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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맥을 이은 장군 강감찬

낙엽군자 2013. 10. 10. 21:37

선교의 맥을 이은 장군 강감찬

박수영 / 객원기자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姜邯贊)은 우리나라 선맥(仙脈)을 인물별로 정 리한 『해동이적(海東異蹟)』이란 책에 이름이 올라간 인물 중 한분입니다. 강감찬 장군의 놀라운 행적을 따라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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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948~1031)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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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姜邯贊)은 고려의 문신입니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의 아들로 금주(지금의 낙성대)에서 고려 제3대 정종 948년 11월 19일에 태어났습니다. 983년(성종 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헌복 시(任軒覆試)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올라 예부시랑이 되었습니다. 그 뒤 국자제주(國子祭酒), 한림학 사, 승지, 중추원사, 이부상서를 역임했고 1018년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했습니다.
사후에는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습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고, 본관은 금주(衿州) 또는 진주이며,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입니다.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습니다.


하늘의 별이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 아이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인 낙성대는 ‘별이 떨어진 곳(落星)’이란 뜻으로, 장군의 탄생 이후 그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어느 날 한 사신이 밤에 동리로 들어서는데 큰 별이 인가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관리를 보내어 그 집을 잘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강감찬이었습니다. 강감찬은 문곡성(文曲星)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날 감식안(鑑識眼. 어떤 사물의 가치나 진위 따위를 구별하여 알아내는 눈)이 뛰어난 중국의 사신이 고려를 방문하여 여러 대신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신의 눈에는 딱 한 사람만이 눈에 띌 뿐이었습니다. 사신의 눈에 띈 그 사람은 맨 앞줄에 서 있었는데, 허름한 옷에 키도 작고 얼굴도 못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사신은 불현듯 그 쪽으로 가서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말하기를 “문곡성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아 어디에 있는지 몰랐었는데 여기 동방(東方) 고려에 있으시군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강감찬을 두고 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문곡성이 하늘에서 죄를 입어 인간 세상에 내려와 벌을 받게 되신 것이라 말했다 합니다.


천기누설을 막기 위해 입을 닫다
14108강감찬은 아홉 살이 되도록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의관이 멀쩡하고 글도 배우고 무엇이든 잘하는데, 단지 말 만 못한 것이죠. 어머니는 “언젠가는 감찬이가 말을 하겠지” 믿으며 지극정성으로 아들을 보살폈습니다.

아홉 살 가을, 고종사촌 누나의 혼인을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잔치에 갈려고 부산히 준비하고 있는데, 감찬이 다가와서 “어머니 고종누나 혼례식에 소자도 갈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응!? 네가 말을 했느냐, 어찌 말을 하는구나, 이런 축복이 어디 있느냐. 암, 가고말고. 가야지, 친척 어른들도 뵙고. 새 옷으로 갈아입자.”


감찬은 한마디만 하고선 더 이상 말이 없습니다. 어머니 혼자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기분이 들떠 있었습니 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을 못한다고 생각한 아들에게서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으니까요. 저녁 무렵의 혼례청에는 하객들이 가득했습니다. 고대하던 새 신랑이 혼례 마당 초석자리 위에 섰습니다. 훤칠하게 잘 생긴 신랑을 보느라 웅성웅성 정신들이 없었습니다. 그때 별안간,

“이 노옴. 네 본색을 밝혀라.”

감찬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하객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새 신랑도 놀란 토끼눈으로 소리 난 쪽을 살피 고 있었습니다. 한걸음 앞으로 쓱 나선 감찬이 또 다시 크게 외치며 새 신랑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이 노~옴! 네 정체를 밝히지 못하겠느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둔갑(遁甲)술로 속이려 드느냐!”

하객들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말 못한다고 집안의 걱정거리였던 감찬이가 그것도 새 신랑을 보고 벼락 치는 소리를 낸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건 감찬을 쳐다보던 새 신랑 얼굴이 푸르락 불그락하고 몸을 들썩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노~옴! 그래도 네 놈이!”

감찬의 우레와 같은 이 한마디에 버티던 새 신랑이 서너 번 곤두박질을 치고 넘어져 턱 뻗었습니다. 그리고는 스르르 여우로 변해갔습니다.

“오다가 새 신랑이 소피 본 일 있지요?”

새 신랑과 함께 온 하인들에게 감찬이 물었습니다.

“예, 까치 고개에서 소피를 보고 왔습죠!”

감찬은 그 말에 서두르며 말했습니다.

“시각이 급하니 속히 가보시오.”

새 신랑이 소피를 본 장소에 이르자 천년 묵은 여우가 새 신랑을 발가벗겨 바위틈에 쿡 끼워 놓은 것이 아니 겠습니까?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며 저체온으로 죽기 직전이었습니다. 이 같은 일화에 의하면, 하늘의 상제께서 강감찬이 열 살까지 천기누설을 못하도록 입을 봉해 고려에 보내신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고종사촌 누나 때문에 명(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만약 열 살까지 명을 받들었으면 대국(大國: 중국)의 천자가 되거나 아니면 대국을 호령할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강감찬의 놀라운 능력

-마마신을 수하처럼 부리다
원래 강감찬은 얼굴이 아주 잘생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리하면 큰일을 할 수 없다 하여 스스로 마마신을 불러 추남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마신 곧 시두손님은 천자(天子)의 출현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막강한 신인데, 강감찬은 마마신을 수하처럼 부렸으니 그 도력의 경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호랑이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다
강감찬이 한양판관으로 새로 부임하였을 때 경내에 호랑이가 많아 관리와 백성이 많이 물려 죽는 일이 발생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잠시 생각에 몰두하던 강감찬은 아전(衙前, 지방 관아에 속한 벼슬아치)을 불렀습니다.

“내일 새벽에 삼각산에 올라가면 늙은 중이 바위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네가 불러서 데려 오너라.”

다음날 새벽, 아전이 삼각산을 올라가 보니 과연 늙은 중이 바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전은 그를 강감찬 앞에 데려 왔습니다. 강감찬이 중을 보고 꾸짖기를 “너는 비록 금수(禽獸)이지만 또한 영(靈)이 있는 동물인데 어찌 이와 같이 사람을 해하느냐. 너에게 5일간의 말미를 줄 터이니 무리를 인솔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굳센 화살로 모두 죽이겠다.”

이 말에 늙은 중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할 뿐이었습니다. 이 이상한 광경을 보던 아전이 강감찬에게 영문을 물으니 강감찬이 늙은 중을 보고 명하기를 “본 모양으로 화하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한 마디에 그 중은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한 마리의 호랑이로 변하여 난간과 기둥으로 뛰어 오르니 그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으며, 아전은 놀라 자빠지고 말았습니다. 강감찬이 “그만 두어라.” 하니 호랑이는 다시 늙은 중으로 돌아가서 공손히 절하고 물러갔습니다. 다음날 아전이 동쪽 교외로 나가 살펴보니 늙은 호랑이가 앞장서고 작은 호랑이 수십 마리가 뒤를 따라 강을 건너갔다고 합니다.

-개구리의 소리를 멈추게 함
강감찬이 경주 도호사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백성들은 강감찬을 추남이라고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너무 소란스럽게 울어 백성들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강감찬이 돌에다 명령서를 써서 개구리 왕에게 보냈습니다. 그 이후로는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울지 않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못생긴 사또라 하여 강감찬을 무시하던 고을 백성들이 강감찬의 말을 잘 따르게 되었습니다.

-고을의 물을 마르게 하다
강감찬이 한여름 강릉에서 원주로 행군하던 중 대화면 하안미를 지날 때였습니다. 이 일대는 늘 물이 귀하여 봄가을에는 먹을 물이 부족하여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강감찬이 목이 말라 물 긷는 아낙네한테 물을 청했으나 아낙네가 인심이 고약하여 물이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강감찬은 이를 괘씸하게 여겨 이 마을에 다시는 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부적을 한 장 써 붙이고 갔습니다. 그 후부터 이 마을에는 우물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벼락을 잘라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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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은 전쟁 중에 벼락으로 죽은 병사들을 생각하며 사람들이 걸핏하면 벼락 맞아 죽게 되어서야 쓰겠냐 고 염려해서 벼락 칼을 분질러 없애려고 굳게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던 하루는 일부러 샘물가에 앉아서 똥을 누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벼락 칼이 내려와서 강감찬을 치려고 했습니다. 강감찬은 얼른 벼락 칼을 잡아서 분질러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후부터는 벼락 치는 횟수도 적어지고 벼락 칼도 반이 잘려버린 터라 얼른 나왔다가 얼른 들어가게 되므로 사람들이 훨씬 덜 벼락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감찬이 죽은 후 다시 문곡성의 원신으로 돌아가자 그의 앞에 뇌신(번개신)이 나타나 다짜고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벼락 칼이 반토막이 난 것을 고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문곡성은 그 이후부터 벼락 칼을 잇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쳐보려고 노력했지만, 원상태로 만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겨우 이은 칼은 직선으로 잇기가 불가능하여 엇갈리게 접합시켜 지금의 벼락 모양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랫사람에게 베푼 깊은 배려
거란족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고 개선한 강감찬을, 당시의 왕 현종은 큰 연회를 베풀어 그의 노고를 치하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왕은 금화팔지(金花八枝, 금으로 만든 여덟 가지 꽃 장식)를 만들어 머리에 꽂아주는 극진한 환영을 하였습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장군은 슬며시 일어나 내시를 향해 따라 오라고 눈짓을 보냈습니다. 강감찬 장군은 주위를 살핀 후 아무도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시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금 전에 밥을 먹으려고 밥주발을 열었더니 빈 그릇이더구나. 아마도 너희들이 실수를 한 모양이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내시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버렸습니다. 벌을 받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감찬 장군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됐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 한 가지 묘안이 있으니 그대로 하거라.”

강감찬은 내시의 귀에다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습니다. 그리고 장군은 자리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울렸습니다. 그때 내시가 다가와 장군에게 말하기를

“장군님, 진지가 식은 듯하오니 바꿔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빈 밥그릇을 들고 나온 내시는 따뜻한 밥이 든 밥그릇을 들고 다시 들어갔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은 귀주대첩
거란의 성종은 여러 차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1018년 12월, 소배압(거란족 출신의 요나라 장군)이 이끄는 거란의 10만 대군이 다시 고려를 침략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에서는 강 감찬과 강민첨이 군사 20만 8,300명을 안주(황해남도 재령군의 고려때 이름)에 주둔시켰습니다. 강감찬은 다시 흥화진(평안북도 의주군 일대를 칭하는 고려 때 이름)으로 나아가 정예기병 1만 2천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큰 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내(흥화진 앞의 삼교천)를 댐처럼 막고 거란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려로 진격하던 거란군은 수심이 얕아진 삼교천을 아무런 의심 없이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거란의 군사들이 삼교천의 중심부에 이르자, 고려군은 막았던 물을 터서 거란군에게 공격을 가하였고 거란군이 혼란에 빠지자 이번에는 매복해 두었던 병력으로 기습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배압은 이에 아랑곳없이 개경(개성의 고려 때 이름)을 향하여 공격을 계속하였습니다.

이에 강민첨이 이를 추격하여 10만 대군을 대파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은 계속 하여 개경을 향해 공격을 하니 고려군은 이에 대한 새로운 방어계획을 준비하였습니다. 귀주(압록강이남 청천강 이북에 있는 강동 6주의 하나)는 우리나라 서북쪽의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 요충지입니다. 특히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개경으로 오기 위해서는 서북계의 북로와 남로 두 통로를 이용해야 되는데, 귀주는 북로의 중심지입니다. 그런 까닭에 귀주는 중국으로부터 침공이 있게 되면 항상 대접전이 벌어졌던 지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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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배압의 거란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1019년 1월 3일에는 개경에서 백리(1리는 약 0.4㎞ 그러므로 약 40 ㎞정도) 떨어진 신은현(황해북도 신계군의 고려 때 이름)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고려군은 청야전술*로 대응해 도성 밖의 곡식은 모두 제거하고 백성들은 성 안에 대비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군의 대비가 강화되자 소배압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군사를 돌려 철군을 시작하였는데, 고려군은 개천(평안남도 서북부의 도시)에 이른 거란군을 급습하여 5백여 명을 죽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거란군이 2월 1일 귀주를 황급히 빠져 나가려 하였습니다. 이때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이를 요격(공격해 오는 대상을 기다리고 있다가 도중에서 맞받아치다)하였는데, 마침 개경에서부터 추격해오던 고려군이 가세하고 또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몰아와 고려군에게 유리해져서 이를 틈타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의 시체는 들을 덮었으며, 말과 무기 등 거란군에게서 빼앗은 물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 다고 합니다. 처음 10만이라고 칭하던 요나라 군사 중 살아 돌아간 자는 고작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
거란군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고려 침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참패였습니다. 거란의 성종은 이 전투 패배의 책임 자인 소배압에게 “네가 적을 가벼이 여겨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대하려느냐. 나는 너의 낯가죽을 벗긴 다음에 죽여 버리리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강감찬의 나이 70이었습니다.


맺는 말
주변의 분들에게 강감찬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을 물었습니다. 그답은 귀주대첩, 키가 작다, 못 생겼다, 얼마 전 드라마 속의 인물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난세에 나라를 구한 분들도, 자신을 희생해서 만인에게 도움을 준 분들도 분명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 우리 조상들에 대해 많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로 입시위주의 암기 교육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손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이를 낳아놓고 마치 성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는 불과 200년 남짓한 역사를 알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우리는 일만 년 역사를 반 토막 낸 것도 모자라 오천년 역사마저도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우리 역사를 올바로 알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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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고려 태조 왕건 이후 삼국을 통일한 뒤 신흥사(新興寺)를짓고 공신당(功臣堂)을 세우면서 공신당의 벽에 삼한공신의 초상을 그려 넣었습니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하여 이들을 삼 한벽상공신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북두칠성과 문곡성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로서 벌성(伐星)이라고도 하니, 하늘의 이법으로 무도한 것을 치는 일을 합니다. 오행 중 수(水)에 속하며 하늘의 모든 권리를 한 손에 거머쥔 별입니다. 하늘의 저울추인 천권성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북두칠성의 기운을 타고난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로는 김유신(등에 칠성무늬), 강감찬 장군(문곡성), 정몽주(어깨 위 칠성모양의 검은 점 7개), 안중근(가슴에 흑점 7개, 그래서 칠성이 응했다 하여 ‘응칠’이라고 불렀다) 등이 있습니다.

낙성대
14108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그가 태어나던 날 밤에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落星垈)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 자리에 장군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기 위해 3층 석탑을 세웠습니다. 거란의 40만 대군을 무찌르는 등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친 고려의 명장인 강감찬 장군. 그를 기리기 위해 1973년 사당과 부속 건물을 새로 세우고 석탑도 지금의 낙성대 경내로 옮겼다고 합니다. 1974년 2m의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사적임을 표시하였습니다.
특히 층 석탑(서울지방문화재 제4호)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탑에는 ‘강감찬 낙성대(姜邯贊落星垈)’란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강감찬 나무
서울시 자료와 문화재청에 따르면, 서울시 기념물로 최고령 나무는 수령 1천 살이 넘은 관악구 신림동 굴참나무(천연기념물 271호)입니다. 이는 강감찬이 지나다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나무로, 주민들의 보살핌을 받아 아직도 굵은 도토리를 맺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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