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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통宗統. 증산도 3변 추수도운이 일어나다~1~~

낙엽군자 2014. 8. 10.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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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3변 추수도운이 일어나다~1~~

 

글쓴이 : 향수
  
연령이 거의 부자간의 차이 정도 되는 것을 들어 해방이후 왜곡된 실상을 모를 수밖에 없는 항간의 악평이 있지만 6임 연원제도가 근간인 상제님 진리판이 포교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아신 안흥찬 총사수는 포교대운만 전적으로 맡고 직접 교주직을 맡으라는 김종렬(후일 임술교 교주) 간부 등의 주장도 만류하고 바지사장인 교주직은 당시 청맹과니로 맹인인 60가까운 노회한 이상호로 하여금 용화동 본부를 맡아 단체의 중량감을 보이게 배려 합니다. 당시 20대의 젊은 총사수는 내가 교주가 되어 들어앉으면 가장 역동적으로 포교할 수 있는 본인이 더 이상 포교운동을 전개하지는 못하지 않느냐고 하시며 교주자리를 마다합니다. 이러한 주장에 결국 김종렬 간부는 후일 임술교를 개창한 것이지만 이때 사실상 속으로 조용히 쾌재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젊은 총사수가 용화동 본부에 거처까지 마련해주며 신앙적인 자리마저 마련해준 노회한 맹인 이상호였습니다.
 
젊은 총사수는 무엇보다 조직관리보다는 외적인 포교에만 주력하는 중이었습니다. 보천교 시절부터 조선총독부 양해사건(일제하 보천교 공개화)을 기회삼아 그 인맥을 활용해 보천교 혁신운동을 벌이고 미륵불교 시절을 거치며 팔파연합회를 만들고 배신과 배사율을 밥먹듯 했던 노회한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해방이후 비록 끈 떨어진 갓 신세인 장님이 되었지만 아직 해도진인에의 꿈을 포기못한 그로서는 그 교활하고 간악한 심성이 전혀 변하질 않았으며 머릿속의 계략과 모책은 젊은 시절을 능가하면 능가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중이었습니다. 밖으로만 나돈 20대의 젊은 총사수는 노련한 형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이러한 사실을 꿈에도 생각을 못한 채 간과하고 해방이후 개척한 2변 조직을 송두리째 강탈당합니다.
 

                                     운산 안흥찬 총사수. 안 세찬(흥찬) 성도사님

 

동생 이정립은 이러한 강탈 사실을 왜곡한 글을 써서 당대에는 시퍼렇게 눈뜨고 진실을 아는 사람이 많아 차마 공개는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그가 죽자 그 아들 이영옥이 장성해 그 왜곡된 유고집을 모아 <증산교사>를 발행하고 후일 이정립의 종통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젊은 총사수의 연원계열 국민학교(초등학교) 신도였던 홍범초는 후일 자라 <증산진법회> 교주로서 국내의 내로라하는 석학들로 구성한 <증산사상연구회> 회장 자리에 있는 배용덕 회장을 몰아내고 자신이 회장이 되고자 끊임없이 괴롭히고 상제님에서 태모님으로 이어지는 종통을 부정하며 자신의 직계 연원의 뿌리인 성도사님을 부정하는 한편 해방이후 2변때 성도사님이 만든 대법사 증산교에 대해 적반하장으로 이상호가 만든 대법사 증산교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 주장하며 이상호를 배신하고 나간 인물로 날조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성산 신도들을 초청한 공개석상에서 태모님 어진을 짓밟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범하고 <범증산교사>를 통해 왜곡된 2변 교사를 담은 <증산교사>의 내용을 한 번 더 왜곡해 비틀어댑니다.
 
용화동 대법사를 지키고 앉아 중장년층을 흡수하는 역할을 해 줄 것으로 알고 젊은 총사수가 앉혔던 이상호는 젊은 총사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젊은 철부지 한 명이 어쩌다 상제님 판에 들어와 정력적으로 운좋게 단체를 개척해 대운을 마무리 할 운명인 자신에게 헌납한 정도로 밖에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정읍 시기리에서 만난 이후 거처까지 제공받고 비록 명분만 있는 얼굴마담이지만 호기좋은 젊은 총사수가 개척한 단체의 중심자리까지에 배치된 그는 초기에는 감읍하며 순한 양으로 행세하지만 기회가 오자 이 조직을 명실상부하게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위해 일찍이 보천교 혁신운동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동생 이정립을 통해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조직을 야금야금 먹어가 마침내 조직전체를 장악하는 노회한 백전노장의 능력을 십분 발휘합니다.
 
이상호는 한 술 더 떠 후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 근본부터 싹을 자르기 위해 당시 젊은 20대 총사수 안흥찬(안세찬)을 끊임없이 청부살해하고자 박복만 같은 암살단을 끊임없이 파견하고 기회를 보며 탐색합니다. 한편 이정립은 자신을 장가까지 보내준 젊은 총사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왜곡된 자료를 쓰지만 실상을 아는 많은 신도들의 눈이 두려워 당대에는 차마 왜곡된 글을 공표하지는 못하고 해도진인이라는 허망한 꿈만 안은 채 이상호가 65년 사망하자 1967년 초 실망과 좌절감에 휩싸인 채 1년 반도 안 되는 사이에 형을 뒤따릅니다.
 
그 이후 이 왜곡된 글이 교사출신인 그 아들 이영옥에 의해 <증산교사>로 부활하고 증산교 대법사를 이상호가 창교했고 안흥찬이 배신했다는 왜곡된 글은 이상호 이정립의 종통이 자신에게 승계되었다고 자칭하는 홍범초에게 <범증산교사>라는 책속에서 또 한 번 왜곡 전수됩니다. 이영옥은 증산교사 서문에서 부친이 타계하고 후일 안흥찬(안세찬) 총사수가 배동찬 간부를 통해 인연맺어 결혼시켜준 모친 장옥(본명 장도)으로부터 부친의 유고 원고들을 커다란 박스에서 발견해 넘겨받아 책으로 발행하게 된 것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홍범초는 용화동 대법사 증산교의 종령(교주)을 역임한 바 있는 황원택과 함께 안흥찬 총사수의 연원계열이었지만 일체의 연원뿌리를 부정한 사람이며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태모 고수부님 탄압 전적(前跡)을 계승해 10년 천지공사를 보신 태모님의 유일 신권을 인정치 않아 용화동 통천궁에서 상제님 영정과 함께 모셔진 태모님 영정을 떼어내 짓밟아 버린 적 있는 파렴치한으로 자신이 이상호 이정립 형제의 종통을 이어 의통집행을 할 마지막 사명자로 인식해 이유없이 운산 안흥찬 성도사님을 음으로 양으로 핍박하고 헐뜯게 됩니다.
 
사악함으로 가득찬 이상호에게 대법사 증산교의 종권을 강탈당한 안흥찬(안찬) 총사수는 당시 대국적으로 모든 것이 다 상제님 천지공사의 일환이란 것을 깨닫고 일체 이상호 이정립 형제에게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54년 신도들에게 20년간 말점도 도수를 선언하고 은퇴 후 20년 뒤 품안의 자식이 성장하자 74년 기두합니다. 차남은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중 군복무 중이고 안경전은 대전고 3, 안원전은 대전고 2일 때입니다. 이들 3인이 각각 군복무중인 대학생, 고교생 신분인지라 태사부님은 가족 중 가장 먼저 사회인이 된 장남을 데리고 용화동을 찾은 바 있지만 황원택, 홍범초 등 옛 신도들은 평신도 신앙체계를 주장하며 교주인 종령을 2-3년제 선거로 뽑는 자신들의 교단은 과거의 연원체계가 아니므로 자신들 아래 다들 새로 입도하라고 주장하는 소리만 듣고 돌아옵니다.
 
과거 성도사님이 품안의 아이들 키우듯 교육시켜 신앙사회에서 성장한 그들로부터 연원체계를 일체 부정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의 신앙의 뿌리인 태사부님에게 조차 재입도하라 하는 폭언만 듣고 돌아옵니다. 성도사님은 75년부터 77년까지 대전천의 구 중앙데파트 앞 제일은행 옆 상가건물 4층에 5평정도의 방을 얻어 칠판을 걸고 지인을 모아 고교를 갓 졸업한 대학1년생 4째 아들 안경전을 내세워 서너명 씩 지인을 불러 교리강좌를 열며 자식을 훈육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이때 홍범초는 무슨 일인지 성도사님에게 선생님을 모시고 싶다하며 러브콜 서신을 사택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성도사님은 일체 응하질 않고 있다가 자식 안경전을 데리고 다시 용화동을 찾아 가지만 마찬가지로 구 신도들로부터 육체적 영적 폭력만 재차 당하고 돌아옵니다. 성도사님이 기두하신 걸 알고 지금까지 홍범초가 초청장을 보내면서까지 모시지 못해 안달한 이유는 단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제스츄어에 불과했음이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 후 홍범초는 얼마안가 스스로 자신의 연원의 뿌리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욕망위에서 러브콜을 보낸 것임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성도사님은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일체 사적으로 응하시지 않았습니다.
 
훈육기간 중을 포교의 기회로 생각해 전력을 기울이던 안경전은 자신의 노력만큼은 고사하고 아예 사람 하나 포교가 안 되자 집에 돌아와 자신의 불만과 엄청난 스트레스를 전 식구들에게 지속적으로 쏟아냅니다. 이같이 힘든 3년간의 준비과정-강의 수련이 끝나자 성도사님은 78년 대전에서 처음으로 성모여고 건너편 교보빌딩 위 200미터 구 MBC 앞에 정식 도장을 개창하게 되는데 이런 이유에선지는 모르나 추수도수 사명에 있어 78년 처음으로 증산도 도장을 개창하는 영광을 가진 사람은 안경전이 아닌 장남 안중선입니다. 태사부님은 성격적으로 문제가 많은 안경전을 후일 교리 강사로만 쓰기로 하여 잠시 뒤로 물리고 장남을 내세우셨는데 이 사이 안경전은 대전고 위 <청산독서실>에 살다시피 하며 역설적으로 경전이 없는 조직에 과도기적으로 사용할 교리서<증산도의 진리> 집필에 매달리는 시간적 여유를 다소 갖게 됩니다.
 
성도사님은 기대주로 사랑을 가장 많이 쏟은 장남 안중선을 중심으로 새로 일을 도모하게 됩니다. 중임을 맡은 안중선은 결혼 후 틈틈이 모은 자비를 들여 사무실을 얻어 추수 사명의 첫 증산도 신단을 꾸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고 모든 집기물도 자신의 혼수품 및 자신의 과거 사무실 집기로 채웁니다. 성도사님은 크게 신임한 장남이 첫 도장을 개창하자 크게 만족하고 장남에게 큰 포교대운을 맡겨 부산으로 보냅니다. 하지만 장남은 기대에 맞는 실적을 이루지는 못하고 돌아오게 되고 돌파구가 필요했던 성도사님은 장기적으로 5째 아들인 안원전이 필요함을 느껴 서울에서 내려올 때마다 설득작업을 하게 되고 또 한편 성도사님은 더 이상 눈앞에 당면한 대안이 없음을 알고 비로소 4남 안경전을 정식으로 교화원장에 임명합니다. 그러는 사이 80년 괴정동으로 도장을 신축해 옮기면서 그동안 판도 작고 할 일도 별로 없어 소극적으로 도와주는 역할 외엔 할 일 자체도 별로 없었던 관계로 묵묵히 관망만 하다가 바로 서울로 올라가곤 하던 5째 안원전이 연락을 늦게받아 모친 장례식조차 채 참례치 못한 충격을 계기로 3월 초부터 대학가 새학기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되어 증산도 도문은 본격적으로 제 궤도에 오르는 조건을 구비하게 됩니다.
 
성도사님은 방학 중 서울에서 귀가할 때마다 5남 안원전을 꾸준히 설득한 보람이 있어 80년 봄 도모님이 선화하심을 계기로 안원전은 본격적으로 <대순전경> 5판, 이대, 한양대 국어교재의 이항녕 논문(동학사상과 증산사상)과 배 용덕 회장의 증산사상 논문집 등 자료를 들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주요 대학과 전국 대학가를 누비며 증산도 천하사에 뛰어들게 되고 그동안 교리서 집필에 매달려온 안 경전 역시 공주 부여 구교인 20여명 신도에 불과한 도판 속에서도 <증산교의 진리: 증산도장刊>를 81년 출간하면서 문왕의 도안(都安)세 살림 도수가 본격적으로 제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경만장 세 살림 도안도수는 법은 서울에서부터 펴 내린다는 말씀에 근거해 80년 안원전이 서울을 중심으로 대학가를 공략하자 84년에 전국적인 55개 대학 서클에 공식적인 둥지를 틀면서 동대문구 지하철 1호선 휘경역 출입구에 위치한 소위 회기도장에서 80년 괴정동 본부도장을 마련한 후 4년여의 과도기를 거쳐 비로소 종단 <증산도>의 시대를 선포합니다. 종도사 안운산 성도사님을 중심으로 안경전 종정, 안원전 부종정, 박재도 부종정 및 기획실장 정형권 제 1 재무원장(대전) 김순환, 제2 재무원장(서울) 김남용, 전국대학생 포교회 회장 안원전, 수석 부회장 노상균, 부회장 김한기 , 부회장 강형석 외 산하 전국대학생 회장단 홍보부장 남우진 등.... 6임 연원제로 강력하게 포교대운을 진두지휘한 안원전의 포교대운을 못마땅하게 여긴 안경전은 사사건건 불만을 드러내고 시한부적인 동시에 독선적이고 오만한 마인드 때문에 결국 재정파탄과 안경전을 떠받친 중심 간부 정형권 실장과 그를 떠받친 윤혁중, 김정석, 권응선 등 국민은행 출신 3인 체제가 붕괴되어 떠나면서 그 끝을 드러냅니다.
학동 14-08-09 12:17
 
1.  당시 20대의 젊은 총사수는 내가 교주가 되어 들어앉으면 각장 역동적으로 포교할 수 있는 본인이 더 이상 포교운동을 전개하지는 못하지 않느냐고 하시며 교주자리를 마다
2.  이러한 주장에 결국 김종렬 간부는 후일 임술교를 개창한 것이지만 이때 사실상 속으로 조용히 쾌재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젊은 총사수가 용화동 본부에 거처까지 마련해주며 신앙적인 자리마저 마련해준 노회한 맹인 이상호
3.  보천교 시절부터 조선총독부 양해사건(일제하 보천교 공개화)을 기회삼아 그 인맥을 활용해 보천교 혁신운동을 벌이고 미륵불교 시절을 거치며 팔파연합회를 만들고 배신과 배사율을 밥먹듯 했던 노회한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해방이후 비록 끈 떨어진 갓 신세인 장님이 되었지만 아직 해도진인에의 꿈을 포기못한 그로서는 그 교활하고 간악한 심성이 전혀 변하질 않았으며 머릿속의 계략과 모책은 젊은 시절을 능가하면 능가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중.
4. 밖으로만 나돈 20대의 젊은 총사수는 노련한 형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이러한 사실을 꿈에도 생각을 못한 채 간과하고 해방이후 개척한 2변 조직을 송두리째 강탈당함
학동 14-08-09 12:20
 
홍범초의 패역 행위

1. 동생 이정립은 이러한 강탈 사실을 왜곡한 글을 써서 당대에는 시퍼렇게 눈뜨고 진실을 아는 사람이 많아 차마 공개는 못하고 세상1을 떠나고 그가 죽자 그 아들 이영옥이 장성해 그 왜곡된 유고집을 모아 <증산교사>를 발행하고 후일 이정립의 종통을 이었다고 주장
2.  젊은 총사수의 연원계열 중학교 1학년 신도였던 홍범초는 후일 자라 <증산진법회> 교주로서 국내의 내로라하는 석학들로 구성한 <증산사상연구회> 회장 자리에 있는 배용덕 회장을 몰아내고 자신이 회장이 되고자 끊임없이 괴롭히고 상제님에서 태모님으로 이어지는 종통을 부정하며 자신의 직계 연원의 뿌리인 태사부님을 부정
3.  해방이후 2변때 태사부님이 만든 대법사 증산교에 대해 적반하장으로 이상호가 만든 대법사 증산교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 주장하며 이상호를 배신하고 나간 인물로 날조
4.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성산 신도들을 초청한 공개석상에서 태모님 어진을 짓밟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범하고 <범증산교사>를 통해 왜곡된 2변 교사를 담은 <증산교사>의 내용을 한 번 더 왜곡해 비틀어됨
학동 14-08-09 12:23
 
이상호 이정립의 패역행위

1. 정읍 시기리에서 만난 이후 거처까지 제공받고 비록 명분만 있는 얼굴마담이지만 호기좋은 젊은 총사수가 개척한 단체의 중심자리까지에 배치된 그는 초기에는 감읍하며 순한 양으로 행세하지만 기회가 오자 이 조직을 명실상부하게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위해 일찍이 보천교 혁신운동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동생 이정립을 통해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조직을 야금야금 먹어가 마침내 조직전체를 장악하는 노회한 백전노장의 능력을 십분 발휘
2. 이상호는 한 술 더 떠 후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 근본부터 싹을 자르기 위해 당시 젊은 20대 총사수 안세찬을 끊임없이 청부살해하고자 박복만 같은 암살단을 끊임없이 파견하고 기회를 보며 탐색
3.  한편 이정립은 자신을 장가까지 보내준 젊은 총사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왜곡된 자료를 쓰지만 실상을 아는 많은 신도들의 눈이 두려워 당대에는 차마 왜곡된 글을 공표하지는 못함
4.  해도진인이라는 허망한 꿈만 안은 채 이상호가 65년 사망하자 1967년 초 실망과 좌절감에 휩싸인 채 1년 반도 안 되는 사이에 형을 뒤따름
향수 14-08-09 15:18
 
범초는 삼변이 기두할때 드디어 총사수님이 나오셧으니 전국의 신도들은 집결하라고 하면서 총사수에게 오시라고 편지를 보냅니다.범초는 진리를 모르는 분이 아니고 실은 다 알고잇엇음을 알수잇읍니다. 이는 마치 상호형제가 차교주를 배반하고 자신의 정통을 확보하기 위해 태모님을 집요하게 러브콜을 보낸것과 동일 한 것입니다. 다 알면서 순수신앙보다는 이정립형제처럼 정치적인 행보를 한것입니다.연원의 뿌리인  태사부님을 내치므로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내심이었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반역의 역사입니다.
78년경 신혼살림을 다 바쳐 도장을 개척한 큰아들은 거의 무일푼으로 부산으로 포교를 떠나고 일년가량 아무 소득이 없이 돌라오게 되고 그간에 도장은 안경전이 영어 를 중학생에게 가르치는 영어교습소 역활을 하였으며, 78년경 둘째 안택원을 데리고 천하사를 하려고 마음먹고 계속 회유하엿으나 안택원은 동아방송 기자를 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사람과사람들 14-08-10 06:23
 
불러 놓은 것 자체가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였군요
향수 14-08-10 10:05
 
제가삼십년도 더 전 1982년 초 처음으로 태사부님을 찾아뵌적이 있읍니다. 머리를 길게 장발로 하고 계실때입니다. 계용암과 또다른 한명을 데리고  찾아갔었읍니다. 게용암은 당시에 전국으로 상제님 진법이 뭔지 찾아다닐때 엿읍니다. 세벽 세시가 넘도록 영광스럽게 선정사님이 해주는 흰쌀밥을 먹기도 하면서 도담을 들엇는데 2변에서 3변이 넘어오는 말씀을 해달라고 하엿읍니다.

태사부닝은 그때 총사수의 명부를 보여주시고 홍범초선생이 보내온 편지를 꺼내 읽어주시면서 불같이 화를 내시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편지는 드디어 총사수님이 나오셨으니 전국 신도들에게 모여라는 편지를 보낸 내용과 인사말등 초청하는 내용이었읍니다.맨끝에 범초올림~이럴게 되어 잇었는데 태사부님은 아니 한참 도제가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기 호인 범초를 쓰면서 편지를 보낸것은 아주 예의가없는 불손한 행동이라는 것이었읍니다.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저희들은 과감한 태사부님의 면모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이때 계용암은 상제님 진리에 뛰어드는 계기가 됩니다.그외에 이정립형제등2변의 못된 신도들의 모습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해주셧는데 대부분 아시는 내용 입니다
향수 14-08-10 10:33
 
제가 마지막으로 태사부님을 뵌것은 선화하시기 1년 반전쯤 되는 때인가 태상사부님의 기일이엇읍니다. 그때 태사부님 안사부 제사를 지내는데 태사부님이  저도 참석하라고 하여 영광스럽게 제사에 참석 하엿읍니다. 이것도 다 교육이다 하시면서, 그때는 불편하시긴 햇지만 잠깐 일어나서 걸으시기도 하실때엿읍니다.그때는 선화하시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햇을 때입니다.
저에게 여러가지 많은 얘기를 해주셧는데 제 개인이 간직하는 내용이고, 선화후에 안사부는 형제들과 같이 도정을 집행하는 절호의 기회가 왓었는데도,스스로 기회를 발로차버리고 말앗읍니다.안사부도 혼자 판단하기는 크고 엄청난 일을 당하여 옆에서 잘못된 소리를 하는 누구인가가 잇엇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증산도 혁명 삼변 말복도수가 일어나는 불가피한 과정이 아니엇나 생각해 봅니다.태사분님은 상제님  구절장죽에 육장금불이라는 말씀처럼 구십을 넘으면서 선화하시엇읍니다.젊은시절 청춘을 다바친 상제님 사업을 배반과 반역으로 송두리째 던져버리고 다시 혈혈단신으로 새역사를 개척하시고 말복도수라는 크나큰 사명을 제자들에게 남기셧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