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관련

[스크랩] MB복지 노후대책 없어 자살, 등록금 없어 자살, 굶주리다 아사하고.

낙엽군자 2011. 2. 12. 14:09

부모는 짐되기 싫어 죽고, 아들은 등록금 없어 죽고
최고은은 '배고파' 죽고... MB, 이게 '복지 과잉'인가?
[주장] 밥 한 그릇·김치 한포기 건네 줄 수 없는 '대한민국 복지정책'
11.02.12 01:22 ㅣ최종 업데이트 11.02.12 01:22 안호덕 (minju815)

  
최고은 감독의 영화 <격정소나타>의 한 장면.
ⓒ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최고은

뒤늦게 알려진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언론이 분주하다.

 

'촉망받던', '유망한', '젊은 무명' 등등 살아서는 받아보지 못한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어김없이 붙었다. 이는 그가 옆집 문에 붙여 놓았다던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란 쪽지 내용과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많은 사람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다.

 

난 그 서글픈 죽음을 9일 아침 밥상머리에 앉아 TV뉴스를 보다가 알게 됐다. 며칠째 반복되는 해적 소동의 뉴스 말미에 지나가듯 전해주는 뉴스. 서른두 살 젊은 여자가 굶어서 죽었단다. 할 말을 잃는다. 멍하니 아내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다 밥숟가락을 내려놨다. 더 이상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목구멍을 넘긴 밥덩이마저 명치 끝에 걸린 것 같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사람이 굶어 죽다니.

 

그러나 출근해서 사무실 컴퓨터 화면으로 전해지는 그의 죽음에 관련된 기사들은 더 이상 서글픈 감성을 자극하지 못했다. 아니 서글픔이 가라앉은 자리에서 화가 치민다. 아니 입버릇처럼 떠벌리는 사회 안전망은 도대체 왜 이 죽음을 막지 못했을까? 선진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던 복지제도는 굶어 죽어가는 이 사람에게 밥 한 그릇, 김치 한 포기 건네 줄 여유도 없었단 말인가?

 

최고은씨가 죽어가던 그 시각, 정치인들은 재래시장을 찾아 설명절 인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대통령은 방송3사를 통째로 전세 내어 "내가 해봐서 아는데…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정권은 무엇이고, 그 많은 정치인은 왜 존재하는가? 온갖 수식어를 붙여 국민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언론들, 언론은 이 서글픈 죽음 앞에서 일말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하더니, 대체 이게 뭔가

 

사실 최고은씨의 죽음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열악한 영화계에만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자식에게 짐 되기 싫다며 60대 부부가 같이 목숨을 끊은 것이 석 달 전 작년 11월에 일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40대 가장이 직장에서 해고되자 딸을 목 졸라 살해하고 노모에게 흉기를 휘두른 사건은 1월 11일 서울에서 일어난 일이다.

 

'도토리가 싫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고기를 먹게 해달라'며 절규를 노래하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씨의 죽음도 최고은씨의 안타까운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뿐인가? 유래 없는 한파 속에서 1월 16일 부산에서, 19일에는 서울역 근처에서, 26일에는 제주도에서 노숙자가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그리고 최고은씨의 뒤늦은 죽음에 언론이 뜨겁게 달아 올랐던 날(9일), 등록금 문제로 걱정하던 대학생이 즉석복권과 학자금 대출 서류를 옆에 놓아두고 번개탄 석장을 피워 자살했다는 소식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기사였다(BBS 불교방송)

 

사람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 주변에는 항시 이런 서글프고 불합리한 죽음이 있어왔다. 단지, 촉망받는 작가가 죽어서 슬퍼할 게 아니라, 경제대국 10위권 진입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사람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등록금 때문에 번개탄 가스를 마시며 죽어나가는 현실에 슬퍼하고 분노해야 한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이런 죽음들의 공통분모를 찾아내고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면, 또다른 최고은의 죽음이 줄을 이을 수밖에 없다.

 

이들의 죽음 뒤에 감추진 망자들의 절규. 그것은 찾아내고 치유하려는 노력을 정권은, 정치권은, 그리고 언론은 다했다고 할 수 있는가? 서울과 부산, 제주에서 얼어 죽은 노숙자, 등록금 걱정에 자살을 택한 대학생까지. 이들의 죽음과 최고은씨의 아사가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가? 누가 더 슬픈 죽음이라고 논할 수 있는가?

 

영화계 승자독식구조, 신자유주의의 다른 얼굴

 

  
롯데마트가 내놓은 5000원짜리 튀김닭 신문광고.
ⓒ 최은경
롯데마트

승자독식의 구조. 영화계의 이런 구조가 최고은씨의 죽음을 불러 왔다고 한다. 난 영화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승자독식 구조가 영화계에 논란이 된 것은 한두 번이 아닌 것 같다. 주연 배우는 수억 원의 출연료를 받지만, 스태프와 얼굴이 알려지지 않는 배우들은 생활고에 허덕인다는 것은 이미 많은 언론에서 다뤄진 내용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하다. 사실 승자독식 구조는 영화계 문제만이 아니다. 이 사회에 만연한 신자유주의의 다른 얼굴이다.  

 

자본의 승자는 이익을 독식한다. 이마트 피자, 롯데마트 치킨 논란은 유통계의 승자독식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대기업 횡포에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대기업, 공기업은 성과급 연봉 50%를 이야기할 때 '하루 식비 300원'의 직장에서마저 쫓겨나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맨얼굴'이다.

 

미성년자가 수십억 원의 주식을 물려받고 아버지 사장 자리는 당연히 아들 자리가 되는 현실. 부는 부대로 대물림되고 가난은 가난대로 대물림되는 것이 것이 승자독식의 구조다. 이런 모습은 젊은 작가를 아사로 몰아간 영화계 내 승자독식 모습과 뿌리가 다르지 않다.

 

젊은 작가의 죽음을 정책적 비난에 이용하지 말라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사지 멀쩡한 사람이 굶어 죽는 것까지 나라에서 책임져야 하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나라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얼마나 값진 노동을 하느냐를 떠나, 최소한 대한민국 국민이면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일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돈 한 푼 못버는 노동을 하든, 그런 노동의 기회조차 없어 무직 생활을 하든, 집 없이 떠도는 노숙의 생활을 하든 최소한 굶어죽고 얼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복지의 근간이고 사회 안전망의 기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게 정말 복지 과잉이라고 생각하나?

 

좀 더 욕심을 내보자. 등록금 반값 공약이 지켜졌다면 대학생의 자살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1년 천 만 원을 넘나드는 대학 등록금. 100만 원 월급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아비를 둔 대학생은 산더미 같은 등록금 고지서를 두고 어떤 고민을 할까? 오죽하면 즉석복권을 옆에 두고 생을 마감했을까. 자식에게 짐되기 싫다며 나란히 죽음을 맞는 노부부. 그들에게 노후의 평안한 삶을 빼앗아 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노인이 스스로 고려장을 택하고, 남겨진 빚더미가 무서워 아이를 안고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는 세태.

 

이런 현상은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인가? 이런 죽음을 막기 위해 사회 안전망과 복지 제도를 확대하자고 하는 것이 '세금 폭탄을 생각하지 않는 포퓰리즘의 발상'이라 비난받아야 하는가?

 

우리나라 아동 복지 예산은 OECD 국가 평균의 1/5 수준으로 꼴찌란다. GDP 대비 사회복지 예산 지출이 멕시코에 이어 최하위. 그런 가운데 노인 자살률이 매년 10.4% 증가세를 보이며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통계는 우리나라 복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객관적으로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도 정부와 여당, 대통령까지 나서서 복지 과잉을 걱정하고 있으니, 도대체 복지의 수준을 어디에 맞추겠다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복지 수준을 두고 아이 낳기를 독려하고 서민 정책을 펼친다고 한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호응하고 얼마나 높은 정책적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겟는가? 출산장려 정책, 노인정책, 서민정책 무엇하나도 복지 정책의 확대 없이 거저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제발이지 함께 살자. 승자 독식의 사회. 아무리 잘 사는 사람 잘 살고, 못사는 사람 못사는 자본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사람은 없게 하자. 등록금 걱정에 자살하고 노숙자가 길거리에서 얼어 죽고 노인 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회. 복지 과잉이라 말하지 말자. 서른 둘 시나리오 작가의 아사를 영화계 일로 치부하지 말자. 그의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권이나, 정치권이나, 이 기사를 쓰고 있는 나 조차도.

 

최고은님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등록금 때문에 번개탄 석장을 피워 놓고 죽어 간 대학생에게도 기성세대로서 속죄한다.

 

 

출처 : 새기모 - 새로운 기독교를 열어 가는 모임 -
글쓴이 : 최승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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