척 후 이상호 이정립과 악수한  당시의 안흥찬 총사수-안운산 성도사聖道師님


 

-조직을 강탈한 이상호 형제의 간부직도 단체 개창자인 실권자 안운산 총사수가 임시조직해 임명한 명예직이었다.!! 
젊은 총사수 안 흥찬은 이상호 형제를 처음만나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 용화동에 거처를 마련해주고(이 상호), 대구감옥에서 갓 나온 적수공권의 50대 노총각을 장가도 보내줍니다(이정립) 그리고 용화동에 기거하는 장님 이 상호에게 용화동 본부에 얼굴 디밀고 대순전경의 저자로 당시 연배가 많은 신도들의 얼굴마담 역할이나 하기를 바라고 포교실무에만 모든 것을 겁니다.
 
그리하여 비록 그들에게 임명한 명예직이지만 조직적으로 임시 설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때그때 넘깁니다. 그러나 이미 태모님 시절부터 시대일보 사건을 위시 보천교 혁신운동으로 차 교주를 배신하고 격렬히 내치려 한 사건, 김형렬 성도 미륵불교 시절 김 형렬 성도를 기망하고 경전 자료만 취합하고 배신하고 나간 일, 동화교 통합교단 시절 태모님을 철저히 격리 고립시키고 태모님 수석 성도 고 민환 성도를 고립시켜 죽이려고 해 야밤에 도망 가게 한 경력 등을 거치며 이미 흉악함으로 잔뼈가 굵은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순수했던 젊은 총사수의 바램에 절대로 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권위성 하나로 집요하고도 끈질긴 갖가지 방법으로 당시 젊은 20대 총사수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조직을 철저히 자기 사람들로 만들며 수없이 가다듬고 재조직해  단체의 실권을 장악하고 젊은 총사수를 비밀리에 살해해 제거하도록 지령을 내립니다.
 
이 정립은 당시 안운산(흥찬) 총사수가 개창한 2변 조직을 이상호 이정립 형제 위주로 바꾼 위조 자료를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자료의 허위를 증언할 생존자들이 많아 자신 생전에 공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 가짜 자료를 가진 채 60년대 중반 모두 선화하고 그 아들 이영옥이 교직에 있다가 은퇴하여 이 자료를 모친에게 받아 증산교사라는 이름으로 발행되고 후일 홍 범초는 위조된 이 책의 2변 조직 내용을 배경으로 일개 부장으로 격하된 젊은 총사수의 존재를 이정립에 이어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며 공격하게 됩니다.
 
심지어 총사수가 어린애 기르듯 기른 황 원택과 더불어 이상호 이정립 사후 용화동의 종권을 차지하고 20년 만에 들른 자신들의 연원의 총사수 큰 스승에게 자신들을 지도자로 받들어 재입도하라는 폭언과 폭력행사까지 합니다. -





*후일 6.25 전쟁 와중에 충남 부여 이 평국 신도 집에서 안흥찬 총사수 살해 미수로 현장에서 잡힌 이상호 형제가 보낸 살인청부 자객 박복만은 과연 두 형제 중에 누가 보낸 것일까요. 그리고 끝까지 젊은 총사수 안흥찬을 죽이려 했던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박복만은 안운산 태사부님이 얼굴을 알아보고 다정하게 여기에 왠일인가 하고 물어보는 것으로 보아 본래 안운산 태사부님이 충청도에 개척할 당시 들어온 신도임이 분명하지만 나중에 이상호 이정립 형제 위주로 조직 전체를 판갈이 하면서 신도들이 이상호 이정립에게 집중되자 이들 형제는 연원조직에서 젊은 총사수의 나이많은 도제들을 총사수보다 높은 간부직에 올리고 전국적으로 아주 교묘하고도 지속적으로 젊은 총사수를 매도하고 매타도어로 이간시킵니다. 이에 대해 안운산 總師首 말씀을 들어보면,

“내가 (54년 이후로) 단체에서 손을 뗀 이후에도 서천읍에 사는 김창배(金昌培), 최낙홍(崔落鴻) 등을 시켜 사기하다 철창에 갔다 병들어 누어있다는, 등으로 매타도어시키는데 사람을 모욕해도 그런 모욕을 할 수가 없다. 이상호 형제가 전국의 간부마다 다 내세워 불명예적인 모욕과 모함 이간질을 시켰다.”

 그렇다면 형인 청음 이 상호씨는 왜 그렇게 끈질기게 전국의 모든 간부를 내세워 젊은 총사수의 연원 신도들을 이간하고 모함하여 모욕을 주어 내치려 했을까. 청음은 왜 젊은 총사수가 문왕 유리도수인 말점도 20년 귀양 도수를 명분으로 54년 이후로 소위 자신이 만든 단체를 떠나 은퇴를 선언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비밀지령 내려 청부 암살대로 살해하려 했을까?
  청음과 남주는 이에 대해 해명하지 않고 자신들의 야망을 이루지 못한 채 선화해서 알 수 없지만 후일 당시 이름 안 흥찬(安興燦) 총사수(總師首)가 언급한 다음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읍니다.
 
 
신앙촌 건립을 주장한 이상호

“당시 이 상호씨 왈, 차 경석 성도 태모님 떼어내듯이 ...천사님 금산도득한다 했는데 다 팔아 용화동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여 용화동 신앙촌화 유도를 주장했다. 용화동에 인성을 쌓고 꽃밭이 이루어지니 여기가 기지니 전 재산을 팔아가지고 와야 한다고 틈만 나면 신도들을 설득했다.
나는 정당한 사람이라, 그러지 마라. 바르게 해라. 나는 내가 포교한 사람이고 그들 안녕질서를 책임 질 사람이고 당신들은 곧 죽을 사람이다. 내 몸뚱이 내가 가는 곳이 곧 본부다. 사람이 모이니 그곳을 본부로 정했을 뿐이다.”
“조직을 개창해 만든 나를 따돌리고 조직을 거머쥔 그 사람들의 재주도 비상하다면 비상하거니와 실제로는 당시 신도들이 이상호 이정립에게로 복종해 들어가 나를 등지고 지금까지 나에게 연락하는 신도들이 단 한 명도 없다.”
 

당시 해방이후 판을 개창한 안 흥찬 총사수의 조직을 판갈이해 인수한 야심찬 장님 이 상호는 연원의 실제 지도자인 20대의 안 흥찬 총사수가 지금은 어려서 교주에 대한 욕심이 없지만 불원간에 세월이 지나면 조직을 빼앗길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여깁니다.

이상호 형제는 자신들이 이미 인생 황혼기로 접어들었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을 터라 이러한 다급한 상황판단은 그들로 하여금 젊은 지도자를 제거해 후환을 없애는 쪽으로 몰고 가게 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명실상부한 교주로서의 지도자 위치를 원했던 간부들과 실무진으로 포교를 통해 우선 조직을 키우려 했던 젊은 총사수의 간극을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이용했고 지도자를 선택해야 했던 당시 대부분의 연로한 신도들은 거개가 악명은 높았지만 경전편찬으로 나름 권위는 있었던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휘하에 자진 굴복해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 형제의 역할이 이선충자도 성공하고 이악충자도 성공하니 결국은 역사에 성공자의 이름으로 남겠지만 이선충자(以善充者) 역일지 이악충자(以惡充者) 역일지는 후일 역사에서 판가름 날 것입니다.

참조,,당시, 총사수 안운산 성도사님의 생각


 “(김종렬)
선생님 이게 제가 보니 임술이, 임술생이 매듭짓는데 아무리 보아도  선생님이 임술생이시고 또 나의 선생님이시고, 그러니 이게 이 원호하고 이 상호씨 부인하고 싸우는게 못되어 먹었고 또 우리가 봐도 못되어 먹었고 여자가 저 지경이니 이상호 이정립이 거치적거리고 앉아서 저러고나 있고 그러지 말고 선생님, 나앉으십시오, 우리가 떠맬테니.... 우리끼리 그래야 부작용도 안 생길테고 그렇게 하십시오.

(안흥찬 총사수)

그런데 나는 사실이 그려. 무슨 교주를 하고 그게 뭐 그런 게 없는 사람이여. 상제님 사업해야 하니 그런 거지. 나는 무슨 감투욕이고 본래  그런게 없는 사람여. 그래서 나는 그런 걸 원하들 않지 않느냐. 그러면(교주하면) 일선에 나서서 일도 못 할테고 말여, 그러니께, 나는 그런 짐을 걸머지고 싶지도 않고. 나는 필요치 않다고... 내가 나오고 나서 우리나라에 임술교가 있어. 임술교 홍 성렬이가 <범증산교사>에 쓴 데 보면 임술교가 나와. 그게 김종렬이가 나를 사모하고 그 사람이 공부하면서 여러 해를 두고 봐야 임술이란게 나온다네. 그래서 이 세상 매듭은 임술생이 매듭을 짓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교 이름을 내가 말을 안들으니께 임술교를 만든거여. 임술교 교주가 김 종렬여.”-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배동찬, 김종렬 신도는 철저히 안운산 총사수 사람이다. 그러나 조직의 실체는 물론 안운산 총사수가 내세워 도와준 이들 인물에 대한 내막은 모두 삭제해 그 공을 가로챘다. 해방이후 안운산 총사수와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손잡으며 두 형제가 힘을 모아 안운산을 조직적으로 고립시키며 조직을 탈취하고 끊임없이 살해하려 한 시도는 그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은 증언으로 역설적으로 뒷받침할 뿐이다.

-2변에 이상호 형제는 실권이 전혀 없었고 포교도 전혀 한 적이 없다.
은행동  장기덕 사무실에서 나와 MBC(충렬탑과 성모여고 사이) 있는데로 와서 도장을 구해 <증산교회>라고 써 붙였어. 홍 성렬이란 놈이 증산교 대전지부라 써 붙였다고 한다드냐 트집도 잡고 있는디 증산교란 게 내가 한 거지 이 상호 이 정립이 한 것이 아니다 이거여. 사람도 내 사람이고 , 이름도 내가 만든거고 말여. 증산교라고 한 게 이 대한민국에서  본래 나여. 이 상호 이 정립이가 했어? 그건 정책적으로 말여 강탈해서 뺏은 거지. 뺏은 겨.  

묶어서 얘기하면. 나는 뺏겼고 못나서. 장님에게 뺏겼어. 장님한티. 그러니 눈 먼 장님이 말여 나같이 사나운 사람을 말여 케이오시킬 줄을, 내가 케이오 당할 줄을 그걸 누가 알았나. 참말로 내가 아무리 큰 소리 치고 워찌고 해야 나는 이 상호한테는 두 손 들었어. 허다 허다 도리가 없어서,  야 참 나...지금까지도 허탈해서 말여, 저 쥐 새끼 같은 눈먼 늙은 놈한테 말여. 내가 전국적으로 참 세상이 넓으냐 좁으냐 하고 그 큰 일을 해가지구서 다 뺏겼다. 
그러면, 이상호 이정립의 정책도 장하려니와 사실은 당시 신도들이 부응을 해 주었어. 한 놈도 나 찾아와서 용화동으로 다 팔아서 들어오라 하는디 가야 옳읍니까 하는 놈을 지금 이 시간까지 한 놈을 보지 못했고. 내가 집에 와서 누웠는디(20년 말점도 은거) 날 찾아오는 놈 한 놈 없었고. 

그러구서 허튼 신도만 50명도 찾아오고 뭐 30명도 찾아오고 밥만 삶아내느라고 죽을 고생하고 말여. 그러구서 간부진에 있다는 자들은 대가리도 안 디밀고. 그리고 몰래 돈도 이상호 이정립에게 갖다 바치고. 나는 인패 같은 거 준비 하려고 하는디 속으로 이상호 이정립에게 다 팔아먹고. 다 팔아먹어버려 돈 받고. 이러한 얘기를 참 다 할 수도 없고. 

그럼 교체조직이 어떻게 되는냐 하면  홍성렬이 가 뭘 어떻게 해 가지고 없는 체제까지를 만들어 거기다 어쩌구 그러는디  내가 수화금목토에 내가 수주(水主)로 조직을 했지만은  내가 그 자리서 그건 미리 사전에 조직을 하기 이전부터도 얘기한 거고. 이건 다만 조직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지만 나는 이 체제를 내가 할 수 없으니께, 우선 김 종렬이 같은 사람 아니 그게 내 사람이고 내 신돈디 말여 내가 그 사람하고 동렬에서 일할 수도 없구.
당신들(이상호 형제) 내 솔직한 얘긴디 말여. 아니 배주고 속담에 뱃속 빌어먹는다는 말도 있고. 또한 내가 엄연히 보천교 신도다 말여,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걸로, 확실히는 모르지만 이 치복씨 계통이고, 헌디 내가 당신 신도가 아녀. 내가 진리도 당신보다 더 알고. 내가 지식도 당신보다 더 많은 사람이고 말여. 당신이 대순전경을 썼지마는 나만큼 그 진리를 물러.  그래가면서 그걸 조직을 했는디 조직체가 수화금목토 동서남북 춘하추동 이렇게 하구서 그 밑으로는 무슨 24절 28수 64괘 이런 등 등으로 짰다 이 말여. 시간관계로 그걸 다 자세히는 못하것는디. 그건 아주 동양 도덕으로서는 말여, 판짜는 식이 우주원리를 가지고 그렇게 짜는 방법밖에 없다 말여. 그거밖에는 없다. 

 그러면 토주(土主)가 이 상호 씨고, 나는 수주(水主)고, 서울에 있는 최 위석이는 금주(金主)고, 저 밀양의 이 원호가 목주(木主)고, 여기 김 종렬이가  화주(火主)고, 그렇게  됐는디. 나는 수주(水主)라는 것을 반려 했는디, 뭐 그 임첩을 말여 수리  안 하니께. 하건 말건 말여, 실권이 내게 있는 거고. 일하는 사람도 나 하나고. 나 하나지. 
그건 뭐 돈 천 억 백 조를 줘도 대한민국 내에서 나와서 일하라고 해도 없어. 사람은 없으면 그만 아녀. 그건 돈  주고 맨들지도 못하쟎어. 지구를 다 줘도 사람이 없는데 지구를 주면 사람이 만들어지나? 그건 일본 시대부터 세상을 종횡무진하고 다녀봐야 내 위치에서 나 같은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어. 그런 사람이 내가 증산교에 끼여 들어가지고 말여 일을 하는디, 나를 어떻게 혀.

그런디, 이 정립이하고 서울에 가면 최 규석이라고 늙은이 있어 그때두 그 늙은이 아마 근 70였어. 옛날 사람들의 60이라고 하면 지금부터 30년인가 40년 전이라고 하면 그건 지금 90늙은이 턱 도 더 되는겨. 얘기가 되나. 그 거치적 대는 사람들이 사성(司成)이라고 해서 토주(土主:이상호) 밑에 사성이라고 해서 맡을 사(司)  이룰 성(成)이라고 해서 이 정립(李正立)이가 사성이고 최 규석씨가 사성(司成)이고 그렇게 사성(司成)이 둘 있어.  

그렇다고 해서, 아니 그 사람들이 뭐 하는 것도 아니고 말여. 그러구서 홍 성렬이가 그 새에다 무슨 뭐시 조직체가하나 있었다고 그 참 머리도 묘하데. 없는 것도 만들어서 천지공사 편에 그걸 끼어 넣드라고 응?  


                

< 2변 도운 121(1991).3.7>
*6.25를 맞이하면서 서울서 한강다리 끊은 뒤에 내가 서울에 있으면서 내 동생이 전농동에 서울 시립대학이 처음 생길 때여. 동생과 처남이 입학을 할때여 입학해서 등록금까지 다 냈을 때여. 그러구 나는 뭐 상제님 사업하러 여기 저기 다니는 사람이니께. 그 때 마침 서울에 있었구. 그래서 같이 말여. 이 정립 씨 그 누구누구 그 처되는 사람 누구 여럿이 일행이 말여. 저 김 종영이라고 말여. 보천교 담당하던 형사라고 있어, 호는 근하라고. 모두 휩싸여서 수원까지 걸어와 가지고, 그래서 오산서부터 차를 탔어. 그래가지고 온양온천까지 와서 머물러 있는디,

이정립이 처남 장상달이라고 있어. 서로 상자에 통달 달자 장상달인디걔 집이 울진여 울진. 헌디 걔를 내던져두고 가, 이정립이가. 제 처남이고 여자에게는 제 친정 동생인디. 거기다 떼 내던지고 너는 너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저 연놈이 말여 사람도 아니고 말여. 제 처남이요 어린앤디그게 그때 아마 서울서 고등학교 다녔던지 아마 그렇게 됐나봐. 헌디 그걸 어떻게 떼내 버리고 가나 제 동생 제 처남을. 그래서 헐 수 없어서 내가 더불고 집에 들어왔어, 내가 더불고서. 그랬는데, 우리 어머니가 위암에 걸려서 말여. 나는 우리 어머니가 위암 때문에 말여, 참 양방에 무슨 방법이 없나 해서 그렁저렁해서 서울을 갔을 때다 이 말여상제님 사업도 사업이고. 그러니께 나는 어디로 갈 수가 없쟎어, 집으로 가야지 말여. 자식 된 도리에 어머니가 말이여 중병에 처했는디



                                                   총사수가 50대 남주 이정립을 결혼시켜준 21세 장도(장옥) 여사

집에 들어오면서 내 아우, 처남, 장상달이 이정립 처남, 그렇게 떡 더불고 집에를 와서 보니께 그 숱한 얘기 다 못하지만 저 당진에서 이이영이 말여 저 지식 많다는 사람. 아니 이이영이가 무슨 지방에서 무얼 어떻게 잘못했간디 내 집으로 피난오고. 또 인천 경찰서 그 사찰계 말여 형사 하나가 김 상록이라고, 월미도 갔다가 보도연맹 200여명인가 300명 말여 총살시키고서가만히 내가 이 평생에 와서 친구 새긴 중에서 나를 가장 아껴주고 덕 있고 피난할 데가 어딘가 생각해 보니 나밖에 없더라네. 내 집에 왔어, 처자를 더불고서. 나밖에 없더라 이 말여. 그래서 피난민이 우글우글해.

그런디 이제 달포 후에 암투병중인 내 선비께서 돌아가셨어. 그래서 초상상제로서 장례모시고. 그런데 장례 모시기 전에 우리 어머니가 병중에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나 사는 동네 이름이 지사여. 지초 지()자 모래 사()자 지산(芝沙)디 그 지사 고개에서 너를 잡는다고. 또한 우리 집에 있는 김 상록이를 잡는다고, 형사를 집에 두었다고 말여. 그랬다고 사람들이 잔뜩 넘어온다 말여. 그런 꿈을 꾸었다고 내 선비께서 그려. 내 선비께서 영이 얼마나 밝았든지 이렇게 천서를 받아쓰고 그랬어, 천서. 공부해서 그렇게 주문 읽어서 그렇게 영이 밝으셨던 양반이고 그랬어.

그러자 조금 있으니께 어떤 기별이 오느냐 하면. 저 안 아무개 집에 경찰가족을 두었다. 그래서 그걸 잡아 올라고 한다고 말여. 곧 넘어온다 말여. 빨리 조치하라고 그래서 그 사람을 보고서 사분지 지여차 한디. 여기 있어서 나하고 같이 당하고 싶으면 여기 있고, 한 발짝이라도 가다가 죽구 싶으면 가구. 그건 자의에 맡기니께. 물론 내가 살고 싶으면 김 상록이를 내가 잡아서 주면 내가 산다. 허지만  나 살기 위해 가지구서 살겄다고 찾아온 사람을 내가 사람잡아줄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나는 차후문제고 하니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찾아봐라.

사태가 이러니 허면 내가 떠나면 안 형이 말여 대신 내 죄를 당하는디 그래도 괜챦으냐. , 그건 다음 문제 아니냐. 나야, 그건 그시 그시 말여 적절한대로 해야 될 거 아니냐. 허니께 가고 싶으면 가고, 여기 있고 싶으면 있고, 내가 구태여 내쫓든 않겄다. 허니께 자의에 맡기겄다. 그 소리가 떨어지니께, 신발도 안 신고 도망 가. 그래서 그렇게 하면 남들이 이상하게 보고 하니께, 신발 신고. 그리고 가다가 먹어야 할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 안 사람 보고서 쌀도 좀 퍼다 주고 말여, 숨도 좀 돌려 가지고 하라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보냈어. 보냈는디. 그 뒤에 그 사람은  잘 살고. 이제 인천 수복 뒤에 경찰노릇도 하고 그랬는디 그 사람이.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만났어. 뭐 세상은 그런 거 아녀. 그런디 이제 그런 때 사람을 봐. 내 선친께서 그러면 네가 당하지 않냐. 당해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 같으면 살기 위해서 말여 그 사람 잡아주겠습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뉴. 그러니께 내 선친께서 참말로, 참 난감하신 표정을 내 머릿속서 눈 속에서  떠오르고 그러는디.

그때에 그 이 정립이의 처남 되는 애가 내가 어떻게 소화하는 수가 없어서, 산에 가서 저 삽정이라도 따는 척 하구 이렇게 저렇게 해서 저녁이면 와라, 밥 싸가지고 나가서 말여, 그렇게 해서 한참 뭐할 때 얘를 피난을 했어. 9.28 수복을 하고서 아마 얼마나 있었는지 내 기억이 안 나지만, 해서 우선 너 가는디가 용화동이 가장 쉬우니께. 거기루 해서 차를 타게 되면 타고, 걸어가게 되면 걸어가고 해서 슬슬 가라고 그런대로 말여. 충분히 여비가 될 수 있는 것을 주어 보냈는디,

안 흥찬이 같이 못된 놈이 말여, 여비도 제대로 안주어 보냈다고. 그게 이정립 마누라가 하는 소리여, 병여 그게. 이 정립이하고 이 정립 마누라가 하는 소리여. 아니 그 죽는 세상에 3개월인가 4개월 동안 좋은 밥 대접했고, 편안히 잠자리 제공해 줬고, 아니 잘 살려서 그렇게 해서 여비 줘서 저희들도 버린 애를 잘 살려서 그렇게 해서 여비 줘서 저 갈디로 보냈으면, 그게 다만 고마울지언정 욕할 필요가 없는거거든. 그게 그 사람들 세계여.

6.25 동란 과 더불어 그 와중에도  내가 집에서 의통을 준비했어, 의통을 나름대로. 그래서 그 당진의 이 이영이라고 하는 사람보고 다만 한 장이라도 좀 찍어라. 의통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딴 사람은 경제력이 없어서도 못혀. 하고 싶어도 암만 하고 싶어도아니 경면 값이 얼마구 말여 그걸 하는 재주가 있나. 그건 막대한 돈을 가져야 하는디 그걸 뭇하쟎어, 내가 그걸 집에서. 그러니 죽냐 사냐 하구, 쌕쌕이가 비행기가 다니면서 다다다다 하고 말여. 그냥 그 판에 거기앉아서 의통 준비할 사람 있나? 하여튼 상제님 사업에 내가 머리가 간 사람여. 지금 생각하면 머리가 돌았지 말여. 거기 앉아서, 그 판에 앉아서그렇게 해가면서 내가 의통준비를 하고 있어.

헌디 그게 다 소문도 다 퍼지고, 신도들끼리도 저기 안 선생님은 집에 읹아서도 말여. 6.25때도 의통을 준비했다고 세상에 다 퍼지고 그럴 거 아녀. 그때 1.4후퇴 때가 언제여, 1.4 후퇴 때 눈 많이 오고 말여. 저 김 윤근 방위군 사령관이라고 해서  대구에서 식량 다 빼먹고 말여 다 굶겨죽이고 할 때 말여. 1.4 후퇴 때 다 나가라 하는디 말여 나혼자 만 있을 수 없쟎어. 그래서 내 막내아우만 더불고서 이렇게 하구서 지금 애들은 다 큰애도 그렇고 작은애도 그렇고 다 쪼끔 쪼끔한 애들여. 허니께 그건 뭐 다 더불고 갈 수도 없고 지 어미하구 그냥 집에다 두는 수밖에 없쟎어. 집도 지켜야 허구. 또 우리아버지도 기시고.

그러구서 세상 사람이 다 이불 봇짐을 걸머졌지. 한데에서 잘못하면 얼어죽지. 하지만 나만은  하두 콩알 틀어박히듯 신도들이 많으니께, 그냥 지금처럼 옷 잘 입고 오바 입고 구두 잘 신고, 상제니께 상제표시만 하고. 가며서 가며서 자그러구서 내가 공주에 떨어졌는디. 공주에 떨어져 가만히 생각해 보니께 거기도 젊은이들이 이리저리하구 안되겠어. 대전에 와서 보니께 암만 생각해도 뭐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헌디 아는 사람을 만났는디 나보고서 경찰을 하라고 혀. 그래서 내가 순사를 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웃것다.

그런디 누가 그려 그러면 정훈장교를 한번 해보라고. 그런디 그 정훈 책임자가 대전에 와 앉아있어. 내가 그런대로 아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그 사람과 상대해서 내가 정훈장교가 됐어. 그래 가지구서 대구를 가서 방위군 거기를 가서 밥도 얻어 먹인 사실도 있구 헌디. 시간관계상 그 숱한 얘기를 여기서 다 못혀. 그러구서는 772 부대라고 거기 이제 비상시 춘향전이라고 만들어 가지고서 말여. 대원을 마흔 몇 명 조직해서 말여 그걸 더불고서 나 가고 싶은대로 여기 대전도 와서 공연도 해주고. 나 가고 싶은대로 가서 말여.

내가 춤추는 것도 잘 알고 말여. 내가 책임자니께 말여. 그건 그 단원은 경찰서에 갖다 맡기면 밥값 딱 치러줘. 부대들 데려다 위안도 해주고 말여. 그게 선무반여 선무반. 선무 공작대여 그러니께. 지금도 사진 있어, 내가 군복을 입고 장교가 떡 되가지고 한거 그런거 말여. 그 짓을 하다가 대산 내 고향엘 가서 공연을 해 주고서 그걸 내가 본대(本隊)로 너희들 가거라. 아니 대장님은 왜 안가십니까. 안 가도 괜챦어 가. 그러니께 그놈의 군대 쳐놓고 참 맹랑한 군대노릇을 내가 했지. 우리 집에 가니까 참 잘살고 집도 크고 참 그 좋은 닭 잡아서 실컷 두드려 먹고 말여, 여비 한 주먹씩 줘서 모두 다 본대로 입대시키고 말았거든.

그러구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가지구서 군복을 벗어 내던져 버리고 그럭하구서 공주로 해서 청양으로 해서 부여 가서 떡 누워 가지고서 아니 한강 이남을 범치 못하리니 괴병이 맹습하는 까닭이라. 그런 거 있지? 그때 한참 싸울 때여 그 후로도 2년 후인가 정전 되쟎었어. 그러니께 의통준비를 해야 된다 말여. 그러니께 상제님 진리가 그렇게 되져 있어. 나도 진리에게 그렇게 쏙았다 이 말여 그때. 그래서 부여군 내산면 마전리라고 하는 디가 있어. 안 내()자 묏 산()자 내산면(內山面) 삼 마()자 밭 전()자 마전리(麻田里) 소동명은 삼바실이라고 하는디여. 거기 이 평국(李評國)이라는 신도가 있어. 평할 평()자 나라국().

이평국 신도 집에 가서 좌정을 하고 여기는 안방이고 그 위에 윗방, 그러고 이제 사랑채도 있고 다 있는디 선생님이라구 윗방에서만 있으래. 전 가족이 다 기가 막힌 찰 신도여. 윗방에서 한 달 이상 아마 거반 두어 달 있었는데 거기 있으면서 내가 신도들에게 의통준비금을 모금을 했어. 모금을 해 가지고서 말이 그렇지 말여 같이 일하고 허면서 그 늙은이들이 굶어죽는다든지 굶어죽지야 않지만 그 됐어?. 쌀 댓 가마 값 우선 보내도 주고 그 심부름은 청양군 증산면 해남리 강 태익(姜泰翊)이라는 사람이 꼭 중처럼 생겼어. 누가 봐도 중여. 머리도 빡빡 깎고 말여. 멋거리가 없는 중여. 당신은 누가 봐도 중이니께. 아니 뭐 세상에 심부름을 하기에 적임자여. 허니께 용화동을 다녀와라. 해서 그런 사람 심부름 시키고.

그러면서 이제 거기서 떡 있어가지구서 전주 이런 디를 사두방이 대전 어디 이런 디를 더듬어 가지구 그때 내가 경면주사를 많이 샀어 많이. 많이 사가지구 용화동을 떡 가가지구서 그걸 갈구 이렇게 가지구서 거기서 본격적으로 내 의통준비를 했거든? 그걸 매련하는디 근 1년을 했어. 1 년을 하는디 능률이 안 올러. 박 기백이 아들 그 박 주호라는 애고, 또 배 동찬 아들 걔 이름이 뭐인가 배 뭐신가 이제 이름 잊어버렸네. 지금이야 뭐 걔들도 50 이상 아마 그렇게 안 되었나 몰라. 지금이야 이제 늙은이 노릇 할 테지. 헌디 그런 애들 불러다가 애들이니까 말여, 우체국 같은데 가면 냅다 일분 찍는디 다다다다 손이 그렇게 빠르거든.

그 대신 사바하 안 찍어진 데 있고, 사바하는 잘 찍어졌는데 훔치훔치 안찍어진 데 있고, 반밖에 안 찍혀 반. 그렇게 해서 전부 지구에 누구 보내 파견할 신도까지를 조직하는디, 신도가 너무 많어서 말여 신도가. 소화할 수가 없어 소화를. 그래서 아! 이게 포교를 무대뽀로 많이 해도 안 되겠구나. 소화를 시킬 수가 없어. 그때 조직을 해 보니께. 그래서 갱신히 말여 뜯어고쳐가면서 당진의 이 이영이하고 고 석봉이라고 하는 신도를 더불고 가서 작성을 하는디 거기가 어떻게 돼가지고 있냐하면 용화동이 낮에는 대한민국이고 밤에는 인민공화국여 거기가. 모악산 거기로 전부 빨치산 말여.

그러니께 원평와서 말여 집 한 채를 얻어 가지구서 거기 와서 그런 것을 작성하고 의통준비를 하고 그랬거든. 그렇게 해 놓고서 집이를 딱 이제 와서 치성을 모시고서 내가 대 휴게기다. 대휴게기 이 게한다는 게자를 쉴 게라고두 혀. 쉴 휴 쉴 게. 포교 더 하지도 말고 현상유지 그냥하구서 내가 때 되면 나오마 때 되면. 그때 내가 최종적으로 가진 게 하나가 있어.. 내가 운영회 회장여. 운영회 회장. 재정관계로 그런 걸 하나 만들자고 해서, 그걸 벗어놔야 하는데 그걸 못 하구 말여. 까막해 가지고 못하고 들어 앉았는디.

의통준비를 하면서 용화동에 못 있고서 이 상호 씨 가족이 어떻게 돼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원평서 조금 올라가면 금산 중학교인가 있어. 거기가 쌍룡리여. 사과밭 많이 있고 한디 500미터 올라가나 한 1000미터 쯤 올라가나. 금평호 밑에 바로 맞은 짝에 조그만 집하나 얻어놓고서 일부는 거기 있어가면서 이제 의통준비도 한동안 거기서도 했어, 원평 내려오기 전에  상호 씨 부인하고 말여 이 원호 씨하고 그렇게 싸우고 말여. 그러니께 이 원호씨 하두 뭘하니께 내 며느리만도 못한 년이 말여. 그 또 그이도 굉장하거든 어쨌든 이 상호씨가 더불고 사는데 말여 막 년자까지 대가면서...그러니 이상호씨 부인도 저 놈의 영감탱이 개새끼라고 말여. 그 뒤 이 원호씨가 떨어졌나 했더니 떨어지지는 않고 말여.

밀양에 도 순조라는 한의원이 있어 신도중에. 헌디 이 원호가 도 순조마누라를 어디가 수련시킨다고 더불고 가다가 중간에서 비온다고 어디 데려가서 강탈해 버렸어. 그때 늙은 놈여 이원호가 60 넘었어 그때. 도 순조가 죽을 때 눈을 못 감고 눈을 뜨고 죽었다는겨. 이 원호한테 마누라 강탈당해서 너무 분해서 눈을 뜨고 죽었다. 그건 뭐 내 신도들에게 들어서 하는 소리고. 자 이상호 부인도 그렇게 못돼 먹었고 이원호라는 사람도 중진 간부라는 사람이 그렇게 못돼 먹었고. ~~~~~




향수 14-06-27 11:11
 
태사부님이 처음부터 재배를 받으신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한번 절하면 다음엔 맞절로 답배를 해주셧읍니다.즉 한번 절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셧읍니다. 이변때의 교훈으로 배반을 너무 당하시어 기강을 세우시기 위한것입니다. 털보님은 자기가 무시당한다고 자기에게도 재배하라고 강권 하기도 한바 잇읍니다. 대순전경 3판은 전부가 태사부님의 돈으로 제작한것입니다. 기축년 특별성금 운운 한것이 다 태사부님이 한것인데 태사부님은 일개 부장으로 잘라 버리고 자기들이 다 한것인 냥 한것입니다.
임술생 태사부님을 부정하고 사제교리로 무장하여 분별없는 분들은 자기의 뿌리와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렇게 나가면 상제님 천지공사도 부정하게 될것입니다. 천지공사는 인정 사정을 보지 않습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이 한 공덕을 자신이 다 흩어버리는 일은 자기의 사욕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옳바른 판단을 하는것은 자신의 몫일것입니다. 돌아가면서 지도자를 뽑는다는 용화동은 잘되고 있는것인가요 자리 못잡은 한의 욕심일 뿐입니다. 자작사당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요산요수 14-06-27 19:25
 
기축년 특별성금 운운 한것이 다 태사부님이 한것인데 태사부님은 일개 부장으로 잘라 버리고 자기들이 다 한것인 냥 한것입니다. - 향수님 글중에서 배우고 갑니다. 뿌리부정하면서 뭔가해보려는 사람들은 천지공사는 인정사정보지 않는다는 향수님 말씀을 깊게 생각해 봐야할것같습니다


이상호내막 14-06-27 11:18
 
<2변에 이상호 형제는 실권이 전혀 없었고 포교도 전혀 한 적이 없다.> 이 사실은 24세의 젊은 총사수로부터 원로로서 조직관리위탁을 받은 이상호 이정립이 안운산 총사수를 조직적으로 제거해 조직을 장악하면서 수없이 판갈이를 하며 실권을 차지해게 되었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과정에서 이상호 이정립은 신앙촌 건립을 주장하며 안운산 총사수 휘하의 신도들을 정치적으로 규합해 나아가는 계기가 되고 안운산 총 사수는 6.25 한국전쟁이 마무리되는 즈음 힘들여 개척한 2변으로부터  손을 완전히 떼게 되고 신도들은 이상호 이정립의 휘하에서 신앙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실권을 쥐게 됩니다.


2변내막 14-06-27 11:43
 
< 2변 도운 121(1991).3.7>
*6.25를 맞이하면서 서울서 한강다리 끊은 뒤에 내가 서울에 있으면서 내 동생이 전농동에 서울 시립대학이 처음 생길 때여. 동생과 처남이 입학을 할때여 입학해서 등록금까지 다 냈을 때여. 그러구 나는 뭐 상제님 사업하러 여기 저기 다니는 사람이니께. 그 때 마침 서울에 있었구. 그래서 같이 말여. 이 정립 씨 그 누구누구 그 처되는 사람 누구 여럿이 일행이 말여. 저 김 종영이라고 말여. 보천교 담당하던 형사라고 있어, 호는 근하라고. 모두 휩싸여서 수원까지 걸어와 가지고, 그래서 오산서부터 차를 탔어. 그래가지고 온양온천까지 와서 머물러 있는디,

이정립이 처남 장상달이라고 있어. 서로 상자에 통달 달자 장상달인디.  걔 집이 울진여 울진. 헌디 걔를 내던져두고 가, 이정립이가. 제 처남이고 여자에게는 제 친정 동생인디. 거기다 떼 내던지고 너는 너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저 연놈이 말여 사람도 아니고 말여. 제 처남이요 어린앤디.  그게 그때 아마 서울서 고등학교 다녔던지 아마 그렇게 됐나봐. 헌디 그걸 어떻게 떼내 버리고 가나 제 동생 제 처남을. 그래서 헐 수 없어서 내가 더불고 집에 들어왔어, 내가 더불고서. 그랬는데, 우리 어머니가 위암에 걸려서 말여. 나는 우리 어머니가 위암 때문에 말여, 참 양방에 무슨 방법이 없나 해서 그렁저렁해서 서울을 갔을 때다 이 말여.  상제님 사업도 사업이고. 그러니께 나는 어디로 갈 수가 없쟎어, 집으로 가야지 말여. 자식 된 도리에 어머니가 말이여 중병에 처했는디.

집에 들어오면서 내 아우, 처남, 장상달이 이정립 처남, 그렇게 떡 더불고 집에를 와서 보니께 그 숱한 얘기 다 못하지만 저 당진에서 이이영이 말여 저 지식 많다는 사람. 아니 이이영이가 무슨 지방에서 무얼 어떻게 잘못했간디 내 집으로 피난오고. 또 인천 경찰서 그 사찰계 말여 형사 하나가 김 상록이라고, 월미도 갔다가 보도연맹 200여명인가 300명 말여 총살시키고서,  가만히 내가 이 평생에 와서 친구 새긴 중에서 나를 가장 아껴주고 덕 있고 피난할 데가 어딘가 생각해 보니 나밖에 없더라네. 내 집에 왔어, 처자를 더불고서. 나밖에 없더라 이 말여. 그래서 피난민이 우글우글해.

그런디 이제 달포 후에 암투병중인 내 선비께서 돌아가셨어. 그래서 초상상제로서 장례모시고. 그런데 장례 모시기 전에 우리 어머니가 병중에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나 사는 동네 이름이 지사여. 지초 지(芝)자 모래 사(沙)자 지산(芝沙)디 그 지사 고개에서 너를 잡는다고. 또한 우리 집에 있는 김 상록이를 잡는다고, 형사를 집에 두었다고 말여. 그랬다고 사람들이 잔뜩 넘어온다 말여. 그런 꿈을 꾸었다고 내 선비께서 그려. 내 선비께서 영이 얼마나 밝았든지 이렇게 천서를 받아쓰고 그랬어, 천서. 공부해서 그렇게 주문 읽어서 그렇게 영이 밝으셨던 양반이고 그랬어.

그러자 조금 있으니께 어떤 기별이 오느냐 하면. 저 안 아무개 집에 경찰가족을 두었다. 그래서 그걸 잡아 올라고 한다고 말여. 곧 넘어온다 말여. 빨리 조치하라고 그래서 그 사람을 보고서 사분지 지여차 한디. 여기 있어서 나하고 같이 당하고 싶으면 여기 있고, 한 발짝이라도 가다가 죽구 싶으면 가구. 그건 자의에 맡기니께. 물론 내가 살고 싶으면 김 상록이를 내가 잡아서 주면 내가 산다. 허지만  나 살기 위해 가지구서 살겄다고 찾아온 사람을 내가 사람잡아줄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나는 차후문제고 하니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찾아봐라.

사태가 이러니 허면 내가 떠나면 안 형이 말여 대신 내 죄를 당하는디 그래도 괜챦으냐. 아, 그건 다음 문제 아니냐. 나야, 그건 그시 그시 말여 적절한대로 해야 될 거 아니냐. 허니께 가고 싶으면 가고, 여기 있고 싶으면 있고, 내가 구태여 내쫓든 않겄다. 허니께 자의에 맡기겄다. 그 소리가 떨어지니께, 신발도 안 신고 도망 가. 그래서 그렇게 하면 남들이 이상하게 보고 하니께, 신발 신고. 그리고 가다가 먹어야 할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 안 사람 보고서 쌀도 좀 퍼다 주고 말여, 숨도 좀 돌려 가지고 하라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보냈어. 보냈는디. 그 뒤에 그 사람은  잘 살고. 이제 인천 수복 뒤에 경찰노릇도 하고 그랬는디 그 사람이.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만났어. 뭐 세상은 그런 거 아녀. 그런디 이제 그런 때 사람을 봐. 내 선친께서 그러면 네가 당하지 않냐. 당해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 같으면 살기 위해서 말여 그 사람 잡아주겠습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뉴. 그러니께 내 선친께서 참말로, 참 난감하신 표정을 내 머릿속서 눈 속에서  떠오르고 그러는디.

그때에 그 이 정립이의 처남 되는 애가 내가 어떻게 소화하는 수가 없어서, 산에 가서 저 삽정이라도 따는 척 하구 이렇게 저렇게 해서 저녁이면 와라, 밥 싸가지고 나가서 말여, 그렇게 해서 한참 뭐할 때 얘를 피난을 했어. 9.28 수복을 하고서 아마 얼마나 있었는지 내 기억이 안 나지만, 해서 우선 너 가는디가 용화동이 가장 쉬우니께. 거기루 해서 차를 타게 되면 타고, 걸어가게 되면 걸어가고 해서 슬슬 가라고 그런대로 말여. 충분히 여비가 될 수 있는 것을 주어 보냈는디,

안 흥찬이 같이 못된 놈이 말여, 여비도 제대로 안주어 보냈다고. 그게 이정립 마누라가 하는 소리여, 병여 그게. 이 정립이하고 이 정립 마누라가 하는 소리여. 아니 그 죽는 세상에 3개월인가 4개월 동안 좋은 밥 대접했고, 편안히 잠자리 제공해 줬고, 아니 잘 살려서 그렇게 해서 여비 줘서 저희들도 버린 애를 잘 살려서 그렇게 해서 여비 줘서 저 갈디로 보냈으면, 그게 다만 고마울지언정 욕할 필요가 없는거거든. 그게 그 사람들 세계여.

6.25 동란 과 더불어 그 와중에도  내가 집에서 의통을 준비했어, 의통을 나름대로. 그래서 그 당진의 이 이영이라고 하는 사람보고 다만 한 장이라도 좀 찍어라. 의통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딴 사람은 경제력이 없어서도 못혀. 하고 싶어도 암만 하고 싶어도.  아니 경면 값이 얼마구 말여 그걸 하는 재주가 있나. 그건 막대한 돈을 가져야 하는디 그걸 뭇하쟎어, 내가 그걸 집에서. 그러니 죽냐 사냐 하구, 쌕쌕이가 비행기가 다니면서 다다다다 하고 말여. 그냥 그 판에 거기앉아서 의통 준비할 사람 있나? 하여튼 상제님 사업에 내가 머리가 간 사람여. 지금 생각하면 머리가 돌았지 말여. 거기 앉아서, 그 판에 앉아서.  그렇게 해가면서 내가 의통준비를 하고 있어.

헌디 그게 다 소문도 다 퍼지고, 신도들끼리도 저기 안 선생님은 집에 읹아서도 말여. 6.25때도 의통을 준비했다고 세상에 다 퍼지고 그럴 거 아녀. 그때 1.4후퇴 때가 언제여, 1.4 후퇴 때 눈 많이 오고 말여. 저 김 윤근 방위군 사령관이라고 해서  대구에서 식량 다 빼먹고 말여 다 굶겨죽이고 할 때 말여. 1.4 후퇴 때 다 나가라 하는디 말여 나혼자 만 있을 수 없쟎어. 그래서 내 막내아우만 더불고서 이렇게 하구서 지금 애들은 다 큰애도 그렇고 작은애도 그렇고 다 쪼끔 쪼끔한 애들여. 허니께 그건 뭐 다 더불고 갈 수도 없고 지 어미하구 그냥 집에다 두는 수밖에 없쟎어. 집도 지켜야 허구. 또 우리아버지도 기시고.

그러구서 세상 사람이 다 이불 봇짐을 걸머졌지. 한데에서 잘못하면 얼어죽지. 하지만 나만은  하두 콩알 틀어박히듯 신도들이 많으니께, 그냥 지금처럼 옷 잘 입고 오바 입고 구두 잘 신고, 상제니께 상제표시만 하고. 가며서 가며서 자.  그러구서 내가 공주에 떨어졌는디. 공주에 떨어져 가만히 생각해 보니께 거기도 젊은이들이 이리저리하구 안되겠어. 대전에 와서 보니께 암만 생각해도 뭐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헌디 아는 사람을 만났는디 나보고서 경찰을 하라고 혀. 그래서 내가 순사를 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웃것다.

그런디 누가 그려 그러면 정훈장교를 한번 해보라고. 그런디 그 정훈 책임자가 대전에 와 앉아있어. 내가 그런대로 아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그 사람과 상대해서 내가 정훈장교가 됐어. 그래 가지구서 대구를 가서 방위군 거기를 가서 밥도 얻어 먹인 사실도 있구 헌디. 시간관계상 그 숱한 얘기를 여기서 다 못혀. 그러구서는 772 부대라고 거기 이제 비상시 춘향전이라고 만들어 가지고서 말여. 대원을 마흔 몇 명 조직해서 말여 그걸 더불고서 나 가고 싶은대로 여기 대전도 와서 공연도 해주고. 나 가고 싶은대로 가서 말여.

내가 춤추는 것도 잘 알고 말여. 내가 책임자니께 말여. 그건 그 단원은 경찰서에 갖다 맡기면 밥값 딱 치러줘. 부대들 데려다 위안도 해주고 말여. 그게 선무반여 선무반. 선무 공작대여 그러니께. 지금도 사진 있어, 내가 군복을 입고 장교가 떡 되가지고 한거 그런거 말여. 그 짓을 하다가 대산 내 고향엘 가서 공연을 해 주고서 그걸 내가 본대(本隊)로 너희들 가거라. 아니 대장님은 왜 안가십니까. 안 가도 괜챦어 가. 그러니께 그놈의 군대 쳐놓고 참 맹랑한 군대노릇을 내가 했지. 우리 집에 가니까 참 잘살고 집도 크고 참 그 좋은 닭 잡아서 실컷 두드려 먹고 말여, 여비 한 주먹씩 줘서 모두 다 본대로 입대시키고 말았거든.

그러구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가지구서 군복을 벗어 내던져 버리고 그럭하구서 공주로 해서 청양으로 해서 부여 가서 떡 누워 가지고서 아니 한강 이남을 범치 못하리니 괴병이 맹습하는 까닭이라. 그런 거 있지? 그때 한참 싸울 때여 그 후로도 2년 후인가 정전 되쟎었어. 그러니께 의통준비를 해야 된다 말여. 그러니께 상제님 진리가 그렇게 되져 있어. 나도 진리에게 그렇게 쏙았다 이 말여 그때. 그래서 부여군 내산면 마전리라고 하는 디가 있어. 안 내(內)자 묏 산(山)자 내산면(內山面) 삼 마(麻)자 밭 전(田)자 마전리(麻田里) 소동명은 삼바실이라고 하는디여. 거기 이 평국(李評國)이라는 신도가 있어. 평할 평(評)자 나라국(國)자.

이평국 신도 집에 가서 좌정을 하고 여기는 안방이고 그 위에 윗방, 그러고 이제 사랑채도 있고 다 있는디 선생님이라구 윗방에서만 있으래. 전 가족이 다 기가 막힌 찰 신도여. 윗방에서 한 달 이상 아마 거반 두어 달 있었는데 거기 있으면서 내가 신도들에게 의통준비금을 모금을 했어. 모금을 해 가지고서 말이 그렇지 말여 같이 일하고 허면서 그 늙은이들이 굶어죽는다든지 굶어죽지야 않지만 그 됐어?. 쌀 댓 가마 값 우선 보내도 주고 그 심부름은 청양군 증산면 해남리 강 태익(姜泰翊)이라는 사람이 꼭 중처럼 생겼어. 누가 봐도 중여. 머리도 빡빡 깎고 말여. 멋거리가 없는 중여. 당신은 누가 봐도 중이니께. 아니 뭐 세상에 심부름을 하기에 적임자여. 허니께 용화동을 다녀와라. 해서 그런 사람 심부름 시키고.

그러면서 이제 거기서 떡 있어가지구서 전주 이런 디를 사두방이 대전 어디 이런 디를 더듬어 가지구 그때 내가 경면주사를 많이 샀어 많이. 많이 사가지구 용화동을 떡 가가지구서 그걸 갈구 이렇게 가지구서 거기서 본격적으로 내 의통준비를 했거든? 그걸 매련하는디 근 1년을 했어. 1 년을 하는디 능률이 안 올러. 박 기백이 아들 그 박 주호라는 애고, 또 배 동찬 아들 걔 이름이 뭐인가 배 뭐신가 이제 이름 잊어버렸네. 지금이야 뭐 걔들도 50 이상 아마 그렇게 안 되었나 몰라. 지금이야 이제 늙은이 노릇 할 테지. 헌디 그런 애들 불러다가 애들이니까 말여, 우체국 같은데 가면 냅다 일분 찍는디 다다다다 손이 그렇게 빠르거든.

그 대신 사바하 안 찍어진 데 있고, 사바하는 잘 찍어졌는데 훔치훔치 안찍어진 데 있고, 반밖에 안 찍혀 반. 그렇게 해서 전부 지구에 누구 보내 파견할 신도까지를 조직하는디, 신도가 너무 많어서 말여 신도가. 소화할 수가 없어 소화를. 그래서 아! 이게 포교를 무대뽀로 많이 해도 안 되겠구나. 소화를 시킬 수가 없어. 그때 조직을 해 보니께. 그래서 갱신히 말여 뜯어고쳐가면서 당진의 이 이영이하고 고 석봉이라고 하는 신도를 더불고 가서 작성을 하는디 거기가 어떻게 돼가지고 있냐하면 용화동이 낮에는 대한민국이고 밤에는 인민공화국여 거기가. 모악산 거기로 전부 빨치산 말여.

그러니께 원평와서 말여 집 한 채를 얻어 가지구서 거기 와서 그런 것을 작성하고 의통준비를 하고 그랬거든. 그렇게 해 놓고서 집이를 딱 이제 와서 치성을 모시고서 내가 대 휴게기다. 대휴게기 이 게한다는 게자를 쉴 게라고두 혀. 쉴 휴 쉴 게. 포교 더 하지도 말고 현상유지 그냥하구서 내가 때 되면 나오마 때 되면. 그때 내가 최종적으로 가진 게 하나가 있어.. 내가 운영회 회장여. 운영회 회장. 재정관계로 그런 걸 하나 만들자고 해서, 그걸 벗어놔야 하는데 그걸 못 하구 말여. 까막해 가지고 못하고 들어 앉았는디.

의통준비를 하면서 용화동에 못 있고서 이 상호 씨 가족이 어떻게 돼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원평서 조금 올라가면 금산 중학교인가 있어. 거기가 쌍룡리여. 사과밭 많이 있고 한디 500미터 올라가나 한 1000미터 쯤 올라가나. 금평호 밑에 바로 맞은 짝에 조그만 집하나 얻어놓고서 일부는 거기 있어가면서 이제 의통준비도 한동안 거기서도 했어, 원평 내려오기 전에.  이  상호 씨 부인하고 말여 이 원호 씨하고 그렇게 싸우고 말여. 그러니께 이 원호씨 하두 뭘하니께 내 며느리만도 못한 년이 말여. 그 또 그이도 굉장하거든 어쨌든 이 상호씨가 더불고 사는데 말여 막 년자까지 대가면서...그러니 이상호씨 부인도 저 놈의 영감탱이 개새끼라고 말여. 그 뒤 이 원호씨가 떨어졌나 했더니 떨어지지는 않고 말여.

밀양에 도 순조라는 한의원이 있어 신도중에. 헌디 이 원호가 도 순조마누라를 어디가 수련시킨다고 더불고 가다가 중간에서 비온다고 어디 데려가서 강탈해 버렸어. 그때 늙은 놈여 이원호가 60 넘었어 그때. 도 순조가 죽을 때 눈을 못 감고 눈을 뜨고 죽었다는겨. 이 원호한테 마누라 강탈당해서 너무 분해서 눈을 뜨고 죽었다. 그건 뭐 내 신도들에게 들어서 하는 소리고. 자 이상호 부인도 그렇게 못돼 먹었고 이원호라는 사람도 중진 간부라는 사람이 그렇게 못돼 먹었고. ~~~~~


이상호형제사기사… 14-06-27 11:45
 
선정원경 통해서 보는 태모님 등에 업은 세 번째 살림 이상호 이정립 사기사건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태모님 각고의 유치계획과
조종골 태모님 경제압박의 정황이 일치하여~ 태모 고수부님 수석성도 고민환 성도 주장으로 잠시 용화동에 가서 경제적 난국을 피하자고 설득하여~ 고육지책으로 1931년 신미년 동지치성 봉행후 임신년 1932년 용화동 살림시대가 개막됩니다. 그러나 살림개막 시부터 이정립은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일체 태모님과 만나지 않도록 조치시키고 1년간 종적을 감추고 간부를 시켜 고민환 성도를 내치는 작업에 착수합니다.

한편 태모님과 고민환 성도는 용화동에 살림을 합치는 과정에서 이정립에 의해 신도가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고 도판(도국)이 감소하자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의도를 미리 아시고 고민환 성도를 통해  옛날 도국을 다시 이루기 위해 예전 추종 성도들을 일일이 방문해 조직을 한 후, 오성산 옥구 문영희 집에 임시 임시장소를 개설하고 임피군 성산면 오성산에 도장건축을 착수합니다. 그러면 용화동 통합 32년 초기에 이상호 형제의 의도를 알고도 32년을 헛보내시고 왜 33년 말에서야 오성산으로 가시게 되었나? 하는 문제가 있읍니다. 이는 그 이유가 선정원경에 그대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즉 용화동 초기에 문영희가에 새로 개편한 도체조직의 임시장소를 정하고 이 조직이 오성산 도장 새건축 계획을 수립하여 도장건립 착수에 들어간 것이 그 해 32년 가을이었고(임시장소(臨時場所)를 옥구군(沃溝郡) 옥산면(玉山面) 기현리(歧峴里) 문 영희(文永禧) 가(家)에 정하고 도체조직(道體組織)후 임피군(臨陂郡) 성산면(聖山面) 오성산(五聖山)에 기지(基址)를 정하고 도장주택(道場住宅)을 건축(建築)이 시즉(時則) 임신년(壬申年:일구삼이) 추기(秋期)러라.(선정원경) 자금부족으로 천연중에 이진묵이란 종도가 자비로 33년 동지절에 오성산 도장이 완공되어 불가피하게 용화동 체류가 늦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용화동 2년 세월은 태모 고수부님 천지공사 공백기가 되었읍니다.

이정립은 각고의 노력으로 태모님을 용화동으로 31년 동짓달 치성 이후 모시는데(동지치성 이후 기점) 성공하여 간부들을 특별관리해 태모님과 전혀 못만나게 조치하고 32년 1년간 숨어 종적을 감춥니다. 태모 고수부님은 할 수 없이 33년 말 동지치성을 끝으로 오성산으로 다시 복귀하는데 이정립은 자신이 집필한 <고부인신정기>에서 태모님 세살림을 대흥리-조종골-용화동 통합교단으로 정의 내려 자신들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태모 고수부님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삼으려 했지만 60년대 중반 헛되이 선화함으로써 결국 자신들이 정통이 아닌 일종의 윤통으로 드러납니다.

이 정립은 오성산 살림을 태모 고수부님의 은거로 표현해 오성산 살림의 비중을 경시하고 용화동 살림을 세번째 살림으로 삼으려 <고부인 신정기(천후신정기)>에 기록했지만(짐새살기로 가득한 금산도득문제는 태모님을 초빙해 따돌리고 종통을 내세워 고민환 수석성도마저 내친 이상호 이정립의 욕망)  결국 오성산 살림이 바로 사실상(내용상)의 세번째 살림이고 용화동 살림은 고민환 수석성도 표현대로 형편이 안좋아 잠시 의탁한 상태였을 뿐인 명분상의 세번째 살림으로 드러납니다. (차경석도 예문납객으로 태모님을 고립시킨 결과 태모님 천지공사를 보지못하게 만든 결과를 야기했고 용화동 살림 역시 이상호 이정립의 철저한 태모님 고립정책으로 일체의 천지공사를 못보게 하는 결과를 야기함)

참조내용:
<선정원경(仙政圓經)>*시즉(時則) 신미년(辛未年:1931) 십일 월(十日月) 동지(冬至)에 행차(行次)하사 동지치성(冬至致誠)을 봉행(奉行)하니, 기시(其時) 고 씨(高氏) 시봉(侍奉)은 고 민환(高旻煥), 김 수열(金壽烈), 이 용기(李用己)오, 식모(食母)는 용기(用己) 처(妻)러라. 외무 간사인(外務幹事人)은 이 상호(李祥昊), 조 학구(趙鶴九), 김 재윤(金在允),  임 경호(林京鎬), 김 환(金丸)인 중, 교리진행(敎理進行) 방도(方途)와 유지시즉(維持視則)이 내부외부(內部外部)에 전연불온(全然不穩)이 조직(組織) 고(故)로 신도(信徒) 내왕(來往)이 두절(杜絶)하니 하이감당(何以堪當)이리오.

<선정원경(仙政圓經)>*기연(其然) 중 비법지언사(非法之言辭)로 파란곡절(波亂曲折)이 다단불시(多端不啻)라. 곤존 고 씨(坤尊高氏)의 도국(道局)은 O감(O減) 상태(常態)에 영자불견지세(影子不見之勢)러라. 차의(差意)로다. 사료(思料)컨대, 고 민환(高旻煥)은 외타방도(外他方途)를 섭취(攝取)하야 전기(前期) 도국(道局)을 갱성(更成)키 위(爲)하야 용화동(龍簧)을 배경(背景)하고 O의의퇴출(O義誼退出) 환귀고향(還歸故鄕)하야 전기(前期) 상종(相從)인 도아(道雅)를 일일이 방문(訪問)하야 임시장소(臨時場所)를 옥구군(沃溝郡) 옥산면(玉山面) 기현리(歧峴里) 문 영희(文永禧) 가(家)에 정하고 도체조직(道體組織)후 임피군(臨陂郡) 성산면(聖山面) 오성산(五聖山)에 기지(基址)를 정하고 도장주택(道場住宅)을 건축(建築)이 시즉(時則) 임신년(壬申年:일구삼이) 추기(秋期)러라.

<선정원경(仙政圓經)>*연중(然中) 경비부족지치(經費不足之致)로 수리미필(修理未畢) 중 신도(信徒) 중 문 기수(文基洙), 이 중진(李仲眞)이 고씨(高氏) 전 문후 차(問候次)로 갔는데 고씨(高氏) 말씀에 “오성산(五聖山) 도장(道場)을 속(速)히 수리(修理)하라.” 재촉 하시므로 회정(回程) 즉시(卽時)로 전차(傳差)나 경비무로(經費無路) 중, 신도(信徒) 중 이 진묵(李眞黙)이 독단적(獨單的) 수리담당(修理擔當)하야 수리(修理)하는 시즉(時則) 계유년(癸酉年) 동지절(冬至節)이러라.

<선정원경(仙政圓經)>*고 씨(高氏)께서 말씀하시되, “동지치성(冬至致誠)은 오성산(五聖山)에 가서 봉존의(奉尊矣)리라. 그리 알라.” 하시므로 제반설비(諸般設備)를 구치(俱置)이러라. 고씨(高氏)께서 동지(冬至) 전일(前日)에 당도(當到) 하신바, 기시(棄市)에 시봉내참인(侍奉來參人)은 김 수응(金壽應), 조 학구(趙鶴九)러라. 곤존 고 씨(坤尊高氏)께서 항시(恒時) 말씀하시기를, “조강맥식(糟糠麥食)이라도 임옥자손(臨沃子孫)을 영솔(領率)하고 제반사(諸般事)를 결탁(結托)하리라” 하시더니 오성산(五聖山) 도장(道場)으로 오시사 신도선정(信徒仙政)을 시설(施設) 하시니라.

즉, 조종골 살림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고민환 성도는 잠시 난국을 타개하고자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용화동 유치요구도 충족시켜줄겸 용화동에 잠시 거 있자고 하여 태모님의 승락을 얻어 통합시대가 열린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호 형제의 욕심을 알고 통합살림을 여는 32년 초기부터 오성산 도장을 짓는 작업에 착수하고 역시 경제난으로 천연되다가 이진묵의 자비로 33년 동지절에 완공지어 동지치성을 오성산 도장에서 열면서 세번째 살림 시대가 개막됩니다. 여기에서 태모님이 용화동 살림과 오성산 살림의 성격규정에 대해 중대하게 선언하신 말씀이 선정원경에 나오는데  <항시(恒時) 말씀하시기를, “조강맥식(糟糠麥食)이라도 임옥자손(臨沃子孫)을 영솔(領率)하고 제반사(諸般事)를 결탁(結托)하리라” 하시더니 오성산(五聖山) 도장(道場)으로 오시사 신도선정(信徒仙政)을 시설(施設) 하시니라.(선정원경)

즉 변변챦은 거친 보리밥만 먹는 한 이 있더라도 용화동 이상호 형제가 거느린 신도들이 아니라 오성산 임옥자손 데리고 천지공사의 제반사 모든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道史에 있어 이상호 이정립이 규정하고 있는 용화동 두번째 살림에 반하는 태모님의 엄청난 선언인데 지금까지 간과되어왔읍니다!!

<선정원경(仙政圓經)>*연중(然中) 경비부족지치(經費不足之致)로 수리미필(修理未畢) 중 신도(信徒) 중 문 기수(文基洙), 이 중진(李仲眞)이 고씨(高氏) 전 문후 차(問候次)로 갔는데 고씨(高氏) 말씀에 “오성산(五聖山) 도장(道場)을 속(速)히 수리(修理)하라.” 재촉 하시므로 회정(回程) 즉시(卽時)로 전차(傳差)나 경비무로(經費無路) 중, 신도(信徒) 중 이 진묵(李眞黙)이 독단적(獨單的) 수리담당(修理擔當)하야 수리(修理)하는 시즉(時則) 계유년(癸酉年) 동지절(冬至節)이러라.  고 씨(高氏)께서 말씀하시되, “동지치성(冬至致誠)은 오성산(五聖山)에 가서 봉존의(奉尊矣)리라. 그리 알라.” 하시므로 제반설비(諸般設備)를 구치(俱置)이러라. 고씨(高氏)께서 동지(冬至) 전일(前日)에 당도(當到) 하신바, 기시(棄市)에 시봉내참인(侍奉來參人)은 김 수응(金壽應), 조 학구(趙鶴九)러라. 곤존 고 씨(坤尊高氏)께서 항시(恒時) 말씀하시기를, “조강맥식(糟糠麥食)이라도 임옥자손(臨沃子孫)을 영솔(領率)하고 제반사(諸般事)를 결탁(結托)하리라” 하시더니 오성산(五聖山) 도장(道場)으로 오시사 신도선정(信徒仙政)을 시설(施設) 하시니라.


황원택교육 14-06-27 11:48
 
태사부님 황원택 교육시키던 말씀~ 
 글쓴이 : 향수  조회 : 586   
 
<안운산 태사부님 129(99년).12.22 강론>
 
*(박 재근 신도에 대한 언급)지금 오면서 보니까 저 아산도장에서 신앙하는 박 재근(홍범초 형의 연원주) 신도가 와있다. 그 신도 연령이 나하고 비슷할 것이다. 한데 저 신도가 50여 년 전 신도다.(99년 기준) 내가 8.15 그 다음 해인가 스물 다섯 살에 포교시켰으니까 그쯤 될 것이다. 재근이 여기 있지? 어디 있어? 아, 저기 있구나. 한 번 일어나 봐. 저렇게 늙은 영감이다.

지금은 요 몇 해 전보다 더 건강해졌다. 내가 저 신도를 보고 하는 소리다. “태을주를 잘 읽고 신앙 잘하면 수명을 연장하고 오래오래 살거다.” 저 사람과 같이 신앙하다가 그만 둔 사람들은 다 죽어버렸다. 다 죽었다. 사실 내가 저희 선생님이다. 신앙하는 저희들한테는 내가 하나님같은 사람 아닌가?

 아산에 내 부동표가 얼마나 많았는지 5.10 선거때 벽보 한 장 없어도 출마만 하면 틀림없이 당선된다고 했다.내게 부동점 6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신도가 많았겠는가.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배반하고 지금 다 죽어버렸다.

<안운산 태사부님 121(91년).3.7 강론>
 
*범초 홍 성렬은 그 형에게서 도를 받은 사람이고 그 형제에게 진리를 전해 준 사람은 아산군 배방면 남리에 사는 박 재근 신도다. 도를 전해준 그 사람 얘기를 들으면 그 형제가 쌀 한 톨 가지고 와서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박 재근에게 밥 대접 받으면서 이불 덮어주고 수련도 시켜주고 알몸으로 길렀다.(46년에 박재근 25세 홍범초 형은 중학생 홍범초는 13세)

홍 성열은 제 형 쫓아다니며 박 재근에게 공부한 녀석이다. 제 아비 홍 만표가 그렇게 신도들을 비난하고 상제님을 박해하고 악살을 부리고 했는데 그 처가 물에 빠져 죽었다. 나는 그 악살로 물에 빠져 죽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한다. 그 이후 허탈해 가토릭인가 예수교에 들어갔다가 다시 상제님 품에 들어온 사실을 제 입을 통해 말한 것을 전해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얼굴 한 번 본 일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풋내기 어린 애가 제 형 밑에 붙어 제 신앙하면 된 거지, 지도자가 그 많은 신도 어떻게 다 일일이 기억하나.

<안운산 태사부님 121(91년).3.7 강론>
 
*황 원택은 서산 내 이웃이라 더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교 졸업해서 교체 조직할 때 수화금목토 밑에 동서남북, 춘하추동의 8교리에 집어넣어 소화했다. 내 이웃이고 심부름시키기 좋고 국민학교 밖에 안 나온 걸 뭘. 그때도 그놈을 내가 어떻게 인재 양성해 교육했냐 하면 한 두어 발 되는 댓가치를 갖다 놓고 한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집중교육을 시켰다.

그때만 해도 한문 문화권이고 해서 지금보다야 한문을 해야 행세하는 때라 문자를 한 천개 가르쳤다.
독행천리에 백절불굴이라, 작지부지라야 내성군자라. 그런 문자를 한 천개 술어를 주입시켜놓으면 그런대로 사회에 강사로 내세울 수 있거든. 졸면 댓가지로 딱 하고 때리며. 가까운 제 집에 가서 먹기도 했지만 내 집에서 밥 먹여가며 자식 기르듯 온 정력을 바쳐 길렀건만 그런 게 커서 지금 용화동 책임자라고 어쩌고 한다.(황원택이 종령하던 70년대 초 용화동 방문때 자신을 받들어 재입도하라 폭언한 사건)

용화동은 당시 내가 한 800세대 만든 곳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내가 판 만들어 놓은 곳에서 저희들끼리 결혼해 사돈 맺으며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못살게 한다. 한 상기는 부성면 가사리에 사는데 홍 성렬하고 사돈까지 맺어 나와 사담으로 단 한 시간도 이야기 해본 적도 없는 자들이 아무 이유 없이 악담하며 세상말로 나를 잡아먹으려 한다. 
 
<안운산 태사부님 121(91년).3.7 강론>
 
*내가 사실은 큰 자식 데리고 상제님 사업을 하려고 했다. 사실은 인물이 된 사람이 그 사람이다. 인간으로서는 특종이고 지능도 둘째나 종정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하도 찌들린 생활로 교육을 못 시켜 다듬질 못했다. 나무를 심으면 거름도 주고 보호목도 해야 하는데 그 사람에게는 내가 거름도 못주고 보호목도 못했다. 그 바람에 사회에서 그냥 떠돌이 생활한 사람이다.

내가 한때 6.25 한국전쟁 겪고 공주에서 살다 대전으로 이사와 살며 안 치홍으로 문패 바꿔달고 사는데 직업이 아무것도 없이 살았다. 내가 무얼 하면 돈을 벌긴 버는데 자꾸 떼어먹는 사람이 생기고 안 된다. 지금 돈으로 하면 수 백 억을 벌었는데 다른 사람이 다 떼어먹고 그래서 그렇게 굶으며 어렵게 사는데 당시 가톨릭 단체에서 어려운 사람에게 강냉이 죽을 주어 구호했다.

그때는 다들 어려울 때 그렇게 살던 시대인데 장남과 정신문화 연구원 교수하는 둘째가 이웃집들이 강냉이 죽 타다 먹는 것을 보고 우리도 강냉이 죽 좀 타다 먹자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동양종교 하는 집이라 죽어도 굶어죽자, 그냥 웃으면서 죽자 하니 어린 것들이 그런걸 아나.

결국 한 번도 강냉이 죽 한번 타먹지 못하게 절개 지키며 해왔는데도 상제님 사업이 당체 지지부진하고 그래서 처음에는 큰 애 데리고 용화동도 데려가고 대전 MBC앞에서도 그 애 데리고 했는데 그 애는 그저 들락날락 들어오기 무섭게 나가곤 했다. 신도들 역시 들어오기 무섭게 자꾸 물갈이를 하니까 하루는 큰애하고 상의를 했다.

서울부터 뿌리를 내리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잡기 위해선 그 중 단순한 데가 경상도니께 부산을 가야 한다. 내가 경상도 사람 부산 사람은 탱크처럼 밀어부치기 때문에 그들하고 일해야 한다고 하고, 서울은 사람이  얄쭉얄쭉해서 서울 사람 가지고는 안 되니 어쩌면 좋으냐 하니 큰 애가 돈 6천원을 갖고 내가 부산 가서 한 번 개척해 보겠다 하고 갔다.

내가 정책개발을 못해 주는 바람에 만나는 사람마다 저는 찬 데서 자며 고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에게 좋은 밥 사주고 잘 해주니 6개월인가 1년간 부산에서 고생만하고 결국 성과를 못 내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은 연락도 안 되고 쫓아 내려갈 수도 없고 했던 답답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큰 자식 포부가 너무 커서 ........


태모님배척 14-06-27 11:50
 
보천교 초기~이상호,. 태모님 배척운동에 앞장서시다 
 글쓴이 : 향수  조회 : 454   
 
<증산교사(甑山敎史)>*이에 채 규일(蔡奎一), 이 상호(李祥昊),문 정삼(文正三) 세 사람이 협력하여 신도들을 수습하여 교세를 만회하려 할 새 포교방법을 근본적으로 고치고 종래로 고부인(高夫人)에게 집중되었던 신도들의 신뢰감정을 경석에게로 옮기기에 힘을 들였다. 종래로 광명수련에 의존한 포교방법은 매양 경석에게 대한 비난공격의 기세를 올리는 결과를 일으키게 되므로 이것을 허령(虛靈)이라 하여 배척하고 규일(奎一)이 고안한 서전(書典)의 홍범도해와 김 일부의 정역팔괘와 정감비결과 풍수설 등을 교묘하게 연결부연한 설교로써 포교의 새 방법을 정하였다.

<증산교사(甑山敎史)>*또 수부(首婦)를 택정한 것은 천사(天師)께서 천지운로를 뜯어고치고 도수를 짜심에 그 세간적(世間的)으로 나타날 큰 운명을 경석(京石)에게 붙여주시는데 중계다리의 의미에 지나지 못한 것인즉 원래 고부인(高夫人)의 신통력으로 포교활동이 벌어졌으나 이미 교단의 기초가 확립된 이제에 와서는 벌써 고부인(高夫人)의 사명은 다하였고 경석이 정면에 나서서 천사(天師)의 도통(道統)을 이어 세계경략의 대사명을 실천할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고부인(高夫人)이 교단에서 이탈한 것은 천사(天師)께서 규정하여놓은 도수이니 이제 와서 고부인(高夫人)을 신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오. 경석을 신뢰하고 따라서 대업을 함께 이루는 것이 천사(天師)를 믿는 참뜻이라고 주장하였다.

<증산교사(甑山敎史)>*또 천사(天師)께서 기유년(道紀 39, 1909) 정월 초이튿날 본소 문밖 버드나무 아래서 경석에게 『곤이내(閫以內)는 짐이 제지하고 곤이외(閫以外)는 장군이 제지하라』고 말씀하신 일은 곧 경석에게 대도의 종통(宗統)을 전하여 주신 공사이며 『천고춘추아방궁 만방일월동작대』라고 써 붙이신 것은 진시황이 여(呂),영(嬴) 두 성(姓)을 가졌고 조조가 하후(夏候), 조(曺) 두 성(姓)을 가졌던 옛일을 끌어대여 경석의 실성(實姓)이 정(鄭)씨임을 암시하신 의미라고 선전하였다. 이 선전과 포교방법은 큰 효과를 내어 흩어진 신도의 대다수를 수습하고 경석에게 신뢰감정을 옮김과 동시에 교단의 재건에 성공하게 되었었다.
 
이상은 이상호가 보천교신앙 초기에 보천교신도를 규합하는데 큰 역할을 한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내용으로 태모님은 낙종물 도수로 사명이 끝난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수가 있읍니다.그리고 차경석도 이종물도수라고 알고 있엇고 차경석을 띄우면서도 혁신운동을 빌미로 교권을 탈취하려는 정치적 행보를 이어 갑니다. 상호는 자신이 추수하는 사명을 맡은자로 강한 의식이 평생작용하였다고 보여지며 해방후에 의통제작과 병겁이 오지않자 대실망을 하고 실명된상태로(녹내장이 심하여 시신경이 소진된상태로 추측됨) 지내시다가 육십년대 중반 돌아가시고 같이 충격받은 이정립도 일년후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상호형제 14-06-27 11:57
 
이상호 이정립 형제~ 
 글쓴이 : 향수  조회 : 622   
 

증산도 전역사를 정치 난법판으로 몰고간 이상호는 1888년생이고 이정립은 7세 아래이며 막내 동생 이순탁은 11세 아래입니다. 이순탁은 보천교 자금으로 일본에 유학하여(보천교연혁사)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나 은혜는 잊어버리고 신앙을 바꾸어 기독교 골수로 변질되어 돌아옵니다. 연혁사에 나오는 순탁은 해방후에 요즘이면 재정경제부의 최고위 보직까지 역임하여 일세의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상제님이 쓰신 차경석보천교 교주는 기국과 도량이 광대하였으며  부귀영화보다는  보천교 내내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산으로 전국으로 도피생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차경석교주가 태모님을 신도들과 분리시키는 사건도  보천교 초기 이상호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2변의 육이오 동란, 서울 한강다리가 폭파되었을때 마지막으로 한강에서 배를 타고 운산 태사부님이 건너오실 때 동행한 사람이 이정립 그리고 이정립 처남 장상달 그리고 보천교담당형사 였던 근하 이종명이란분 이었다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강을 건너 오산까지 걸어가셧고 그 후에 온양까지는 차를 타고 가셨다 합니다.


 오산까지 왔을때 이정립은 어린 처남 장상달을 네 갈길로 가라 며 내 쫓앗다고 합니다. 당시에 하늘에는 폭격기가 날아다니고 위태로운 전쟁난민사이에 사람의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때, 냉정하게 내쫓는 것을 보고 참 비정한 사람이구나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이정립은 태사부님이 도제인 배동찬씨의 연맥으로 장씨부인과 결혼을 맺어준 인연이 있습니다.)


 운산 태사부님은 장상달을 데불고 서산까지 가는데, 용돈을 두둑히 주어 고향에 가 있으라고 하였는데 후에 이정립 부인에게 왜 장상달이를 여비도 안주고 내쳤느냐고 크게 원망을 뒤집어 쓰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보천교 연혁사를 쓴 간부들의 눈에 의하면 이상호는 교를 위하는 인물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머리는 좀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찍이 해방전후시기에 상제님 사업을 하려고 마음먹은 운산 종도사님은 주유천하 하실때 전주 금남면 황사고개 인가에 사시는 박공우 성도님의 수제자 인 송종수를 만납니다. 송종수님은 당시에 의통제작을 하고 있으셨다고 합니다. 그해 6월경에는 정읍으로 옮겨다니며 의통제작을 합니다.이때 의통에 대해 자세히 아시게 됩니다. 송종수 씨는 뒤에 대전 대흥동에도 사셧는데 도모님이 돌아가신후 송씨문중에 잠시 가묘하시는데 도움을 줍니다.


  정읍도장이 있던 시기리에서 대흥리 까지는 도보로 약 이십여분 걸리는 거리인데 그곳에 이한우 김순탁이라는 분의 집에서 이상호를 처음으로 만납니다. 보천교 신도였던 윤설 이라는 분 함우영 김태성이라는 분도 있었다 합니다. 그 인연으로 이상호 집으로 가게 되는데 이상호 방에 가니 이상호가 박공우 선생의 의통전수해준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때를 모른다 하면서~ 지금처럼 의통을 만들고 있었다 합니다. 이상호는 의통은 육임이 사용하는 것인데 함우영이라는 사람이 의통제작에서 빠져나가면서 한사람이 비니 운산 태사부님에게 자기 연비로 들어오라고 하는 말을 하는데 태사부님은 웃음으로만 대하였다 합니다. 그때 이상호는 거의 실명단계로 시력이 아주 안좋았다 합니다.
 
2변의 대법사는 전부가 태사부님이 짜신 판입니다. 대법사 이름도 젊은 태사부님이 지으신것이고 이상호와 태사부님은 같은 방주로 초기 조직은 모두 총사수이신 태사부님이 짜십니다. 보천교 초기처럼 수방주 목방주 토방주등,  육이오 전후에 운산 태사부님은 의통제작에 전 재산을 올인하는데 이상호 형제는 의통성금을 유용하는등 용처를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도제들을 상위에 앉게하는등 조직을 전횡하고 젊은 태사부님을 지금으로 치면 왕따를 하여 뒤에 육십년대 초기까지 이상호 형제의 살해 위협속에서 떠돌아 다니게 됩니다. 이정립은 증산교사에서 아주 내용을 비틀어 버립니다. 증산교사는 뒤에 이정립의 아들이 출판사를 하면서 내놓게 되고  저간의 사정을 잘 모르는 홍성렬 씨는 이정립의 왜곡된 소식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홍성열은 그 형이 먼저 신앙을 하였는데 아산방면에 사시던 박제근 이라는 신도가 형제를 보살펴주고 공부도 가르치고 하였다고 합니다. 홍성렬은 아버지가 홍만표라는 분으로 상제님을 극렬 비방하는 분이었으며 홍성열 어머니는 강물에 빠져 돌아가시는 비운을 맞았고 그 충격인지 홍성열은 젊은 초기에는 카톨릭인가를 신앙하다가 다시 증산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홍성열은 태모님을 인정하지 않는지, 대법사에 모셔져 있는 태모님 진영을 떼어 발로 밟는 난폭한 행동을 하여 그것을 지켜본 오성산 신도들은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오성산신도에게 최근 들음)


이상~ 삼변 초기 약 삽십수년전에 보문산 대사동에서 태사부님에게 이변에서 삼변 바뀌는 말씀을 듣고 요약해 놓았던 것을 찾아 간단히 올립니다.




 더 많은 운산 종도사님 강의록을 알고 계시는 분은 좋은 자료를 올려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 14-06-27 11:59
 
향수 14-04-03 16:33   
홍성열님의 형제는 어릴때 아산방면 신도 박재근님이 보살피고 공부도 가르치고 하엿는데, 쌀한톨 가져와서 공부한바가 없다고 천안도장 다니시던 박재근성도님이 증언해주신바 잇읍니다.지금도 박재근 성도님은 돌아가시지 않고 도장나오시는지 알수는 없읍니다. 사람은 사소한 일상에서 정의로워야 한다고 생각해봅니다. 증산도 사상연구회 초기 배용덕 회장은 중풍으로 왼손으로만 글을 쓰시곤 하엿는데(두번이나 직접 뵈옴)홍성열님이 회장 내놓으라고 여러번 강요하여 괴롭다는 말 피력~

안타까은 최후를 맞이하엿으나 그의 신앙은 신앙대로 지극히 존중해주어야 하나 정치적 행보는 나름대로 평가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변의 대법사는 전부 다 운산 태사부님이 일구셧으나 당시의 이상호 정립형제의 정치적 행보와 그리고 신도들이 대다수 총사수님이 어리다는 의식이 잇엇는지 조직속에서 실제로는 모두 운산 총사수님을 배반하고 상호형제에게 붙은것으로~~(운산 총사수님은 일개 부장으로 격하시키기도,. 증산교사에서) 운산 태사부님은 젊은 실무진으로 교권을 쥐려는 의식이 전혀 없엇읍니다. 당시의 김종렬이라는 분이 임술교를 만들어 교주하시라고 종용하엿으나, 사양하시었다고 하셨음~ 총사수 라고 적힌 교적부를 직접 보았음~~그때의 존함은 안흥찬 이시엇음
 홍성열님의 형제는 어릴때 아산방면 신도 박재근님이 보살피고 공부도 가르치고 하엿는데, 쌀한톨 가져와서 공부한바가 없다고 천안도장 다니시던 박재근성도님이 증언해주신바 잇읍니다.지금도 박재근 성도님은 돌아가시지 않고 도장나오시는지 알수는 없읍니다. 사람은 사소한 일상에서 정의로워야 한다고 생각해봅니다. 증산도 사상연구회 초기 배용덕 회장은 중풍으로 왼손으로만 글을 쓰시곤 하엿는데(두번이나 직접 뵈옴)홍성열님이 회장 내놓으라고 여러번 강요하여 괴롭다는 말 피력~

안타까은 최후를 맞이하엿으나 그의 신앙은 신앙대로 지극히 존중해주어야 하나 정치적 행보는 나름대로 평가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변의 대법사는 전부 다 운산 태사부님이 일구셧으나 당시의 이상호 정립형제의 정치적 행보와 그리고 신도들이 대다수 총사수님이 어리다는 의식이 잇엇는지 조직속에서 실제로는 모두 운산 총사수님을 배반하고 상호형제에게 붙은것으로~~(운산 총사수님은 일개 부장으로 격하시키기도,. 증산교사에서) 운산 태사부님은 젊은 실무진으로 교권을 쥐려는 의식이 전혀 없엇읍니다. 당시의 김종렬이라는 분이 임술교를 만들어 교주하시라고 종용하엿으나, 사양하시었다고 하셨음~ 총사수 라고 적힌 교적부를 직접 보았음~~그때의 존함은 안흥찬 이시엇음
 
 진심견수 14-04-15 19:39   
홍범초도 불의하고 욕심많았던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요  스스로  불의했던 이정립 후계를 자처하지 않을 수 없었겠네요.
그런데 생전에 왜 그렇게 자신의 실제 스승인 안운산 종도사를 매도하고 했을까 했더니 남주 이정립 선생의 과거가 그러네요...


의통제작 14-06-27 13:28
 
운산 태사부님 총사수 2변 625전쟁과 의통제작~ 
 글쓴이 : 향수  조회 : 917   
 
< 2변 도운 121(1991).3.7>
*6.25를 맞이하면서 서울서 한강다리 끊은 뒤에 내가 서울에 있으면서 내 동생이 전농동에 서울 시립대학이 처음 생길 때여. 동생과 처남이 입학을 할때여 입학해서 등록금까지 다 냈을 때여. 그러구 나는 뭐 상제님 사업하러 여기 저기 다니는 사람이니께. 그 때 마침 서울에 있었구. 그래서 같이 말여. 이 정립 씨 그 누구누구 그 처되는 사람 누구 여럿이 일행이 말여. 저 김 종영이라고 말여. 보천교 담당하던 형사라고 있어, 호는 근하라고. 모두 휩싸여서 수원까지 걸어와 가지고, 그래서 오산서부터 차를 탔어. 그래가지고 온양온천까지 와서 머물러 있는디,

이정립이 처남 장상달이라고 있어. 서로 상자에 통달 달자 장상달인디.  걔 집이 울진여 울진. 헌디 걔를 내던져두고 가, 이정립이가. 제 처남이고 여자에게는 제 친정 동생인디. 거기다 떼 내던지고 너는 너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저 연놈이 말여 사람도 아니고 말여. 제 처남이요 어린앤디.  그게 그때 아마 서울서 고등학교 다녔던지 아마 그렇게 됐나봐. 헌디 그걸 어떻게 떼내 버리고 가나 제 동생 제 처남을. 그래서 헐 수 없어서 내가 더불고 집에 들어왔어, 내가 더불고서. 그랬는데, 우리 어머니가 위암에 걸려서 말여. 나는 우리 어머니가 위암 때문에 말여, 참 양방에 무슨 방법이 없나 해서 그렁저렁해서 서울을 갔을 때다 이 말여.  상제님 사업도 사업이고. 그러니께 나는 어디로 갈 수가 없쟎어, 집으로 가야지 말여. 자식 된 도리에 어머니가 말이여 중병에 처했는디.

집에 들어오면서 내 아우, 처남, 장상달이 이정립 처남, 그렇게 떡 더불고 집에를 와서 보니께 그 숱한 얘기 다 못하지만 저 당진에서 이이영이 말여 저 지식 많다는 사람. 아니 이이영이가 무슨 지방에서 무얼 어떻게 잘못했간디 내 집으로 피난오고. 또 인천 경찰서 그 사찰계 말여 형사 하나가 김 상록이라고, 월미도 갔다가 보도연맹 200여명인가 300명 말여 총살시키고서,  가만히 내가 이 평생에 와서 친구 새긴 중에서 나를 가장 아껴주고 덕 있고 피난할 데가 어딘가 생각해 보니 나밖에 없더라네. 내 집에 왔어, 처자를 더불고서. 나밖에 없더라 이 말여. 그래서 피난민이 우글우글해.

그런디 이제 달포 후에 암투병중인 내 선비께서 돌아가셨어. 그래서 초상상제로서 장례모시고. 그런데 장례 모시기 전에 우리 어머니가 병중에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나 사는 동네 이름이 지사여. 지초 지(芝)자 모래 사(沙)자 지산(芝沙)디 그 지사 고개에서 너를 잡는다고. 또한 우리 집에 있는 김 상록이를 잡는다고, 형사를 집에 두었다고 말여. 그랬다고 사람들이 잔뜩 넘어온다 말여. 그런 꿈을 꾸었다고 내 선비께서 그려. 내 선비께서 영이 얼마나 밝았든지 이렇게 천서를 받아쓰고 그랬어, 천서. 공부해서 그렇게 주문 읽어서 그렇게 영이 밝으셨던 양반이고 그랬어.

그러자 조금 있으니께 어떤 기별이 오느냐 하면. 저 안 아무개 집에 경찰가족을 두었다. 그래서 그걸 잡아 올라고 한다고 말여. 곧 넘어온다 말여. 빨리 조치하라고 그래서 그 사람을 보고서 사분지 지여차 한디. 여기 있어서 나하고 같이 당하고 싶으면 여기 있고, 한 발짝이라도 가다가 죽구 싶으면 가구. 그건 자의에 맡기니께. 물론 내가 살고 싶으면 김 상록이를 내가 잡아서 주면 내가 산다. 허지만  나 살기 위해 가지구서 살겄다고 찾아온 사람을 내가 사람잡아줄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나는 차후문제고 하니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찾아봐라.

사태가 이러니 허면 내가 떠나면 안 형이 말여 대신 내 죄를 당하는디 그래도 괜챦으냐. 아, 그건 다음 문제 아니냐. 나야, 그건 그시 그시 말여 적절한대로 해야 될 거 아니냐. 허니께 가고 싶으면 가고, 여기 있고 싶으면 있고, 내가 구태여 내쫓든 않겄다. 허니께 자의에 맡기겄다. 그 소리가 떨어지니께, 신발도 안 신고 도망 가. 그래서 그렇게 하면 남들이 이상하게 보고 하니께, 신발 신고. 그리고 가다가 먹어야 할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 안 사람 보고서 쌀도 좀 퍼다 주고 말여, 숨도 좀 돌려 가지고 하라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보냈어. 보냈는디. 그 뒤에 그 사람은  잘 살고. 이제 인천 수복 뒤에 경찰노릇도 하고 그랬는디 그 사람이.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만났어. 뭐 세상은 그런 거 아녀. 그런디 이제 그런 때 사람을 봐. 내 선친께서 그러면 네가 당하지 않냐. 당해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 같으면 살기 위해서 말여 그 사람 잡아주겠습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뉴. 그러니께 내 선친께서 참말로, 참 난감하신 표정을 내 머릿속서 눈 속에서  떠오르고 그러는디.

그때에 그 이 정립이의 처남 되는 애가 내가 어떻게 소화하는 수가 없어서, 산에 가서 저 삽정이라도 따는 척 하구 이렇게 저렇게 해서 저녁이면 와라, 밥 싸가지고 나가서 말여, 그렇게 해서 한참 뭐할 때 얘를 피난을 했어. 9.28 수복을 하고서 아마 얼마나 있었는지 내 기억이 안 나지만, 해서 우선 너 가는디가 용화동이 가장 쉬우니께. 거기루 해서 차를 타게 되면 타고, 걸어가게 되면 걸어가고 해서 슬슬 가라고 그런대로 말여. 충분히 여비가 될 수 있는 것을 주어 보냈는디,

안 흥찬이 같이 못된 놈이 말여, 여비도 제대로 안주어 보냈다고. 그게 이정립 마누라가 하는 소리여, 병여 그게. 이 정립이하고 이 정립 마누라가 하는 소리여. 아니 그 죽는 세상에 3개월인가 4개월 동안 좋은 밥 대접했고, 편안히 잠자리 제공해 줬고, 아니 잘 살려서 그렇게 해서 여비 줘서 저희들도 버린 애를 잘 살려서 그렇게 해서 여비 줘서 저 갈디로 보냈으면, 그게 다만 고마울지언정 욕할 필요가 없는거거든. 그게 그 사람들 세계여.

6.25 동란 과 더불어 그 와중에도  내가 집에서 의통을 준비했어, 의통을 나름대로. 그래서 그 당진의 이 이영이라고 하는 사람보고 다만 한 장이라도 좀 찍어라. 의통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딴 사람은 경제력이 없어서도 못혀. 하고 싶어도 암만 하고 싶어도.  아니 경면 값이 얼마구 말여 그걸 하는 재주가 있나. 그건 막대한 돈을 가져야 하는디 그걸 뭇하쟎어, 내가 그걸 집에서. 그러니 죽냐 사냐 하구, 쌕쌕이가 비행기가 다니면서 다다다다 하고 말여. 그냥 그 판에 거기앉아서 의통 준비할 사람 있나? 하여튼 상제님 사업에 내가 머리가 간 사람여. 지금 생각하면 머리가 돌았지 말여. 거기 앉아서, 그 판에 앉아서.  그렇게 해가면서 내가 의통준비를 하고 있어.

헌디 그게 다 소문도 다 퍼지고, 신도들끼리도 저기 안 선생님은 집에 읹아서도 말여. 6.25때도 의통을 준비했다고 세상에 다 퍼지고 그럴 거 아녀. 그때 1.4후퇴 때가 언제여, 1.4 후퇴 때 눈 많이 오고 말여. 저 김 윤근 방위군 사령관이라고 해서  대구에서 식량 다 빼먹고 말여 다 굶겨죽이고 할 때 말여. 1.4 후퇴 때 다 나가라 하는디 말여 나혼자 만 있을 수 없쟎어. 그래서 내 막내아우만 더불고서 이렇게 하구서 지금 애들은 다 큰애도 그렇고 작은애도 그렇고 다 쪼끔 쪼끔한 애들여. 허니께 그건 뭐 다 더불고 갈 수도 없고 지 어미하구 그냥 집에다 두는 수밖에 없쟎어. 집도 지켜야 허구. 또 우리아버지도 기시고.

그러구서 세상 사람이 다 이불 봇짐을 걸머졌지. 한데에서 잘못하면 얼어죽지. 하지만 나만은  하두 콩알 틀어박히듯 신도들이 많으니께, 그냥 지금처럼 옷 잘 입고 오바 입고 구두 잘 신고, 상제니께 상제표시만 하고. 가며서 가며서 자.  그러구서 내가 공주에 떨어졌는디. 공주에 떨어져 가만히 생각해 보니께 거기도 젊은이들이 이리저리하구 안되겠어. 대전에 와서 보니께 암만 생각해도 뭐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헌디 아는 사람을 만났는디 나보고서 경찰을 하라고 혀. 그래서 내가 순사를 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웃것다.

그런디 누가 그려 그러면 정훈장교를 한번 해보라고. 그런디 그 정훈 책임자가 대전에 와 앉아있어. 내가 그런대로 아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그 사람과 상대해서 내가 정훈장교가 됐어. 그래 가지구서 대구를 가서 방위군 거기를 가서 밥도 얻어 먹인 사실도 있구 헌디. 시간관계상 그 숱한 얘기를 여기서 다 못혀. 그러구서는 772 부대라고 거기 이제 비상시 춘향전이라고 만들어 가지고서 말여. 대원을 마흔 몇 명 조직해서 말여 그걸 더불고서 나 가고 싶은대로 여기 대전도 와서 공연도 해주고. 나 가고 싶은대로 가서 말여.

내가 춤추는 것도 잘 알고 말여. 내가 책임자니께 말여. 그건 그 단원은 경찰서에 갖다 맡기면 밥값 딱 치러줘. 부대들 데려다 위안도 해주고 말여. 그게 선무반여 선무반. 선무 공작대여 그러니께. 지금도 사진 있어, 내가 군복을 입고 장교가 떡 되가지고 한거 그런거 말여. 그 짓을 하다가 대산 내 고향엘 가서 공연을 해 주고서 그걸 내가 본대(本隊)로 너희들 가거라. 아니 대장님은 왜 안가십니까. 안 가도 괜챦어 가. 그러니께 그놈의 군대 쳐놓고 참 맹랑한 군대노릇을 내가 했지. 우리 집에 가니까 참 잘살고 집도 크고 참 그 좋은 닭 잡아서 실컷 두드려 먹고 말여, 여비 한 주먹씩 줘서 모두 다 본대로 입대시키고 말았거든.

그러구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가지구서 군복을 벗어 내던져 버리고 그럭하구서 공주로 해서 청양으로 해서 부여 가서 떡 누워 가지고서 아니 한강 이남을 범치 못하리니 괴병이 맹습하는 까닭이라. 그런 거 있지? 그때 한참 싸울 때여 그 후로도 2년 후인가 정전 되쟎었어. 그러니께 의통준비를 해야 된다 말여. 그러니께 상제님 진리가 그렇게 되져 있어. 나도 진리에게 그렇게 쏙았다 이 말여 그때. 그래서 부여군 내산면 마전리라고 하는 디가 있어. 안 내(內)자 묏 산(山)자 내산면(內山面) 삼 마(麻)자 밭 전(田)자 마전리(麻田里) 소동명은 삼바실이라고 하는디여. 거기 이 평국(李評國)이라는 신도가 있어. 평할 평(評)자 나라국(國)자.

이평국 신도 집에 가서 좌정을 하고 여기는 안방이고 그 위에 윗방, 그러고 이제 사랑채도 있고 다 있는디 선생님이라구 윗방에서만 있으래. 전 가족이 다 기가 막힌 찰 신도여. 윗방에서 한 달 이상 아마 거반 두어 달 있었는데 거기 있으면서 내가 신도들에게 의통준비금을 모금을 했어. 모금을 해 가지고서 말이 그렇지 말여 같이 일하고 허면서 그 늙은이들이 굶어죽는다든지 굶어죽지야 않지만 그 됐어?. 쌀 댓 가마 값 우선 보내도 주고 그 심부름은 청양군 증산면 해남리 강 태익(姜泰翊)이라는 사람이 꼭 중처럼 생겼어. 누가 봐도 중여. 머리도 빡빡 깎고 말여. 멋거리가 없는 중여. 당신은 누가 봐도 중이니께. 아니 뭐 세상에 심부름을 하기에 적임자여. 허니께 용화동을 다녀와라. 해서 그런 사람 심부름 시키고.

그러면서 이제 거기서 떡 있어가지구서 전주 이런 디를 사두방이 대전 어디 이런 디를 더듬어 가지구 그때 내가 경면주사를 많이 샀어 많이. 많이 사가지구 용화동을 떡 가가지구서 그걸 갈구 이렇게 가지구서 거기서 본격적으로 내 의통준비를 했거든? 그걸 매련하는디 근 1년을 했어. 1 년을 하는디 능률이 안 올러. 박 기백이 아들 그 박 주호라는 애고, 또 배 동찬 아들 걔 이름이 뭐인가 배 뭐신가 이제 이름 잊어버렸네. 지금이야 뭐 걔들도 50 이상 아마 그렇게 안 되었나 몰라. 지금이야 이제 늙은이 노릇 할 테지. 헌디 그런 애들 불러다가 애들이니까 말여, 우체국 같은데 가면 냅다 일분 찍는디 다다다다 손이 그렇게 빠르거든.

그 대신 사바하 안 찍어진 데 있고, 사바하는 잘 찍어졌는데 훔치훔치 안찍어진 데 있고, 반밖에 안 찍혀 반. 그렇게 해서 전부 지구에 누구 보내 파견할 신도까지를 조직하는디, 신도가 너무 많어서 말여 신도가. 소화할 수가 없어 소화를. 그래서 아! 이게 포교를 무대뽀로 많이 해도 안 되겠구나. 소화를 시킬 수가 없어. 그때 조직을 해 보니께. 그래서 갱신히 말여 뜯어고쳐가면서 당진의 이 이영이하고 고 석봉이라고 하는 신도를 더불고 가서 작성을 하는디 거기가 어떻게 돼가지고 있냐하면 용화동이 낮에는 대한민국이고 밤에는 인민공화국여 거기가. 모악산 거기로 전부 빨치산 말여.

그러니께 원평와서 말여 집 한 채를 얻어 가지구서 거기 와서 그런 것을 작성하고 의통준비를 하고 그랬거든. 그렇게 해 놓고서 집이를 딱 이제 와서 치성을 모시고서 내가 대 휴게기다. 대휴게기 이 게한다는 게자를 쉴 게라고두 혀. 쉴 휴 쉴 게. 포교 더 하지도 말고 현상유지 그냥하구서 내가 때 되면 나오마 때 되면. 그때 내가 최종적으로 가진 게 하나가 있어.. 내가 운영회 회장여. 운영회 회장. 재정관계로 그런 걸 하나 만들자고 해서, 그걸 벗어놔야 하는데 그걸 못 하구 말여. 까막해 가지고 못하고 들어 앉았는디.

의통준비를 하면서 용화동에 못 있고서 이 상호 씨 가족이 어떻게 돼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원평서 조금 올라가면 금산 중학교인가 있어. 거기가 쌍룡리여. 사과밭 많이 있고 한디 500미터 올라가나 한 1000미터 쯤 올라가나. 금평호 밑에 바로 맞은 짝에 조그만 집하나 얻어놓고서 일부는 거기 있어가면서 이제 의통준비도 한동안 거기서도 했어, 원평 내려오기 전에.  이  상호 씨 부인하고 말여 이 원호 씨하고 그렇게 싸우고 말여. 그러니께 이 원호씨 하두 뭘하니께 내 며느리만도 못한 년이 말여. 그 또 그이도 굉장하거든 어쨌든 이 상호씨가 더불고 사는데 말여 막 년자까지 대가면서...그러니 이상호씨 부인도 저 놈의 영감탱이 개새끼라고 말여. 그 뒤 이 원호씨가 떨어졌나 했더니 떨어지지는 않고 말여.

밀양에 도 순조라는 한의원이 있어 신도중에. 헌디 이 원호가 도 순조마누라를 어디가 수련시킨다고 더불고 가다가 중간에서 비온다고 어디 데려가서 강탈해 버렸어. 그때 늙은 놈여 이원호가 60 넘었어 그때. 도 순조가 죽을 때 눈을 못 감고 눈을 뜨고 죽었다는겨. 이 원호한테 마누라 강탈당해서 너무 분해서 눈을 뜨고 죽었다. 그건 뭐 내 신도들에게 들어서 하는 소리고. 자 이상호 부인도 그렇게 못돼 먹었고 이원호라는 사람도 중진 간부라는 사람이 그렇게 못돼 먹었고. ~~~~~


※ 혁명은 증산상제님의 갑옷을 입고 행하는 성사재인이다
※ 밀알가입은 RenewingJSD@gmail.com (개인신상은 철저히 보호됩니다)

향수 14-04-15 11:47   
6,25 서울 한강다리 넘어올때 이정립 부인도 같이 잇엇읍니다. 어린 동생 처남을 전쟁통에 패대기 치는 그런 인성의 인물입니다. 사람은 위기시에 사람의 진면목이 들어난다 합니다.

일독하시면 별거 아니지만 참 중요환 대목이 많습니다. 지고 지난한 천하사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 로움(충의로움)이라고 하셧읍니다. 대인대의 겟지요, 의로움은 사람을 움직입니다. 의로움은 권위를 방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직은 절대 신이 아니라 실수도 합니다.그러나 대국적으로 의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의롭지 못하면 언제나 떳떳지 못하고  숨어서 밝은 세상을 못보게 됩니다. 관운장이 충의로움으로 성제군이 되셨다고 하셧읍니다.의로움이 그 사람의 덕이요 재산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운산 태사부님을 폄하하는 편향된 시각을 가지신분들은 대국적으로 보시는 눈이 확장되기를 희망합니다.
 6,25 서울 한강다리 넘어올때 이정립 부인도 같이 잇엇읍니다. 어린 동생 처남을 전쟁통에 패대기 치는 그런 인성의 인물입니다. 사람은 위기시에 사람의 진면목이 들어난다 합니다.

다나 14-04-15 17:38   
향수님 좋은 자료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항상 강건하시길 상제님 태모님전에 기도드립니다.

멸마 14-04-15 12:35   
음... 역사의 고갱이 한토막 잘 배우고 갑니다
 
서당개3년 14-04-15 14:29   
잘보고 배우고갑니다.

신록 14-04-15 14:49   
역사속에 진실이 있지요. 이정립을 우상화하는 양반님들 꼭 세번은 읽어 보세요. 지도자의 인성은 중요헙니다. 털보에게 붙은 파리님들도 삼독해 보세요. 털보의 욕지꺼리 수준으로 잣대질 해보세요.
 
괜찮아 14-04-15 17:32   
그게 다 좋은세상 만드려는 것보다 천자욕심이 더 커서 그렇습니다. 이상호 이정립 두분도 공은 많으나 근본적으로 천자욕심으로 신세를 그르친겁니다. 환각제마마께서도 부디 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제정신 찾츠시기를 바라나이다.
 
향수 14-04-16 11:05   
천자욕심보다는요 아마 공세우고 싶은 욕심이 많아서 그럴거라고 생각합니다.1변 차교주 때는 다들 그 당시에 세 새상이 오는줄 알았고요~문제는 인성이 못되먹고 무책임한 상호형제들은 보천교 자금해먹고 만주로 도망가서 다 빼았기고 돌아와 다시 용서해 달라고 하더니 사기나 치고 ~
 
사오미개명시대 14-04-15 17:51   
이런 내용이 많이 퍼져야 오줌 똥을 가리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번지수를 못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잘못된 집안 고치고 정신줄 놓은  식구 바꾸랬더니 이웃집 사람 불러서  부모고 조부모고 모두 도둑놈 미친놈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향수 14-04-16 10:57   
똥 오줌 못가리는 사람들~ 혁명의 틀을 깔아 놓으니 된장인지 똥인지도 모르고 어디서 엉뚱한 소리는 듣고서 마치 처음 듣는소리인양 기고 만장하는 사람들 도 잇어요, 황원택이 홍성열 자기 뿌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다시 재입도 하라고 날뛰는 사람들 소리를 듣고서 무슨 굉장한 것인줄 알고~
그 못된 놈들이 괴정동 스레트도장 잇을때도 찾아와 태사부님 폭행하고 그랫어요~ 홍씨는 불의의 죽음은 안되엇지만 맨날 제 뿌리 잡아먹으려 들고 수많은 사람들과 소송이나 하고~이게 다 누구 기운이겟나요~ 모르고 하는일이나 가만히 보고는 잇지만 사람은넘어서는 안될선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번 밷은 말은 다시는 돌이키지 못합니다.
 
진달래꽃 14-04-16 13:31   
헉.. 홍성렬씨가 그런 사람이었군요..
희귀자료와 정보 감사드립니다!

진실의 힘 14-04-15 18:05   
이상호 이정립 씨는 대순전경을 쓴 공은 분명히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태모님 시절부터 보천교 시절 그리고 해방이후 안운산 태사부님에게 행한 거의 조폭 수준에 가까운 도적놈같은 행적을  보면 결국 그들이 오매불망 꿈꾸고 염원했던 해도진인출과 "2인" 추수사명자의 꿈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었고 60년대 중반 헛되이 선화하여 물거품이 된 것은 결국 이렇게 후학들이 그들의 역사적 실체를 알게 하는 것으로 그 악명을 되새겨졌을 뿐입니다. 흉화개는 흉실입니다. 대인대의는 무병이라는 큰 대의를 생각하면 안운산 태사부님 대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대결은 2변 무대에서 외견상으로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케이오 승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상제님 천지공사의 진실은 분명이 다른 곳에 있는 것 같군요. 끝까지 파라하신 상제님의 말씀을 수없이 천착해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그 뜻은 마치 스무고개 찾듯이 진법이 숨겨져 있을 뿐 알고 나면 정답은 오히려 간단할지도 모른다는 공안이 아닐까 합니다. 진리는 늘 단순한 데 있고 늘 자신의 집 처마밑에 있다.
 
달밤 14-04-16 06:33   
자신의 집 처마 밑에! 무지개가 산너머에 있지 않듯!
 
천사 14-04-16 10:37   

육이오 전쟁발발시에 태사부님은 서울에 계시엇었군요
그 당시만 해도 이정립도 결혼중매도 시켜주시는등 사이가 원만하셧엇는데 처남 내치는것보고서 못된넘이라고 생각하셧나 봅니다.  의통은 만들려해도 지극정성과 뱃장 어마한 돈이 들어가므로 아무나 만들수는 없는거라 보입니다.

교언영색은 선의인이라고 말로 궤변에 능한자들은 착한사람이 드물다는 말일것입니다.
이상호는 청맹과니 엿으며 실제적으로 더 므된인간은 이정립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현 털보대왕은 뉘우치면 착한 사람도 될수 잇겟지만 그 므듼 성격을 고치지 못하면 올해에 자멸할것 입니다.
 
길화개길실 14-04-17 10:15   
상제남 천지공사는 세운과 도운이 모두 비빔밥처럼 비벼져 있습니다. 선과 악으로 비비고 청실과 헝실로 비벼서 서로 인연의 대립과 모순으로 흘러가듯 하게 합니다. 그 속에서 선과악이 드러나게 되는 가 봅니다. 그러면서 영롱한 진주가 한과 눈물속에 잉태되듯이 올바른 종통의 모습도 보이는가 봅니다. 아직도 안개 속에 드러워진 그 모습이 묘연해 보이지만....그 너머에는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항상 의로움 속에 있지 위에서 보듯이 이상호 이정립으로 해서 홍범초로 흘러가는 불의의 정신사 속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그랬기때문에 동화교 통합교단에 잠시 몸을 맡겼던 태모님이 조강맥식이라도 용화동 동화교 신도가 아니라 조종골 신도 위주로 새로 짠 오성산 신도 데리고 천하사한다고 하셨을까요. 그랬군요.  그랬습니다. 참 결론같은 태모님 말씀인데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요.
 
향수 14-04-17 10:43   
정말 상제님 천지공사는 오묘합니다. 오직 정의로움속에 진실이 잇다는 말씀에 너무나 공감합니다.감사합니다.


푸른하늘 14-06-27 15:37
 
아주 길글 되새김질 하면서 잘보고갑니다


성황당그늘 14-06-27 16:22
 
배동찬, 김종렬 등 2변 교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안흥찬 총사수의 직계연비로 안흥찬 총사수의 명을 받들어 집행 된 것으로 이정립은 정작 그 핵심인 안흥찬이란 인물은 쏙 빼놓고 기술했다. 최위석 집에서 치성드린 인물이 10여명 참여했음에도 이정립이 <증산교사>에 간부만 백 수십명 기록한 것도 가공된 허위며 조직도 모두 이정립이 조작한 명백한 거짓이다.(안운산 총사수 증언) 

 이 한부분만 보아도 천자꿈 욕심이 들켜지네요.  통채로 조작은 못하니 자신을 따르는 간부가 수백이었다로 뿌리를 주장하는 거겠죠


성황당그늘 14-06-27 16:28
 
그리하여 비록 그들에게 임명한 명예직이지만 조직적으로 임시 설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때그때 넘깁니다. 그러나 이미 태모님 시절부터 시대일보 사건을 위시 보천교 혁신운동으로 차 교주를 배신하고 격렬히 내치려 한 사건, 김형렬 성도 미륵불교 시절 김 형렬 성도를 기망하고 경전 자료만 취합하고 배신하고 나간 일, 동화교 통합교단 시절 태모님을 철저히 격리 고립시키고 태모님 수석 성도 고 민환 성도를 고립시켜 죽이려고 해 야밤에 도망 가게 한 경력 등을 거치며 이미 흉악함으로 잔뼈가 굵은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순수했던 젊은 총사수의 바램에 절대로 부응하지 않았습니다.

음흉함으로 다져진 인간구렁이대  젊고 순수한 사람의 싸움은 이미 순수한 사람이 지게 되있습니다 ㅋ


되새김질 14-06-27 16:49
 
길을 걷다 문득 어디서 본듯한 길, 지금 서있는 이곳도 본듯하고 소름끼치는 이러한 경험을 데자뷔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현실의 허와실을 간명하게 보게 되네요

“내가 (54년 이후로) 단체에서 손을 뗀 이후에도 서천읍에 사는 김창배(金昌培), 최낙홍(崔落鴻) 등을 시켜 사기하다 철창에 갔다 병들어 누어있다는, 등으로 매타도어시키는데 사람을 모욕해도 그런 모욕을 할 수가 없다. 이상호 형제가 전국의 간부마다 다 내세워 불명예적인 모욕과 모함 이간질을 시켰다.”

나는 정당한 사람이라, 그러지 마라. 바르게 해라. 나는 내가 포교한 사람이고 그들 안녕질서를 책임 질 사람이고 당신들은 곧 죽을 사람이다. 내 몸뚱이 내가 가는 곳이 곧 본부다. 사람이 모이니 그곳을 본부로 정했을 뿐이다.”


“조직을 개창해 만든 나를 따돌리고 조직을 거머쥔 나는 정당한 사람이라, 그러지 마라. 바르게 해라. 나는 내가 포교한 사람이고 그들 안녕질서를 책임 질 사람이고 당신들은 곧 죽을 사람이다. 내 몸뚱이 내가 가는 곳이 곧 본부다. 사람이 모이니 그곳을 본부로 정했을 뿐이다.”
“조직을 개창해 만든 나를 따돌리고 조직을 거머쥔 그 사람들의 재주도 비상하다면 비상하거니와 실제로는 당시 신도들이 이상호 이정립에게로 복종해 들어가 나를 등지고 지금까지 나에게 연락하는 신도들이 단 한 명도 없다.”

 사람들의 재주도 비상하다면 비상하거니와 ----- 사기꾼이란 말을 애둘러 젊잖게 표현했군요


되새김질 14-06-27 17:01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데자뷔현상이군요

당시 해방이후 판을 개창한 안 흥찬 총사수의 조직을 판갈이해 인수한 야심찬 장님 이 상호는 연원의 실제 지도자인 20대의 안 흥찬 총사수가 지금은 어려서 교주에 대한 욕심이 없지만 불원간에 세월이 지나면 조직을 빼앗길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여깁니다.

이상호 형제는 자신들이 이미 인생 황혼기로 접어들었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을 터라 이러한 다급한 상황판단은 그들로 하여금 젊은 지도자를 제거해 후환을 없애는 쪽으로 몰고 가게 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명실상부한 교주로서의 지도자 위치를 원했던 간부들과 실무진으로 포교를 통해 우선 조직을 키우려 했던 젊은 총사수의 간극을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이용했고 지도자를 선택해야 했던 당시 대부분의 연로한 신도들은 거개가 악명은 높았지만 경전편찬으로 나름 권위는 있었던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휘하에 자진 굴복해 들어간 것입니다


되새김질 14-06-27 17:12
 
데자뷔 현상

은행동  장기덕 사무실에서 나와 MBC(충렬탑과 성모여고 사이) 있는데로 와서 도장을 구해 <증산교회>라고 써 붙였어. 홍 성렬이란 놈이 증산교 대전지부라 써 붙였다고 한다드냐 트집도 잡고 있는디 증산교란 게 내가 한 거지 이 상호 이 정립이 한 것이 아니다 이거여. 사람도 내 사람이고 , 이름도 내가 만든거고 말여. 증산교라고 한 게 이 대한민국에서  본래 나여. 이 상호 이 정립이가 했어? 그건 정책적으로 말여 강탈해서 뺏은 거지. 뺏은 겨. 

묶어서 얘기하면. 나는 뺏겼고 못나서. 장님에게 뺏겼어. 장님한티. 그러니 눈 먼 장님이 말여 나같이 사나운 사람을 말여 케이오시킬 줄을, 내가 케이오 당할 줄을 그걸 누가 알았나. 참말로 내가 아무리 큰 소리 치고 워찌고 해야 나는 이 상호한테는 두 손 들었어. 허다 허다 도리가 없어서,  야 참 나...지금까지도 허탈해서 말여, 저 쥐 새끼 같은 눈먼 늙은 놈한테 말여. 내가 전국적으로 참 세상이 넓으냐 좁으냐 하고 그 큰 일을 해가지구서 다 뺏겼다.

그러면, 이상호 이정립의 정책도 장하려니와 사실은 당시 신도들이 부응을 해 주었어. 한 놈도 나 찾아와서 용화동으로 다 팔아서 들어오라 하는디 가야 옳읍니까 하는 놈을 지금 이 시간까지 한 놈을 보지 못했고. 내가 집에 와서 누웠는디(20년 말점도 은거) 날 찾아오는 놈 한 놈 없었고.


광어사해 14-06-27 17:24
 
어진 빛이 사해 만리까지 비추는 광어사해의 글 잘 봤습니다. 철 따라 세월 따라 시간되면 사람이 죽는데, 과거 도운속의 인물들이나 현재의 인물들이 가진 욕심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생각합니다. 당장 모면하려는 거짓말을 하고 신을 논하고 상제님 진리를 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신도 상제님도 앞선 파렴치한 사람들이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긴 시간 읽고 느낀 결론이 하루살이같은 인생입니다. 양심보따리 잘 챙겨야 할 때입니다.


잼나는실화 14-06-27 17:56
 
원쓰 오픈어 타임...
그러니까 캐 옛날 예적 이야기입니다. 내가 고딩 이과에서 콩대를 갈려고 빡빡머리 생활을했는데  전교 1등하던 뚱땡이하구, 반에서 15-20등 왔다리갔다리 하던 키 땅딸 못생긴 애하구, 반에서 5등 정도하던 안경잽이 애가 있었습니다. 뚱땡이 아버지는 모기관의 높은 양반이고, 키땅딸 아버지는 학교교사구, 안경잽이 아버지는 의사였습니다.
이 3명이 대학에 들어갔는데 뚱땡이는 s대 의대, 키 땅딸이는 지방대 의대, 안경잽이는 재수끝에 서울 중류급 의대 이케 갔습니다.
의대는 아시다시피 10년이상 공부를해야 합니다. 지금 가장 행복하게 사는애가 누구인줄 아십니까?  이 3명을 다 만나봐서 제가 주관적으로 행복한 애가 누군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가장 행복한 애는 바로.... 그들의 마누라들 입니다. 남자는 ㅈ ㅗ ㄹ 나게 개미처럼 일만합니다 ㅋㅋㅋ


전교 1등 , 반 15등 이딴거 필요 없슴...............................
운명이란 이런거다 잠시 생각을 하던끝에..........  개 미친 댓글 달아보아요


잼나는실화 14-06-27 18:15
 
고딩때 짜고 짠 짠지만 싸오던 말라깽이 친구애가 있었습니다. 위에 의사 동창 애들이 전공이 전부 달라서 안경잽이 재수생은 코째고, 거시기는 키우고, 모시기는 좁혀주는 전공자고, 키 땅딸은 톱으로 쓸고 자르고 꿰매주는 애고, 뚱땡이는 강의도 하면서 특진하는 애인데, 짠지만 싸오던 말라깽이 합해서 4명이 같은반 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짠지만 싸오던 말라깽이 가난뱅이 친구는 아버지가 똥장군 지던 애였든데 한푼두푼 만들어 배추밭을 사들였더랩니다.
이거..........이거...
이놈...........이놈...

돈을 주체 못할정도로 친구중에 가장 잘삽니다.
금싸라기 땅으로 변해서 아버지 죽고 독자라 재산물려 받아서 장가도 안가구 , 세상 좋은 차 다 끌고 다니구, 해외여행 맘대로 가구
결국은 가장 행복하게 살다가  사기 당해서 쫄딱 망했냐구요? 
그 돈 불려서 더 부자 되서 잘살아요 ㅋㅋㅋ


댓글중에서 14-06-27 19:16
 
그때에 그 이 정립이의 처남 되는 애가 내가 어떻게 소화하는 수가 없어서, 산에 가서 저 삽정이라도 따는 척 하구 이렇게 저렇게 해서 저녁이면 와라, 밥 싸가지고 나가서 말여, 그렇게 해서 한참 뭐할 때 얘를 피난을 했어. 9.28 수복을 하고서 아마 얼마나 있었는지 내 기억이 안 나지만, 해서 우선 너 가는디가 용화동이 가장 쉬우니께. 거기루 해서 차를 타게 되면 타고, 걸어가게 되면 걸어가고 해서 슬슬 가라고 그런대로 말여. 충분히 여비가 될 수 있는 것을 주어 보냈는디,

안 흥찬이 같이 못된 놈이 말여, 여비도 제대로 안주어 보냈다고. 그게 이정립 마누라가 하는 소리여, 병여 그게. 이 정립이하고 이 정립 마누라가 하는 소리여. 아니 그 죽는 세상에 3개월인가 4개월 동안 좋은 밥 대접했고, 편안히 잠자리 제공해 줬고, 아니 잘 살려서 그렇게 해서 여비 줘서 저희들도 버린 애를 잘 살려서 그렇게 해서 여비 줘서 저 갈디로 보냈으면, 그게 다만 고마울지언정 욕할 필요가 없는거거든. 그게 그 사람들 세계여

도사에서 과거나 지금이나 이런 쓰레기들 천지니..


     
허망한동네 14-06-27 19:31
 
원래가 간계를 잘쓰는 인간들이 유리한 것은 지 이름 넣는거구 불리한 짓 한것은 지 이름 빼고 남 이름 넣고 역사왜곡 하는게 이쪽 동네 도사를 보면 쭈욱쭈욱 이어져 온게 보여지이다


남주이정립 14-07-06 16:35
 
자신을 남주-남조선이라 한것만 봐도 욕심이 묻어납니다. 청음도 그렇고...해도진인의 주인공으로 착각해 교리의 핵심을 전수해준 차경석 성도와 김형렬 성도를 배신하고 괴롭히고 짐이 붕어하신다는 관념에 평생 산 사람입니다. 누군들 빼앗고 모함하지 않았겠습니까. 고민환 성도도 테러해 죽이려 해 야밤에 도망갔고 태모님도 골병들게 해 오성산으로 속병들어 가시게 한 자들인데...보천교 연혁사에는 여고생 첩과 금은보화로 치장해 만주로 갔다가 조선의 대재벌로 사칭해 다니다가 만주의 사기꾼에게 사기당해 보천교 재산 횡령한 거금 다 잃고 감옥에 간 사실 나옵니다.
이 정립 씨 그 누구누구 그 처되는 사람 누구 여럿이 일행이 말여. 저 김 종영이라고 말여. 보천교 담당하던 형사라고 있어, 호는 근하라고. 모두 휩싸여서 수원까지 걸어와 가지고, 그래서 오산서부터 차를 탔어. 그래가지고 온양온천까지 와서 머물러 있는디,

이정립이 처남 장상달이라고 있어. 서로 상자에 통달 달자 장상달인디.  걔 집이 울진여 울진. 헌디 걔를 내던져두고 가, 이정립이가. 제 처남이고 여자에게는 제 친정 동생인디. 거기다 떼 내던지고 너는 너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저 연놈이 말여 사람도 아니고 말여. 제 처남이요 어린앤디.  그게 그때 아마 서울서 고등학교 다녔던지 아마 그렇게 됐나봐. 헌디 그걸 어떻게 떼내 버리고 가나 제 동생 제 처남을. 그래서 헐 수 없어서 내가 더불고 집에 들어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