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도마(토마스)가 선교한 인도 남부 우측 뱅골만(포항 위치) 우측 첸나이 市(舊 마드라스 市 인도 4대도시)

낙엽군자 2016. 6. 19. 12:54

 

 

 

인도의 첸나이(舊 마드라스) 市여기 클릭!!

 

 

 

 

 

 







마드라스: 사도 도마가 창에 찔려 순교한 장소(St. Thomas Hill)위에 세워진 성당 입구


첸나이(마드라스)의 도마 순교지


첸나이(마드라스)의 도마 동상


도마가 선교기간 동안 기도를 꾸준히 한 기도 동굴, 바위에 두 팔의 홈이 파져 있다.


첸나이(마드라스)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기 직전에도 기도하는 도마


도마의 무덤 The Tomb of Apostle Thomas 기념 성당(지하, Chennai의 Marina Beach 옆)
사도 도마(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 요 20:28)

사도 도마의 선교활동
AD 31  Edessa (옛 Haran)에 선교센터 세움
AD 40 인도 북쪽 갠지스강 유역, 아유타국 궁정 건축선교 및 전도
AD 42년 인도양을 통해 해양 실크로드를 따라 아시아 대륙 끝인 김해 도착
    6년간 낙동강 유역에 전도함, 가야(김수로왕) 건설에 참여, 김해 왕궁 건축선교
AD 48년 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후의 결혼 주선/주례?
AD 52년 인도 동쪽 해변에 도착, 전도시작
AD 72년 12월 18일 원주민에게 창에 찔려 순교
출처:
http://samuelyun.com/zeroboard/zboard.php?id=picture&page=2&sn1=&divpage=1&sn=off&ss=on&sc=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14&type=thumb&PHPSESSID=d955c5ee6fdc823617a5f28291d1f29a



예수 동생이자 제자인 토마스(도마)가 포교하여 지금도 20만 기독교인이 자생하고 있는 도시 첸나이(마드라스) 시市. 이 시는 타밀나두 州에 속해 있으며 1996년 첸나이 市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지도에는 마드라스 시로 안나오고 첸나이 시로 나옵니다. 도마가 선교한 인도의 남서부 해안의 케랄라와 타밀나두에만 200만 기독교 신도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구약시대인 솔로몬시대부터 교역이 서로 있어 왔고 유다, 이스라엘 멸망이후 수많은 유대인이 밀려와 유대인 집단 망명유민촌 디아스포라를 이루기도 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가족이 프랑스 남불 론강의 까마흐그 시의 해변가 '쌩뜨마리 드라 메흐'에 도착할 무렵 예수는 모친 마리아와 이스카리옷 유다(가롯유다) 동생 토마스(도마)와 인도 북부 스리나가르 지방으로 가던 즈음 경유지 인도 남부 마드라스(첸나이)에서 도마를 남기고 떠납니다. 예수와 마리아 무덤은 인도 북부(지금은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인근 캐쉬미르 칸자르Khanjar  지역의 안지마르Anzimar 마을과 인근에 있고 모세의 무덤도 이곳 부근에 있습니다. 남성 교부들을 피해 프랑스로 떠난 막달라 마리아(마들렌)는 남불 생막시맹 바실리끄 대성당에 무덤이 안치되어 성체보관 성당으로 유명하고 동생 라자르(나사로)는 마르세이유 주교관에서 대주교를 지내다 죽었습니다.) 본 글은 마드라스에서 선교를 한 도마 이야기의 진실 이야기입니다. 이곳은 도마의 공헌으로 기독교 신도가 많은 이유로 한때 젊은시절의 조용기 목사도 대대적으로 선교 목회를 한 바 있고 기독교 각계에서 공들여 선교를 하는 곳입니다.-cheramia

-<도마의 교회<이옥희 선교사의 달릿 이야기 5>>인도의 도마에서 비롯된 교회들은 주로 인도의 남서부 해안의 케랄라와 타밀나두에 주로 위치해 있으며 교인의 숫자는 200만을 넘어서고 있다. 스스로 ‘성 도마의 크리스챤’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시리아 정교회(Syrian Orthodox),시리아 야콥교회(Syrian Jacobites), 말토마교회(Mar Thomite), 네스토리안교회(Nestorius)를 비롯한 27개의 교회들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A,D 52년에 말라바 해변에 위치한 고대의 유명한 항구인 크랑게노르(Cranganore)를 통해서 인도로 들어 왔다. 처음에 그는 자기의 동족인 유대인 디아스포르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나 그들이 거부하자 원주민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많은 지역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 하였고  힌두교의 상위 카스트에 속한 많은 브라민들을 개종시켰다. 그의 교회는 7개 지역, 말란카라(Malankara), 꼬따꺄얄(Kottakkayal), 빨루르(Palur), 코까망갈람(Kokkamangalam), 니라남(Niranam), 퀼론(Quilon), 차얄(Chayal) 에 세워졌으며 목회자들은 안수를 받고 나아가 성직을 수행했다. 그는 남인도의 동해안을 통과해서 오늘날 마드라스시의 일부인 타밀나두의 마일라뽀르(Mylapore)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기서도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였다. 그는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으로 중국까지 가고자 하였으나 중국을 향해 가던 중 생각을 돌이켜서 다시 마일라뽀르로 돌아왔다. 그가 복음전파 사역을 재개하자 이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이에 분노하며 적개심을 품은 힌두들의 공격으로 그는 마침내 마드라스시에서 8마일 정도 떨어진 토마스산에서 순교하기에 이르렀다(A.D 72년). 그의 시신은 제자들에 의해 마일라뽀르에 묻혔고 오늘날 그의 무덤 자리에 성도마교회(Roman Catholic Cathedral of San Tthome)가 세워졌으며 교회 박물관에는 도마의 것으로 알려진 뼈 조각들이 있어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성서에 ‘인도’라는 말이 나온다. 에스더서 1장 1절에 보면 아하수에로 왕이 인도에서 구스까지 127도를 치리하는 왕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인도가 오늘의 인도인지는 모르지만 인도는 성지로부터 그리 먼 곳이 아님에 분명하다. B.C 9세기 중반에 팔레스틴의 통치했던 솔로몬왕은 인도와 교역을 하였으며 B.C 587년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한 뒤 많은 유대인들이 코친으로 몰려 왔고 그들은 디아스포라의 생활 속에서도 회당을 세웠으며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였다.

인도는 일찍부터 서방 세계와 교역을 하였다. 남인도와 로마제국 사이에 활발한 무역 교류를 통해서 인도산 보석, 향신료, 상아, 흑단, 철제품, 비단과 면 등이 로마의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날 코친 앞 바다에서 아우구투스 황제로부터 하드리안 황제 시대에 사용했던 로마제국의 동전이 발굴 인양되어서 로마제국과 남인도의 교역을 입증해 주고 있다. 육로와 해로를 이용한 로마제국의 활발한 교역로를 통해서 적어도 몇 몇의 크리스챤들이 시리아에서 남인도로 왔고 이런 상황 속에서 남인도교회가 사도시대 부터 존재했다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비록 초기 문서는 아니지만 도마의 인도 선교를 입증하는 직접, 간접적인 문헌들이 있다.

5세기의 사람으로 자기의 마지막 생애의 10년을 에뎃사(Edessa)에서 보낸 성 에프라엠(St. Ephraem)의 시에서 우리는 성 도마에 관련된 내용을 볼 수 있다.

보라, 인도에서 일어난 당신의 기적,
우리 땅 에뎃사 안에 있는 당신의 승리,
어디나 당신의 축제일;
살아있는 동안 기적들을 행하였고;
기적들은 당신의 죽음 뒤에도 계속된다.”

“보라, 그의 뼈들, 그의 순교, 그의 일이 선포하는 것을;
그의 기적들은 그가 아직 살았다고 주장한다.
그의 행위는 거친 인도인들을 압도하였다.
누가 감히 그의 유골의 진실을 의심할 것인가?”

에뎃사는 네스토리우스파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동로마 황제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동쪽의 페르시아로 이주하여 정착한 도시로 네스토리우스파는 그곳에 신학교를 세워 동방 선교의 전초 기지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동방 선교 기지인 에뎃사에 인도의 사도인 도마의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되고 성 에프라엠이 이를 시로 읊은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또한 에뎃사에서 무명의 기자에 의해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도마 행전(The Acts of Thomas) 쓰여진 것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5세기의 성 요한 크리소스톰(St John Chrysostom)은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신앙에 대해 히브리말로 어떻게 설교할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그들이 스키티아인들, 인도인들, 사마리아인들에게 설교가 가능했는가? 그것은 바로 성령이 그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은 설교를 했고 로마인들, 페르시아인들, 스키티아인들, 무어인들, 인도인들 사이에서 어디서든지 제단을 세웠다. 우리는 아론과 다니엘의 뼈가 어디에 묻혔고 예레미야가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과 도마의 매장의 장소를 안다.”고 기록하였다.
성 크리소스톰이 인도인들이 사도들에 의해 복음화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가 의미하는 사람이 인도의 사도로 알려진 도마 외에 그 다른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그와 동시대를 산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와 암브로스도 도마를 “인도의 사도”라고 언급한 사실은 당시 사람들이 도마의 인도 선교를 알고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계속해서 크리소스톰이 확고한 태도로 도마의 무덤 자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 곳은 그가 복음을 전한 남인도라고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6세기 투르(Tours)의 비숍 그레고리는 ‘영광의 찬가 안에 있는 순교자의 유골’ (In Gloria Martyrum)에서 “사도 도마는 인도 안에서 수난의 역사를 겪었다고 알려졌다. 오랜 시간 후에 그의 복된 몸은 시리아의 도시 에뎃사로 옮겨져 거기에 묻혔다. 인도의 그의 첫 번째 안식처였던 곳에 수도원과 엄청난 크기의 교회가 있으며 아주 섬세하게 장식되었고 가꾸어져 있다.”고 썼다.
여기에 인도의 특별한 장소가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도마가 인도에서 수난을 겪었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13세기 네스토리안 비숍, 말 솔로몬(Mar Solomon)은 ‘일꾼의 책’(Book of the Bee)에서“도마는 유다지파로 예루살렘에서 왔다. 그는 페르시아인들, 메데인들, 인도인들을 가르쳤으며 인도의 왕의 딸에게 세례를 준 이유로 창에 찔려서 죽었다. 상인 하반이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우리 주님의 복된 도시인 에뎃사에 묻었다. 혹자들은 인도인들의 땅, 마흘르프(Mahluph)안에 묻혔다고 한다”고 썼다.
여기에 나오는 마흘르프가 마일라뿌르(Mailapur)인지 약간의 의문은 가질 수 있겠으나 우리는 도마의 무덤에 대한 두 종류의 전승이 이 시대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시신이 바로 에뎃사로 가서 묻혔다는 전승과 하나는 마일라뿌르에 묻혔다가 후대에 에뎃사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가 마일라뿌르 또는 그 근처에서 순교를 했다는 것에 대한 일치를 볼 수 있다.

베네치아의 유명한 여행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92년)는 마일라뽀르(Mylapore)를 방문하였고 그의 여행기에서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성 도마의 복된 몸은 인구가 많지 않은 작은 타운인 마르바르(Maabar) 지방에 묻혀있다....그곳은 기독교인들과 사라센들이 잦은 순례여행지가 되었다. 사라센은 대공경심을 가지고 그를 성자로 대하고 그를 사라센의 한사람으로 위대한 예언자로 거룩한 사람에게 주는 ‘아바리안’(Avarian)호칭을 부여하였으며 기독교인들은 순례를 와서 성인이 죽고 묻힌 장소에서 신발을 벗고 나누면 누구든지 각종 열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도마의 능력으로 깨끗이 나았다.”
마르코 폴로의 사라센은 회교도들을 의미하는데 회교도들은 오늘날도 다른 종교의 거룩한 장소를 공경한다. 남인도에서는 힌두조차도 다른 종교의 성지를 두렵게 여긴다. 남인도의 동해안은 코로만델 해안으로 자주 마르바르로 불리웠는데 이는 회교들에 의해서 주어진 코로만델의 아랍어 이름이다.

14세기 초 네스토리안의 작가 암르(Amr)는 토마스에 대하여 “그의 무덤은 인도 마일라뿌르(Mailapur)에 있는 수도원의 제단의 오른쪽에 있다.” 고 기술하였다.

동방과 서방의 적지 않은 문헌들이 도마가 인도에 복음을 전한 사도임을 말해주지만 2세기말 3세기 초에 에뎃사의 무명의 기자가 기록한 도마 행전(The Acts of Thomas)은 그 내용을 더 자세하게 보여 준다.

“사도들이 제비를 뽑아서 결정되는 대로 세계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로 하였다. 제비뽑기의 결과 인도가 도마에게 할당되어 졌다. 그러나 도마는 인도로 가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 때에 곤도파레스(Gondophares)왕의 궁전을 건축할 목수를 찾으려고 인도에서 온 합반(Habban)이 그곳에 왔다. 그 중대한 때에 예수께서 도마를 찾아 왔고 사이에 끼어들어 한 때 목수였던 제자 도마를 합반에게 팔았다. 합반은 그를 데리고 왕의 도시로 갔다. 그는 왕에게 궁전을 짓겠다고 말하고 돈을 받아다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사실을 안 왕은 도마를 죽이려고 하나 왕의 동생이 꿈에서 왕의 궁전이 하늘나라에 웅장하고 아름답게 건축된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여 풀려난다. 왕의 인정을 받게 된 도마는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를 세웠고 결국은 순교하였다” 는 내용이다.

혹자들은 도마행전에 나오는 곤다파레스 왕이 아프카니스탄을 다스렸던 인도-파탄(Indo- Parthan) 왕 곤다파레스와 동일인이라고 주장하며 도마가 복음을 전한 곳은 남인도가 아니고 북인도라고 한다. 그러나 A.D 1세기 수 없이 많은 지역 왕들로 분열되어 있던 남인도에 비록 고고학적인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곤다파레스 왕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살아있는 시리아교회가 자신들이 도마의 교회임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마드라스에 있는 도마 무덤 위에 세워진 성도마교회에 가면 순교자의 음성이 들린다. 그의 은신처요, 기도처였던 리틀 마운트에 가면 자신의 주님이요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의 삶을 일상으로 받아 드리며 기꺼이 살았던 그의 실체가 피부에 와 닿는다. 창에 찔려 참혹하게 죽은 성자의 몸을 받아준 토마스 마운트는 오늘도 마드라스 시가를 바라보며 그의 순교를 웅변하고 있다. 그가 도착한 크랑게노르와 방문했던 유대인의 거리 그리고 그가 세운 시리아교회 공동체들이 그의 선교를 증언한다.
인도 2000년 역사 그 다양한 종교의 흥망성쇠 한 가운데 아! 도마의 교회가 있었다. 2,000년 역사의 도마의 교회가 이 땅에 있다.

 

<에필로그>
2002년 남인도교단 총회가 케랄라의 말가우마탐에서 열렸을 때 스리랑카 비숍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고대 무덤가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돌로 만들어진 도마 십자가를 선물로 가지고 왔다. 그는 사석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 도마가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다고 말하였다. 그의 스토리는 이러했다.
도마가 인도에서 20년을 살았는데 초반 13년 정도는 케랄라지역에서 후반 7년은 타밀나두 지역에 거주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스리랑카는 케랄라에서나 타밀나두에서나 배로 몇 시긴이면 도착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그가 제자들과 함께 종종 방문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그가 복음을 전하였으므로 도마 십자가가 고대 무덤이나 유적지 등지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는 도마 십자가가 태국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해 주었다.
도마의 십자가가 스리랑카와 태국 등지에서 발견된다는 말에 나는 흥분하였다. 열대 기후를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 전파에 생명을 건 도마와 도마 제자들의 역동성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A.D 1세기는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낙후되고 정체된 시대가 아니었다. 복음을 들고 바다와 육로를 따라 움직이는 제자들과 군인들과 장사꾼의 행렬들이 지구를 덮었다. 그리고 수많은 만남들이 이루어졌고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불국사에서 나온 십자가를 따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도마와 만날 것은 생각이 든다. 요즘 우리 한국교계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도마나 도마 제자가 우리나라에 왔을 지도 모른다. 육로 비단길을 타고 에뎃사의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 한두 명 쯤 우리 경주에 오지 않았을까? 중국과 인도 여행을 떠난 한국의 유학승이나 승려들이 중앙아시아 어디선가에서 서, 인도와 중국의 거리에서 시리아교회에서 온 도마의 제자들을 만났을 지도 모른다. 기록되지 않았거나 기록이 유실되고 유물과 유적을 남기지 않은 역사는 민중 속에서 신화와 전설로 구전되어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이옥희 선교사  yiso57@hanmail.net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02

 첸나이(마드리스) 시는 인도의 맨 아래 스리랑카 와 마주하고 있는 인도 동해 뱅골만 연안 항구도시로 인도에서 네번째로 큰인구 1000만의 도시입니다.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최첨단 도시로 도마는 예수와 모친 마리아 가롯유다 등의 일행과 함께 십자가 처형사건과 소위 부활아닌 부활 사건으로 인도에 오게 된 경유지의 하나로 도마는 이곳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도하게 됩니다.

마리나 해변에서 차를 타고 5분에서 10분 정도 가면 바로 센 토마스 성당을 볼 수 있다. 센 토마스 성당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한 사람인 도마가 선교 목적으로 인도를 방문해 사역 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지금 첸나이 센 토마스 성당에 그의 시신이 안치 되어있다. 예상외로 인도 현지 사람들 중에서도 성당을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부활절 또는 크리스마스와 같이 기독교와 천주교 행사가 있는 날은 센 토마스 성당 근처에 사람들이 북적북적 하다. 그래서 그런 시기에 특히 많은 거지들이 성당 앞에 앉아서 구걸하는 광경도 흔히 볼 수 있다.  

께랄라 꼬둥갈루르 - 사도 도마가 인도에 첫발을 내딛다.
http://m.blog.daum.net/samuellim/53
http://m.blog.daum.net/ecwj1229/27
http://young.hyundai.com/magazine/campus/detail.do?seq=11865

도마복음 전문
http://blog.koreadaily.com/view/myhome.html?fod_style=B&med_usrid=ilsinyou&cid=145944&fod_no=13


(한국 보수교단에서 보는 시각)복음서에서 본 도마의 신앙행적)
http://www.prok.org/gnu/bbs/board.php?bo_table=comm_essay1&wr_id=32534


복음서에서 본 도마의 신앙행적



https://prezi.com/u4ramxqgrkv6/presentation/
도마영화 제작을 통한 인도선교


제작 창식 김 2011년 6월 23일
•166

도마영화 제작을 통한 인도선교의 스크립트

도마영화 제작을 통한 인도선교 서론
인도는 중요한 선교대상국가로서 수많은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하고있다.
많은 선교사들의 순교와 헌신으로 힌두교와 미신의
악습은 많이 없어지고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아직도 기독교
인구는 3%미만이다.
21세기 문화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선교 전략으로
춤과 노래 영화를 좋아하는 인도인 선교를 위한 방법으로
인도에서 선교하며 순교를 당했던 사도도마의 삶을
영화로 만들어 그가 믿었고 전파했던 예수님을 영화를 통해
인도인들에게 전파하는 선교전략을 제시하고자 한다. 2.왕의 건축감독으로
일하면서 선교시작
3.코친에서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선교
4. 7교회를 설립 마드라스로이동. 5.마드라스에서 선교하다 브라만계급에의해순교 인도의 일반적이해 도마의 인도선교행적 이스라엘에서
인도 코친으로감 인도는 세계 4대 문명중의 하나로기원 전 약 3,000 년경부터 약 1,500 년간 이루었는데, 이 시기는 고대 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문명과 거의 동시대로 볼 수 있다. 또한 세계 4대 종교 중 힌두교와 불교의 발생지이며, 현재는 세계 두 번째의 인구 대국으로서, 2010말 통계로 약 12억천만 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지방 방언을 포함하여 3,372개 언어이며, 이 중에서 1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216개 언어이며, 헌법이 지정한 언어는 18개 언어가 되며, 힌디어와 영어가 기본적인 공용어가 된다.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1947년 8월 15일에 독립하였으며 종교적인 이유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분되었다.
2030년경 중국을 제치고 세계제일의 인구 국가가 될 전망이다. 도마영화제작을통한 인도선교방법. 1) 인도의 대중문화가 주변국에 미치는영향. 일년에 천여편의 영화가 제작되는 인도의 영화산업은
주변국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키스탄,네팔,방글라데시,두바이,스리랑카등,여러나라
에서 인도영화와 드라마를 시청하고있다.
대부분에 인도영화는 힌디어로 제작되며 영화와 드라마의
영향력으로인해 주변국가사람들중 많은 사람들이 인도의 공용어인 힌디어를알고있다.
특별히 분단후 오랜 갈등기간에있는 파키스탄 사람들도 인도영화와 드라마를 즐기고있다. 도마영화 제작 계획 사도 도마의 인도선교는 인도 선교의 시작으로서 그가 선교했던지역은 지금도 기독교 인구가 높은 편이다.
특별히 마드라스에는 사도 도마의 무덤위에 세워진 교회가있으며 그가 기도했던 기도동굴 그리고 마지막 순교당했던 언덕이 잘 보존되어있다.
도마의 순교지인 마드라스는 인도 남부영화제작의 중심지이며 현재는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도마영화 내용은 도마행전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며 그가 믿었고 죽기까지 따랐던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도마영화의 제작지는 도마의 순교지인 마드라스에서 제작한다.
영화제작은 한국, 인도 합작으로 한다.
영화 상영은 인도를 비롯한 전세계 상영을목표로한다. 결론. 사도 도마의 인도 선교를 시작으로 시대와 상황에 맞는 많은 선교 방법들이 시도되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인도는 기독교 인구 3%미만의 중요한 선교대상국가다.
인도의 타종교 개종자들중 일부는 예수영화 시청후 예수님을 영접하는 경우가 많다.
21세기문화시대를 맞이하여 인도의 상황에 맞는 영화를 통한 선교는 시대적 상황에 맞는 선교의 한가지방법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복음이 자연스럽게 들어갈수 없는
무슬림 국가들인 파키스탄과 주변국가 들에도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수 있는 효과적인 선교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