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개혁논단에 "大人"이라는 아이디로 올린 글입니다(너무 길어서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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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부는 국내에 선전하면서 중국이 소위 4대 고대문명국가의 하나라고 해왔다. 우리는 5천년의 문명역사를 지닌 역사깊은 나라라는 것이고, 이것은 국민교육에서 주요한 요소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가소로운 논조는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서 사람들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다. 사실, 세계사에 대하여 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우스개소리에 불과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우리는 이 소위 4대 고대문명국가라는 용어부터 살펴보자. 국제적으로나 학술계에서 이런 유치원식의 용어는 사용하지는 않는다. 비교적 가까운 것으로는 "몇대문명발상지"라는 표현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중국은 당연히 "4대"에 낄 수가 없다.
만일 "4대 가장 오래된 문명국가"를 정의한다면, 중국은 4대는 커녕 10대국가에도 아마 끼어들기 힘들 것이다. 중국의 문명은 기원전1500년경의 상(商)왕조에서 시작된다. 3500여년의 문명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른 몇대 문명은 그러나 중국보다 천년 내지 2천년 먼저 시작하였다. 중동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유역의 문명은 기원전3500년경에 시작되었고, 이집트의 나일강유역문명도 기원전35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그리스 에게해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시작되었고, 인더스강유역문명도 기원전25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큰 지역으로 나누어서 그런 것이고, 조금 더 범위가 적은 문명을 따진다면, 히타이트문명, 베니키아문명, 페르시아문명, 유대문명, 앗시리아문명등도 있다. 만일 4대 고대문명국가를 따진다면 당연히 위에 언급한 나라들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 중국이 끼어들 자리는 없는 것이다.
주의력깊은 독자들은 아마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위에 든 문명이 시작한 시간을 보면 4대문명은 각각 중동문명, 이집트문명, 그리스문명, 인도문명이 우선 시작되었고, 중국이 그보다 늦다는 것을. 그런데 왜 중국정부의 선전자료에는 그리스가 없어지고, 그보다 1000년이나 늦은 중국이 들어간 것일까?
이것은 무의식중에 일어난 착오가 아니다. 실제로 이것은 오랫동안 정부에서 조종한 반서양적인 정치배경하에서 시스템적이고 계획적으로 서양문명을 폄하해온 각종 선전활동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스문명은 서양문명의 기원이다. 중국 관방의 의식속에는 서양문명이 우월하다는 어떠한 말도 나타나기를 원하지 않았고, 서양문명에 대하여는 어떡하든 폄하하려는 것이 남아 있다. 여기에 정권을 장악한 "민족주의자"들은 서양문명에 대하여 극도의 원한과 질투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장난을 치게 된 것이다.
독자들은 아마도 또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정부가 선전하는 것은 "5천년문명"이지 "3500년문명"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고고학과 역사학의 기본상식과 개념에 대하여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어떤 "역사학자"는 장기간동안 이런 기본상식과 개념을 혼동시킴으로써 민중을 농락해왔다. 이것은 바로 "문화"와 "문명"의 두 가지 개념의 구별문제와 "문명"을 구성하는 기본특징의 문제인 것이다.
고고학과 역사학에서 말하는 "문화"와 "문명"은 엄격하게 구분된다(비록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섞어서 쓰고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문화(Culture)"는 석기시대범주의 개념이다. 석기시대중 특히 신석기시대와 이후 금석병용(金石倂用)시기의 원시부락 인류유적을 말할 때 쓴다. 이에 반하여 "문명(Civilization)"은 청동기시대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고, 인류가 청동기시대에 진입한 이후의 국가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문화(Culture)와 문명(Civilization)이 두 개의 영어단어의 어원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양자를 구분할 수 있다. 문화의 어근인 Cult-의 원시적인 의미는 "경작"이었고, 이것은 문화라는 개념이 농경과 연결되는 원시부락시대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명의 어근인 civ-의 원시적인 의미는 '시민'이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문명이라는 개념의 본뜻이 시민의 출현과 동시에 생성된 도시 및 성공업과 연계되는 청동기시대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명은 몇개의 주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문자, 야금술, 도시국가, 종교의식등등이다. 바로 이것은 상공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하나의 문명이 시작했는지 여부를 판정하고, 언제 시작했는지를 판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몇가지 표준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또한 고고학의 발견에 따라 확정되는 것이지, 신화전설, 민간고사, 야사잡서 또는 "사기(史記)"와 같은 고고연대보다 2천년이상 이후에 쓰여진 소위 "역사기록"으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고고학과 역사학의 상식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외국인들이 쓰는 표준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판단해야하냐고? 우리는 우리의 표준을 가지고 판단하면 되지 않냐고?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문명"과 "문화"의 이 개념은 원래 서양에서 건너왔고, 이것 뿐아니라 고고학이나 역사학의 방법이나 체계도 모두 서방에서 수입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자신의 표준을 쓴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서방의 개념을 이용하여 "우리는 5천년의 문명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선전해서도 안된다. 당연히 우리의 말로 고쳐서 "우리는 5천년의 신화전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표준을 가지고 얘기하게 되면, 중국은 5천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지만, 다른 국가나 지역 특히 지중해 주변지역과 중동지역은 5천년역사가 아니라, 적어도 1만년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하더라도 우리가 이익볼 것은 없다.
그럼에도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오랫동안 "문화"와 "문명"을 혼동시키면서 민중을 오도하여왔다. 예를 들어, 신석기시대의 원시부락문화(예를 들어 앙소문화, 용산문화, 양저문화등등)를 "문명"시대로 탈바꿈시켰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역사는 순식간에 1,2천년 앞당겨졌고 심지어 2,3천년 앞당겨졌다. 그리고, 다른 국가나 문명을 소개할 때는 또다른 표준을 쓴다. 다른 국가나 문명의 시자근 엄격하게 계산하여(문자, 야금술, 도시국가출현등), 무형중에 중국과 그들 나라간의 거리를 좁혀버렸다. 심지어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착각을 느끼게 한다. 중국이 실질적으로 다른 나라나 지역들보다 훨씬 먼저 문명이 시작된 것처럼.
아래에서는 중국 및 세계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중국문명의 역사가 개시되는 때로부터 얘기한다. 먼저 얘기할 것은 이런 기본사실이다. 중국의 최초문명인 상(商)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에 시작되었고, 지금으로부터 3500년전이다. 지점은 하남성 안양일대이다.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중국지역에서의 최초의 문자인 갑골문, 성숙된 청동제련술, 그리고 국가의 형태가 이미 출현하였다.
설명드릴 것은 이것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국제학술계의 세계사 저작이나 교과서를 뒤져보면 중국의 문명은 모두 상나라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당연히, 중국은 자기의 역사교과서에서는 소위 기원전 2000년의 하(夏)왕조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국제학술계는 이런 말만 남아있는 하왕조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어떤 고고학적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문자의 출현도 없을 뿐아니라 청동기를 제련한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고, 더구나 국가형태가 존재하였다는 어떠한 근거나 도시유적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떠돌이사기꾼같은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는 비록 전중국에서 하왕조가 존재하였다는 증거를 증명할 수 없게 되엇지만, 그래도 얼굴두껍게 환상중의 하왕조를 교과서와 선전자료에 밀어넣어놓고 세상 사람들에게 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곤, 이리두(二里頭)등지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문화유적을 하왕조로 포장해서 소위 '도성'유적이라고 잘모르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찾은 거을 볼 수 있다. 한번은 내가 <<하상주단대공정>>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강연자인 고고학자는 우리들에게 소위 하왕조의 "도성유적" 복원도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자세히 보니 원래 몇개의 나무지붕을 덮은 집이었고, 표준적인 원시부락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위대한" "하왕조"의 "도성"이라고 선전한다. 그리고 또 뭐가 있는가? 고고현장에서는 몇개의 진흙덩어리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진흙을 쌓아서 담장을 만드는 것이다. 원시부락에서 집을 만들 때 쓰던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대량의 동찌거기, 석기와 골기...분명하지 않은가? 단지 신석기시대의 씨족부락유적일 뿐이다. 소위 "하왕조도성"이라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만일 이것을 도성유적이라고 한다면, 세계각지에는 신석기문화중의 도성유적이 너무 많게 될 것이다. 스위스 왕진의 호거문화(기원전5천년전)는 사람들이 오만개의 나무조각으로 기초를 삼가 호수위에 대형 촌락을 건설했다. 그것이 위대한 하왕조의 도성유적보다 훨씬 크다. 서양사람들은 얼굴이 중국사람만큼 두껍지 않나 보다.
그리고 일부 고고학자들은 중국의 기타지방에서 일부 동기(銅器)를 발견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더욱 오도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금석병용시대에 천연동을 사용하여 동기를 만드는 것은 신석기시대말기에 이미 출현하였다. 다른 나라나 지역의 신석기문화유적에서도 그런 것은 많이 나타난다. 이것을 표준으로 한다면 내가 앞에 언급한 몇개의 고문명지구의 역사는 다시 앞으로 1,2천년 당겨져야 한다.
다른 나라의 고대문명지역에서는 모두 완벽한 도시유적이 발견된다. 그리고, 모두 벽돌구조로 되어 있다. 이집트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그리스, 서아시아, 인더스강, 특히 그리스의 미노스문명유적은 크로소스왕궁(기원전2천년)이 화려하고, 조기문명중에서 첫손가락으로 꼽을만하다. 중국의 4천년이후의 궁전건축도 이것에 비교할 수 없다. 한번 가보면 알 것이다.
그리고, 인더스강유역의 초기문명인 하라바문명(기원전2500년)이 있다. 모헨조다로와 하라바등지에서 발견된 많은 완벽한 도시유적은 벽돌구조로 되어 있고, 매우 복잡하다. 고증에 따르면 도시인구는 이미 3,4만명에 달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집트의 남성유적(기원전 3500년)이 있다. 어떤 책에서는 이집트에는 도시가 없다고 잘못 적었고, 마야문명과 잉카문명에는 문자가 없다고 잘못 적었는데, 사실은 모두 있다.
사실대로 말하면, 소위 "상왕조"의 은허유적은 살제로는 궁토유적에 불과하다. 규모가 조금 클 뿐이다. 근본적으로 도시유적은 아니다. 만일 갑골문이 발견되지 않았고, 청동기제련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국제적으로 상문명은 아마도 공인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다른 나라와 비교한다면 증거가 너무 적다.
중국의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하여 변명을 하는 경우가 있다. 중국문명은 일찌기 벽돌과 나무로 만들었으므로 보존하기 어려웠었다고. 다른 나라의 경우 특히 서방은 주로 석재건축을 사용하여 보존된 것이 많다고. 심지어는 얼굴두껍게 허풍까지 떠는 경우가 있다: 중국의 벽돌나무건축은 다른 문명의 석재건축기술보다 뛰어나다고. 사실은 전혀 반대이다. 내가 위에 언급한 몇개의 고대문명지역은 불굴된 조기문명유적은 실제적으로 모두 구운 벽돌로 건축된 것이다. 가정 전형적인 것이 인더스강유역의 하라바문명유적이고, 유프라테스티그리스유역의 울, 바빌론, 수사등의 도시유적이고, 이집트의 남성유적이고, 그리스의 미노스문명유적이다. 실제적으로 서방전축의 전형적인 대표는 고대로마의 건축이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두 석재를 사용하여 건축하지는 않았고, 대량으로 벽돌,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하였다. 현재까지 프랑스, 스페인등지에 보존된 고가수로등은 아주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중국의 조기문명유적은 사실 벽돌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궁토(窮土)에 목재를 섞어서 건축했다. 당연히 보존하기 쉽지가 않다. 그러나 그 이유는 바로 기술수준이 낮았던 데 있는 것이다. 중동, 서방등지에서는 벽돌로 건축하는데, 중국에서 진흙에 나무를 섞어서 건축하는데 필요한 기술보다는 훨씬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었고, 건축원가도 훨씬 더 들었고, 훨씬 더 견고했다. 당연히 보존되기 쉬었던 것이다.(그리스 도시문명시기의 거석으로 건조한 성벽은 두께가 20미터에 달한다)
그러므로, 소위 하왕조의 유적을 찾지 못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원래 존재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단지 석기시대의 원시부락의 유적만이 나올 뿐이다. 게다다, 더 중요한 두개의 증거 즉 문자의 출현, 금속제련술의 출현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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