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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교 대법사-◎6.25 피난시 혼사시켜준 이정립 부부와 한강을 함께 넘은 젊은 總師首

낙엽군자 2017. 3. 5.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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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교 대법사-6.25 피난시 혼사시켜준 이정립 부부와 한강을 함께 넘은 젊은 總師首




45년 8.15 이후 운암강수만경래 숙구지 문왕 초복도수 증산교(대법사)를 개척한 안흥찬 총사수-안운산 성도사님.  당시 공식적 직함은 교주직이 아닌 목화토금수 방주 아래 8교리 제도로 운영하던 방주제로 수방주로 청맹과니로 노인이던 청음을 토방주, 남주를 토방주를 보좌하는 사성으로 임명했으나 20대 젊은 총사수를 탐탁치 않게 여긴 이들 형제는 단체를 조직적으로 탈취하고 천지공사의 대세를 굽어보시던 총사수는 20년 말점도 도수에 의거 휴전 이후 20년 대휴게기를 선포하고 은거하자 청음, 남주 형제는 <증산교사>에서 이러한 추수 도운사를 왜곡 날조해 자신들을 교주로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을 경제적으로 돕고 결혼까지 시킨 총사수를 일개 조직부장으로 변조시키고 후환을 없애려 암살조를 파견했다.






                                                청음 남주형제



< 2변 도운 121(1991).3.7 강론>*(이정립을 혼인시켜주고 이정립 부부와 그 처남 장상달 일행과 한강을 건너 함께 피난)*6.25를 맞이하면서 서울서 한강다리 끊은 뒤에 내가 서울에 있으면서 내 동생이 전농동에 서울 시립대학이 처음 생길 때여. 동생과 처남이 입학을 할때여. 입학해서 등록금까지 다 냈을 때여. 그러구 나는 뭐 상제님 사업하러 여기 저기 다니는 사람이니께. 그 때 마침 서울에 있었구. 그래서 같이 말여. 이 정립 씨 그 누구누구 그 처되는 사람 누구 여럿이 일행이 말여. 저 김 종영이라고 말여. 보천교 담당하던 형사라고 있어, 호는 근하라고. 모두 휩싸여서 수원까지 걸어와 가지고, 그래서 오산서부터 차를 탔어. 그래가지고 온양온천까지 와서 머물러 있는디,

 

< 2변 도운 121(1991).3.7 강론>*이정립이 처남 장상달이라고 있어. 서로 상자에 통달 달자 장상달인디. 걔 집이 울진여 울진. 헌디 걔를 내던져두고 가, 이정립이가. 제 처남이고 여자에게는 제 친정 동생인디. 거기다 떼 내던지고 너는 너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저 연놈이 말여 사람도 아니고 말여. 제 처남이요 어린앤디. 그게 그때 아마 서울서 고등학교 다녔던지 아마 그렇게 됐나봐. 헌디 그걸 어떻게 떼내 버리고 가나 제 동생 제 처남을. 그래서 헐 수 없어서 내가 더불고 집에 들어왔어, 내가 더불고서. 그랬는데, 우리 어머니가 위암에 걸려서 말여. 나는 우리 어머니가 위암 때문에 말여, 참 양방에 무슨 방법이 없나 해서 그렁저렁해서 서울을 갔을 때다 이 말여. 상제님 사업도 사업이고. 그러니께 나는 어디로 갈 수가 없쟎어, 집으로 가야지 말여. 자식 된 도리에 어머니가 말이여 중병에 처했는디.

 

< 2변 도운 121(1991).3.7 강론>*집에 들어오면서 내 아우, 처남, 장상달이 이정립 처남, 그렇게 떡 더불고 집에를 와서 보니께 그 숱한 얘기 다 못하지만 저 당진에서 이이영이 말여 저 지식 많다는 사람. 아니 이이영이가 무슨 지방에서 무얼 어떻게 잘못했간디 내 집으로 피난오고. 또 인천 경찰서 그 사찰계 말여 형사 하나가 김 상록이라고, 월미도 갔다가 보도연맹 200여명인가 300명 말여 총살시키고서, 가만히 내가 이 평생에 와서 친구 새긴 중에서 나를 가장 아껴주고 덕 있고 피난할 데가 어딘가 생각해 보니 나밖에 없더라네. 내 집에 왔어, 처자를 더불고서. 나밖에 없더라 이 말여. 그래서 피난민이 우글우글해.

 

 

<용화도장 지킴이: 장옥 >*(피난대열에 동행한 이정립(55)의 처 장 옥(23)의 증언)“홀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만 챙겨가지고, 강나루를 건너 수원을 십 리 쯤 남겨둔 어느 시골집에서 하루저녁을 쉬었다. 우리 부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인 줄 알았다. 그럴 때마다 곧이곧대로 말해야 풀리는 성격이라 부부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이 당시 피난길에 동행한 일행은 집 선생님, 안 흥찬 선생, 그 분의 동생 안 도찬씨, 나의 남동생이었다. ”

 

 

<2변 도운 121(1991).3.7 강론>*그런디 이제 달포 후에 암투병중인 내 선비께서 돌아가셨어. 그래서 초상상제로서 장례모시고. 그런데 장례 모시기 전에 우리 어머니가 병중에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나 사는 동네 이름이 지사여. 지초 지()자 모래 사()자 지산(芝沙)디 그 지사 고개에서 너를 잡는다고. 또한 우리 집에 있는 김 상록이를 잡는다고, 형사를 집에 두었다고 말여. 그랬다고 사람들이 잔뜩 넘어온다 말여. 그런 꿈을 꾸었다고 내 선비께서 그려. 내 선비께서 영이 얼마나 밝았든지 이렇게 천서를 받아쓰고 그랬어, 천서. 공부해서 그렇게 주문 읽어서 그렇게 영이 밝으셨던 양반이고 그랬어.

 

<2변 도운 121(1991).3.7 강론>*그러자 조금 있으니께 어떤 기별이 오느냐 하면. 저 안 아무개 집에 경찰가족을 두었다. 그래서 그걸 잡아 올라고 한다고 말여. 곧 넘어온다 말여. 빨리 조치하라고 그래서 그 사람을 보고서 사분지 지여차 한디. 여기 있어서 나하고 같이 당하고 싶으면 여기 있고, 한 발짝이라도 가다가 죽구 싶으면 가구. 그건 자의에 맡기니께. 물론 내가 살고 싶으면 김 상록이를 내가 잡아서 주면 내가 산다. 허지만 나 살기 위해 가지구서 살겄다고 찾아온 사람을 내가 사람잡아줄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나는 차후문제고 하니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찾아봐라.

 

<2변 도운 121(1991).3.7 강론>*사태가 이러니 허면 내가 떠나면 안 형이 말여 대신 내 죄를 당하는디 그래도 괜챦으냐. , 그건 다음 문제 아니냐. 나야, 그건 그시 그시 말여 적절한대로 해야 될 거 아니냐. 허니께 가고 싶으면 가고, 여기 있고 싶으면 있고, 내가 구태여 내쫓든 않겄다. 허니께 자의에 맡기겄다. 그 소리가 떨어지니께, 신발도 안 신고 도망 가. 그래서 그렇게 하면 남들이 이상하게 보고 하니께, 신발 신고. 그리고 가다가 먹어야 할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 안 사람 보고서 쌀도 좀 퍼다 주고 말여, 숨도 좀 돌려 가지고 하라고.

 

<2변 도운 121(1991).3.7 강론>*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보냈어. 보냈는디. 그 뒤에 그 사람은 잘 살고. 이제 인천 수복 뒤에 경찰노릇도 하고 그랬는디 그 사람이.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만났어. 뭐 세상은 그런 거 아녀. 그런디 이제 그런 때 사람을 봐. 내 선친께서 그러면 네가 당하지 않냐. 당해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 같으면 살기 위해서 말여 그 사람 잡아주겠습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뉴. 그러니께 내 선친께서 참말로, 참 난감하신 표정을 내 머릿속서 눈 속에서 떠오르고 그러는디.

 

<2변 도운 121(1991).3.7 강론>*그때에 그 이 정립이의 처남 되는 애가 내가 어떻게 소화하는 수가 없어서, 산에 가서 저 삽정이라도 따는 척 하구 이렇게 저렇게 해서 저녁이면 와라, 밥 싸가지고 나가서 말여, 그렇게 해서 한참 뭐할 때 얘를 피난을 했어. 9.28 수복을 하고서 아마 얼마나 있었는지 내 기억이 안 나지만, 해서 우선 너 가는디가 용화동이 가장

쉬우니께. 거기루 해서 차를 타게 되면 타고, 걸어가게 되면 걸어가고 해서 슬슬 가라고 그런대로 말여. 충분히 여비가 될 수 있는 것을 주어 보냈는디,

 

<2변 도운 121(1991).3.7 강론>*안 흥찬이 같이 못된 놈이 말여, 여비도 제대로 안주어 보냈다고. 그게 이정립 마누라가 하는 소리여, 병여 그게. 이 정립이하고 이 정립 마누라가 하는 소리여. 아니 그 죽는 세상에 3개월인가 4개월 동안 좋은 밥 대접했고, 편안히 잠자리 제공해 줬고, 아니 잘 살려서 그렇게 해서 여비 줘서 저희들도 버린 애를 잘 살려서 그렇게 해서 여비 줘서 저 갈디로 보냈으면, 그게 다만 고마울지언정 욕할 필요가 없는거거든. 그게 그 사람들 세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