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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교 대법사-◎원평에서 의통제작 후 20년 대휴게기를 선포와 이상호에 대한 성도들 반응

낙엽군자 2017. 3. 5.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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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청음 이상호, 남주 이정립두 분을 경제적으로 거두시고 각각 토방주, 토방주 보좌역 사성에 임명해 용화동 본소에 임명하신 안 흥찬 총사수, 운산 성도사님.






증산교 대법사-원평에서 의통제작 후 20년 대휴게기 선포와 이상호에 대한 성도들 반응

    



                                                                청음 이상호 남주 이정립 형제.


 해방이후 2甑山敎 大法社開創雲山 安 興燦 總師首를 만나 결혼(울진출신의 20세 장 도(張玉). 安 興燦 總師首土主(이상호)司成(이정립)任命되었으나 內心 權威否定하고 단체를 組織的으로 奪取하고 증거를 抹殺하기 위해 박복만 등 暗殺團 파견. 甑山敎 大法社正統性僞造하는 原稿를 간직하고 있었으나 證言者가 많아 살아生前 펴내지는 못함. 死後 왜곡된 遺稿를 모아 아들 이용옥이 <甑山敎史>에 삽입出刊. 1960<仙政圓經>發刊되자 과거 형인 靑陰과 자신이 逼迫했던 坤尊 太母 高首婦10天地公事에 대한 神聖性을 비로소 깨닫고 2년만에 <高夫人神政記>를 새로 出刊(1963). 동시에 13천여 평의 제비산 중턱을 張玉() 4(홍기화, 최창헌, 황수찬, 민영환) 5의 이름으로 買入龍華佛敎30만원에 팔린 적이 있어 遺骨自體不確實太母遺骨移葬을 적극적으로 推進해 모셔 정통성을 갖고자 함. <용화도장 지킴이:張玉> 121쪽에 19506.25 직후 醫統製作 당시 鏡面朱砂安 興燦 總師首全量 充當했음을 明白히 밝힘.

 원래는 普天敎 경전 으로 車京石 성도에게 채록한 내용이 증산천사공사기. 日帝에 매수된 후, 國內最大600만 비밀교단 普天敎의 최대 변곡점이 된 사건인 소위 普天敎 諒解사건을 일으킴(車敎主 秘密居處인 함양 모처로(우전리) 警務局 偵探員, 경기도 警察局 搜査要員 5 을 직접 안내해 敎主身上 敎團公開 壓迫). 李祥昊는 일제에 매수되어 조선총독부에 强力獨立運動 秘密 軍資金處秘密敎團 公開化 및 교주 車京石居處身上을 공개화하는 普天敎 諒解사건을 일으키고 차교주를 내쫓기 위해 강력하게 普天敎 革新運動을 벌이다 실패하자 普天敎 財産을 불법으로 騙取해 만주로 도망감. 背師律을 범하며 普天敎 탈퇴 후 다시 金亨烈 성도의 彌勒佛敎에 입도. 彌勒佛敎 경전을 편찬한다고 하여 金亨烈 성도로부터 採錄. 다시 金亨烈 교주를 背信 脫退 후 자료를 합해 <대순전경> 刊行.

甑山敎 大法社 실제 개창자인 雲山 安興燦 總師首 2변때(초복살림. 중복살림을 3째로 상정한 용어) 총 사수 淵源脈의 지원으로 發行. 南舟 李正立<大巡哲學> 역시 安興燦 總師首의 경제支援으로 양복도 사주고 2년간 임경호 집에 下宿費까지 대주며 이나 쓰라고 독려해 世上出刊된 것. 總師首는 이후 南舟의 합정동 金主 최규석씨 집 下宿費도 대주었음. 李正立<甑山敎史> 內容과는 정반대로 甑山敎 大法社 실제 開創者인 수주(水主) 安興燦 總師首가 이상호·이정립 형제를 幹部任命했으나 조직적으로 단체 奪取 後 宗師라고 歪曲 捏造. 敎主직제가 없었던 당시 敎體組織木火土金水 方主制 밑에 東西南北, 春夏秋冬 8교리제도 였으며 수방주(水主) 總師首로부터 이들이 처음 任命받은 실제 職責은 토방주(土主) 이 상호, 사성(司成:土主 아래 명예직) 이정립, 서울 대법사 최 위석 금방주(金主), 밀양 이 원호 목방주(木主), 김 종렬 화방주(火主), 최규석 사성(司成). 敎主職制가 없었던 당시 이정립이 주장하는 종사(宗師), 사성(司成), 찬교(贊敎), 교정(敎正)(水 火 金 木 4), 교령(敎領), 종리(宗里), 종감(宗監) 등의 조직은 청음 남주 형제가 총 사수 20년 은둔 大休憩期 宣言後 조직을 완전 掌握하고 만들었거나 安興燦 總師首 시절은 全無했던 歪曲 捏造組織. 심지어 이러한 날조된 조직체에 남주 이정립은 자신을 결혼까지 시킨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은공를 베푼  안운산 총사수를 일개 조직부장으로 날조왜곡함.

南舟 李正立甑山敎史에서 甑山敎 大法社를 자신들이 開創宗師, 司成을 처음부터 맡은 것처럼 捏造했으나 그들의 連臂李祥昊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甥姪 박임규(朴壬圭) 한 사람뿐이었음. 敎主職制가 없던 당시에 젊은 總師首를 모셨던 김종렬은 李祥昊 兄弟野心을 눈치채고 壬戌生이던 總師首에게 敎主職을 만들어 敎主에 오르기를 勸誘했으나 先 布敎名分으로 挽留하자 壬戌敎를 직접 創敎해 자신이 敎主가 됨. 李正立이 허위 造作한 조직명을 보면, 雲山 總師首가 임명한 土主 보좌역 司成을 그대로 사용한 듯하고 安興燦 總師首가 결혼시킨 李正立 妻 張玉 女史의 회고록 <용화도장 지킴이> 121쪽에서 해방이후 19506.25 직후 甑山敎 大法社 醫統製作 당시 鏡面朱砂雲山 안흥찬(安興燦) 선생이 전적으로 혼자서 全量 充當했음을 솔직히 밝힘. 506 .25 韓國動亂으로 한강철교 끊어질 당시 安興燦 총 사수, 동생 安道燦, 普天敎 擔當 형사 근하 김종영, 남주 李正立, 張玉, 남주 妻男 고교생 張相達 등이 노량진 나룻배로 漢江을 건너 水原까지는 차로, 水原부터 天安까지 함께 徒步避難길에 오름. 天安에서 李正立 夫婦妻男이자 어린 동생인 張相達을 떼어내 버리고 가자 安興燦이 거두어 瑞山 本宅으로 데려가 3-4 개월을 避身시켜 돌려보냈으나 나중에 苦生시켰다고 信徒들 앞에서 헐뜯음. 安興燦 總師首는 총알이 왔다갔다하는 戰爭통의 避亂길에 妻男을 떼내 던지고 가는 것을 보고 저게 무슨 人間이냐생각하며 자신이 거둘 수밖에 없었다고 回顧하고 자신들도 戰爭통에 버리고 간 애를 잘 돌보아주어 安全하게 보내주었으면 設令 고맙다고는 못할지언정 하고 헐뜯는다는 것은 그사람들만의 世界回顧. 노량진을 함께 건넌 逸話張玉 <용화동 지킴이>에도 소개.


<2변 도운 121(1991).3.7 강론>*그러니께 원평와서 말여 집 한 채를 얻어 가지구서 거기 와서 그런 것을 작성하고 의통준비를 하고 그랬거든. 그렇게 해 놓고서 집이를 딱 이제 와서 치성을 모시고서 내가 대 휴게기다. 대휴게기 이 게한다는 자를 쉴 게라고두 혀. 쉴 휴 쉴 게. 포교 더 하지도 말고 현상유지 그냥하구서 내가 때 되면 나오마 때 되면. 그때 내가 최종적으로 가진 게 하나가 있어.. 내가 운영회 회장여. 운영회 회장. 재정관계로 그런 걸 하나 만들자고 해서, 그걸 벗어놔야 하는데 그걸 못 하구 말여. 까막해 가지고 못하고 들어 앉았는디.

 

<2변 도운 121(1991).3.7 강론>*의통준비를 하면서 용화동에 못 있고서 이 상호 씨 가족이 어떻게 돼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원평서 조금 올라가면 금산 중학교인가 있어. 거기가 쌍룡리여. 사과밭 많이 있고 한디 500미터 올라가나 한 1000미터 쯤 올라가나. 금평호 밑에 바로 맞은 짝에 조그만 집하나 얻어놓고서 일부는 거기 있어가면서 이제 의통준비도 한동안 거기서도 했어, 원평 내려오기 전에. 이 상호 씨 부인하고 말여 이 원호 씨하고 그렇게 싸우고 말여. 그러니께 이 원호씨 하두 뭘하니께 내 며느리만도 못한 년이 말여. 그 또 그이도 굉장하거든 어쨌든 이 상호씨가 더불고 사는데 말여 막 년자까지 대가면서...그러니 이상호씨 부인도 저 놈의 영감탱이 개새끼라고 말여. 그 뒤 이 원호씨가 떨어졌나 했더니 떨어지지는 않고 말여.

 

<안운산 종도사 2변 도운 121(1991).3.7>*밀양에 도 순조라는 한의원이 있어 신도중에. 헌디 이 원호가 도 순조마누라를 어디가 수련시킨다고 더불고 가다가 중간에서 비온다고 어디 데려가서 강탈해 버렸어. 그때 늙은 놈여 이원호가 60 넘었어 그때. 도 순조가 죽을 때 눈을 못 감고 눈을 뜨고 죽었다는겨. 이 원호한테 마누라 강탈당해서 너무 분해서 눈을 뜨고 죽었다. 그건 뭐 내 신도들에게 들어서 하는 소리고. 자 이상호 부인도 그렇게 못돼 먹었고 이원호라는 사람도 중진 간부라는 사람이 그렇게 못돼 먹었고. 그런가 하면 김 종렬이라는 사람은 그러니까 참 아마 그 집이 그 사람이 살던 집인데 우리에게 양보 했던 가봐. 그런데 김 종렬이라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인디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는 사람여. 태을주 수도지. 그런데 김종렬이 노냥 내게 하는소리여.

 

<안운산 종도사 2변 도운 121(1991).3.7>*“(김종렬)선생님 이게 제가 보니 임술이, 임술생이 매듭짓는데 아무리 보아도 선생님이 임술 생이시고 또 나의 선생님이시고, 그러니 이게 이 원호하고 이 상호 씨 부인하고 싸우는 게 못되어 먹었고 또 우리가 봐도 못되어 먹었고 여자가 저 지경이니 이상호 이정립이 거치적거리고 앉아서 저러고나 있고 그러지 말고 선생님, 나앉으십시오, 우리가 떠 맬 테니.... 우리끼리 그래야 부작용도 안 생길 테고 그렇게 하십시오.

 

<안운산 종도사 2변 도운 121(1991).3.7>*(안흥찬 총사수(總師首))그런데 나는 사실이 그려. 무슨 교주를 하고 그게 뭐 그런 게 없는 사람이여. 상제님 사업해야 하니 그런 거지. 나는 무슨 감투욕이고 본래 그런 게 없는 사람여. 그래서 나는 그런 걸 원하들 않지 않느냐. 그러면(교주하면) 일선에 나서서 일도 못 할테고 말여, 그러니께, 나는 그런 짐을 걸머지고 싶지도 않고. 나는 필요치 않다고... 내가 나오고 나서 우리나라에 임술교가 있어. 임술교 홍 성렬이가 <범증산교사>에 쓴 데 보면 임술교가 나와. 그게 김 종렬이가 나를 사모하고 그 사람이 공부하면서 여러 해를 두고 봐야 임술이란게 나온다네. 그래서 이 세상 매듭은 임술생이 매듭을 짓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교 이름을 내가 말을 안 들으니께 임술교를 만든거여. 임술교 교주가 김 종렬여.”

 

<2변 도운 121(1991).3.7 강론>*(신앙촌 건립을 주장한 이상호)“당시 이 상호씨 왈, 차 경석 성도 태모님 떼어내듯이... 천사님 금산 도득한다 했는데 다 팔아 용화동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여 용화동 신앙촌화 유도를 주장했다. 용화동에 인성을 쌓고 꽃밭이 이루어지니 여기가 기지니 전 재산을 팔아가지고 와야 한다고 틈만 나면 신도들을 설득했다. 나는 정당한 사람이라, 그러지 마라. 바르게 해라. 나는 내가 포교한 사람이고 그들 안녕질서를 책임 질 사람이고 당신들은 곧 죽을 사람이다. 내 몸뚱이 내가 가는 곳이 곧 본부다. 사람이 모이니 그곳을 본부로 정했을 뿐이다.” “조직을 개창해 만든 나를 따돌리고 조직을 거머쥔 그 사람들의 재주도 비상하다면 비상하거니와 실제로는 당시 신도들이 이상호 이정립에게로 복종해 들어가 나를 등지고 지금까지 나에게 연락하는 신도들이 단 한 명도 없다.”

 

<증산도 도전(甑山道 道典)>*(들어가는 말)김자현 성도의 손자 김택식에 의하면 조부님은 이상호에게 증언을 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김자현 성도는 김형렬 성도, 김갑칠 성도에게도 당시 보천교에서 출교된 뒤 태운장의 미륵불교 신도로 들어온 이상호에 대해 한 판 차려 보려는 다른 뜻을 품고 있으니 전해 주지 마시오.” 하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한다. 이상호에 대한 이런 비판적인 의식은 당시 주요 성도들에게 널리 파급되어 있었다.

 

<증산도 도전(甑山道 道典)>*(들어가는 말)백운동의 안내성 성도는 몇 차례 찾아와 증언을 구하는 이상호에게 단 한 마디도 응대해 주지 않고, 멀리 구성산만 바라보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소년 시절에 곁에서 이를 지켜본 아들 안정남이 증언한다. 또 안필성은 이상호와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도인이 일찍 봉사가 되었다.’고 그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그래서 주요 성도들 못지 않게 상제님과 삶을 함께 하고 상제님에게서 큰 도수를 부여받았음에도, 그 내용을 깊이 있게 증언해 주지 않았다.

 

<道紀 129(99).12.22 安 雲山 종도사 강론>*(홍범초 형의 연원주 박 재근 신도)지금 오면서 보니까 저 아산도장에서 신앙하는 박 재근 신도가 와있다. 그 신도 연령이 나하고 비슷할 것이다. 한데 저 신도가 50여 년 전 신도다.(99년 기준) 내가 8.15 그 다음 해인가 스물 다섯 살에 포교시켰으니까 그쯤 될 것이다. 재근이 여기 있지? 어디 있어? , 저기 있구나. 한 번 일어나 봐. 저렇게 늙은 영감이다. 지금은 요 몇 해 전보다 더 건강해졌다. 내가 저 신도를 보고 하는 소리다.

 

<道紀 129(99).12.22 安 雲山 종도사 강론>*“태을주를 잘 읽고 신앙 잘하면 수명을 연장하고 오래오래 살거다.” 저 사람과 같이 신앙하다가 그만 둔 사람들은 다 죽어버렸다. 다 죽었다. 사실 내가 저희 선생님이다. 신앙하는 저희들한테는 내가 하나님 같은 사람 아닌가? 아산에 내 부동표가 얼마나 많았는지 5.10 선거때 벽보 한 장 없어도 출마만 하면 틀림없이 당선된다고 했다. 내게 부동점 6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신도가 많았겠는가.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배반하고 지금 다 죽어버렸다.

 

<道紀 129(99).12.22 安 雲山 종도사 강론>*저 용화동, 내가 제 2변때 일하던 기지가 있다.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용화동이 있는데 거기에 지금도 증산교라는 게 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곳이다. 거기 있는 신도들이 여기 있는 제군들처럼 내가 키운 신도다. 아까 말했단 박재근 신도도 거기 다니던 사람이다. 한데 이제 다 망하고서 지금은 신도가 백 명도 안 되는 것 같다. 거기 집도 있고 땅도 있고 하니까 그걸 서로 뺏어먹으려고 싸움중이다. 한 쪽에서는 뺏으려 하고 또 한 쪽에서는 안 빼앗기려 하니까 치고받고 하는데, 법치국가인지라 법으로 서로 걸고넘어질 것 아닌가. 그래서 소송건수가 30여 건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이놈이 걸고 넘어지면 또 저놈이 어쩌고 해서 서로 덤비고 말이다. 그런데 요새는 걸고넘어지다 넘어지다 이런 건수까지 있다고 한다. ‘누가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화장실 문을 밖에서 걸어 잠가서 소리소리 지르니까 15분 만에 열어주었다. 나를 감금했다.’하면서 소송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런 소송 건이 30여 건이다. 망할 때는 그렇게 망하더란 말이다.

 

<안운산 태사부님 121(91).3.7 강론>*범초(凡草) 홍 성렬(洪性烈)은 그 형(洪性儹)에게서 도를 받은 사람이고 그 형제에게 진리를 전해 준 사람은 아산군 배방면 남리에 사는 박 재근 신도다. 도를 전해준 그 사람 얘기를 들으면 그 형제가 쌀 한 톨 가지고 와서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박 재근에게 밥 대접 받으면서 이불 덮어주고 수련도 시켜주고 알몸으로 길렀다.(46년에 박재근 25세 홍범초 형은 중학생 홍범초는 13) 홍 성열은 제 형 쫓아다니며 박 재근에게 공부한 녀석이다.(1980년대 중반 통일교 위클리 주간종교기사에서 홍성렬은 자신의 신앙연원은 대전의 안흥찬이라 밝힌 바 있다)

 

<안운산 태사부님 121(91).3.7 강론>*제 아비 홍 만표가 그렇게 신도들을 비난하고 상제님을 박해하고 악살을 부리고 했는데 그 처가 물에 빠져 죽었다. 나는 그 악살로 물에 빠져 죽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한다. 그 이후 허탈해 가톨릭인가 예수교에 들어갔다가 다시 상제님 품에 들어온 사실을 제 입을 통해 말한 것을 전해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얼굴 한 번 본 일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풋나기 어린 애가 제 형 밑에 붙어 제 신앙하면 된 거지, 지도자가 그 많은 신도 어떻게 다 일일이 기억하나.

 

<안운산 태사부님 121(91).3.7 강론>*황 원택은 서산 내 이웃이라 더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교 졸업해서 교체 조직할 때 수, , , , 토 밑에 동서남북, 춘하추동의 8교리에 집어넣어 소화했다. 내 이웃이고 심부름시키기 좋고 국민학교 밖에 안 나온 걸 뭘. 그때도 그놈을 내가 어떻게 인재 양성해 교육했냐 하면 한 두어 발 되는 댓가치를 갖다 놓고 한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집중교육을 시켰다. 그때만 해도 한문 문화권이고 해서 지금보다야 한문을 해야 행세하는 때라 문자를 한 천개 가르쳤다.

 

<안운산 태사부님 121(91).3.7 강론>*독행천리에 백절불굴이라, 작지부지라야 내성군자라. 그런 문자를 한 천개 술어를 주입시켜놓으면 그런대로 사회에 강사로 내세울 수 있거든. 졸면 댓가지로 딱 하고 때리며. 가까운 제 집에 가서 먹기도 했지만 내 집에서 밥 먹여가며 자식 기르듯 온 정력을 바쳐 길렀건만 그런 게 커서 지금 용화동 책임자라고 어쩌고 한다.(황원택이 종령(교주 직책)하던 70년대 초 용화동 방문때 자신을 받들어 재입도하라 폭언한 사건)

 

*<참고자료><증산교 원불교>(차옥승 지음) -황원택黃源澤 (2003년 현재 80) 대담장소 : 충남 서산시 대산읍 운산리 3. 황원택 선생님 자택. 대담시간 : 200336일 오후 3:30 ~ 4:40- “증산교에 안흥찬安興燦 선생의 설교를 듣고 증산교본부에 입도를 했다. 후에 안흥찬 선생이 증산도로 가시고 나는 증산교에 남아 있었다. 이정립 선생이 살아계실 때 나는 보정保正으로 활동했고, 서산 증산교 교무사로 일했다. 남주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김형관金炯官 선생님이 대표로 계시다가 돌아가신 후 내가 증산교교단 대표를 몇 차례 했다. 나는 조석으로 청수를 모시고 매일매일 오주를 칠독하고 태을주를 백오독, 절후주를 칠독하고 있다. 특별한 종교적 경험은 없지만, 아직까지 무병으로 건강하게 살고 있다. 나는 <대순전경>에서 증산께서 매양 구릿골 앞 큰 나무 밑에서 소풍하시면서 말씀하신 -萬國活計南朝鮮만국활계남조선이요 淸風明月金山寺청풍명월금산사라 文明開化三千國문명개화삼천국이요 道術運通九萬里도술운통구만리라- 만국을 살려낼 활방은 오직 남쪽 조선에 있고 맑은 바람 밝은 달의 금산사로다. 가을의 새 문명은 삼천 나라로 열려 꽃피고 도술 문명의 대운은 우주 저 끝까지 통하리라. <도전5:306>가 가장 마음에 들어 입도했다. 나는 이 내용을 남은 조선사람, 힘없는 사람들이 후천에는 활계한다는 뜻과 남한이 만국을 주도하는 중심국이 된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입도한지 벌써 60년이 되었다.”

 

<안운산 태사부님 121(91).3.7 강론>*용화동은 당시 내가 한 800세대 만든 곳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내가 판 만들어 놓은 곳에서 저희들끼리 결혼해 사돈 맺으며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못살게 한다. 한 상기는 부성면 가사리에 사는데 홍 성렬하고 사돈까지 맺어 나와 사담으로 단 한 시간도 이야기 해본 적도 없는 자들이 아무 이유 없이 악담하며 세상말로 나를 잡아먹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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