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관련

[스크랩] 한민족 10대위인3, 최영주석

낙엽군자 2008. 9. 2. 21:20



 

 

 

 

 

      한민족 10대 위인전    

 

 

 

 

 

연개소문 주석,  태무진 칸에 이어  최 영 주석편입니다.

 

(주석이란 실질적통치자라는 뜻으로 지금의 대통령이나 총리

수상에 속하는 오래된 명칭입니다)

 

 

 

 

 

 

 

 

 

 

 

                      최영 崔瑩  주석  

 

 

1316(충숙왕 3)~1388(우왕 14).

 

 

 

                고려의 명장이며 정치가

 

 

 

 

 

 

 

         최영 주석은 후고구려(고려) 최대의 명장이며 정치인이다.

         전쟁에 나가서는  단 한번도 진적이 없는 불후의 명장이며,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던 훌륭한 공직자였다.

 

 

 

 

             "공직자는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명성과 위업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원나라에까지 알려져  칸(황제)으로부터 두차례에 거쳐 큰포상을 받은바 있고, 평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친 위대한 코리아인이다.

 

고려말, 원나라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기황후(고려강씨여인)로부터 신흥 명나라 정벌의 제의를 받고 명나라 정벌군 10만(호활 40만군)을 편성하여 가장 아꼈던 휘하 장수 이성계를 정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대대적으로 출병시켰으나 화교후손으로써 명나라와 내통하던 이성계의 위화도 대반역으로 참살된 후,부정한 정권인 이조에 의해  나쁜 군인으로 조작 왜곡된 한민족위인 중, 대표적 한 분이다.

 

최영주석이 귀양갈때나 참수당하기위해 개경으로 올라올때,거리마다 그를 흠모하던 인파가 구름같이 모여들어, 최영의 모습을 보고 통곡하여 울지 않은 백성이 없었다.(고려실록) 이때문에 이성계는 이조를 개국하면서 20만에 달하는 고려의 양민을 대살륙하는 세계사에 유래없는 만행을 자행한바,

 

반역의 역사, 암울한 이조시대 500년이 시작되는 민족의 갈림길에서 너무도 억울하게 희생된 한민족의 위인이었다.

 

 

 

          다음은 요점별로 정리한 그의 양력이다.

                     (참조: 고려실록,청연사,이조실록,삼우 고려실사,삼우조언) 

 

 

 

본관은 철원(鐵原).

  

수사공(守司空) 유청(惟淸)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사헌규정(司憲糾正) 원직(元直)이다.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의 휘하 장수로 발탁되어 첫 왜구 토벌을 나서면서부터 이성계의 반역으로 참수될때까지 전투에 임해서 한번도 진적이 없었다.(단한번의 패배가 있었다면 이성계의 반역군에게 패배한것으로써 7만대 460명의 전투였는데 정통사학계 및 군사전문가들은 전투로 보지 않음)

 

 

처음 전투에 선봉군대장으로 출정하여,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우달치(于達赤:司門人)에 임명되었는데, 공민왕은 청렴,엄격하며 부하들과 같이먹고 자는 젊은 장군 최영을 각별히 신임하였다.

 

1352년,공민왕1년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발생하였다. 왕은 안우(安祐)·최원(崔源) 등으로 편성된 토벌군에 최영을 선봉장에 임명하여 출정시켰는바 반란군 완전히 토벌하였다. 왕은 그공을 높이사 호군(護軍)사령관에 임명하였다.

 

 

 

               대호군단과 고사대첩

 

 

 1354년5월, 공민왕은 대호군단(大護軍團)을 창설하였다.

 

 최영을 사령관으로 하는 대호군단은 공민왕의 직접명령을 받는 친위軍隊으로써, 고려 제1무장인 최영과 휘하에 유탁·염제신,이성계,조민수등 40여명의 장수 및 정예군사 3,550명 전원이 철기 및 전차대로 구성된 중무장 군대였는데, 특히 백마 200필로 구성된 기단대(오늘날 의장대)가 있어 창설기념사열에 참석했던 공민왕 및 대신들이 그 화려함에 크게 감탄하였다.몽고군과 고려군의 차이는 몽고군은 가죽갑죽을 입어 서양의 철복(가야철갑형태)에 비해 움직임이 자유로왔는데 고려 철기군은 얇은동전같은 쇠비늘을 겹쳐만든 철갑옷으로 . 행동이 자유롭고 가죽보다 강한방어력을 가진철갑군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 해, 형제국인 원(元)나라에 장사성(張士誠)의 반란이 일어나 전국을 휩쓸자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는데, 공민왕은 고려의 정예군인 대호군을 파군키로 하였다.

 

대호군은 원나라로 원정하여, 1만5천의 원나라 군과 함께 고우(高郵)·사주(四州)에서 장사성의 5만반군과 대전투를 벌이는데, 고우에서 수리전술로 무려 10배가 넘는 장사성의 주력부대 3만7천을 괴멸시키고, 원나라군이 고전중이던 사주로 신속히 이동하여 이곳에서 전투중인 1만5천 반란군 배후를 공격하여 괴멸시킴으로써 장사성의난을 완전히 진압하는 경이적인 전과를 올렸다. 고려실사에서는 이 전투를 최영고사대전투 라 한다.

 

 

 

 

        고려장군이면서 원나라 상장군을 겸한 최영

 

 

 

이 전공으로 최영은 원 황제로부터 고려장군 최초(최후)로 원나라 장군직인 원중추 상장군에 봉하는 칙령을 받고, 몇달간 주둔하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는데, 당시 마차 50여대에 달하는 원황제로부터의 진귀한 포상품들과 함께 돌아왔다.

 

 

수리병술: 수리란 매,독수리를 뜻하는 우리고유어인데, 높은곳에 위치해 있다가 목표가 잡히면 신속하게 하강하여 날개를 펴고 낚아채버리는모습에서 착안한 병술이라 수리전술,수리전법이라 부르는,속전속결의 군사작전중에 하나다.고조선때 제1단군이 창안하여 반도에서-중국-러시아-몽고-독일-헝가리 지역까지 정복했던 병술로써 (후일 몽고제국이 재정복한 지역임), 최첨단무기(고조선당시 최초쇠검인 청동쇠검,활등),스피드(기마), 강도높은 훈련, 높은 사기등 4가지를 근본으로 하는데, 고조선에 이어 고구려(패수해전,살수,패수대첩등)-몽고(마흐레육전,모스크동전 등)-고려(최영)- 금(청=팔기군)-이조(이순신:학익진)으로 이어진 한민족 전통병술이다. 세계최고의 병법은  중국의 손,오자병법이 아니다. 원래 구려병술서인데 고려때까지 거의 집집마다 한권씩 있었으나  이조개국당시 이방원(이조태종)의 왕명에 의해 전국적으로 모조리 수거 소각시켰는바, 현재까지 남아있는 책자는 구전외 하나도 없다.

 

 

 

 

 

       공민     우로타 사건과 원 공격

 

 

 

 공민은 뛰어난 인물로써, 이 공민시대는 후고려 역대시대 중 가장 부유하고 번성한 시대였다. 고려실사에서는 원제국시대의 고려왕 중, 유일하게 공민을 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바 공민의 고려가 상당한 강국이었슴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공민의 재임중 여러 차례 북방을 공략하여 원나라와 대등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고려실사에서는 그를 호걸이라고 평 한다.

 

1356년 원나라 사신 우로타사건(칸의 사신으로써 왕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무례사건이 발생하자 공민은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공식사과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원의 담당 장관인 야율체사가 회신하기를 우로타의 무례사건은 사신 우로타가 아니라 개인 우로타의 행동으로 통보하자, 친원대신인 이만훈,도민규를 삭탈관직,하옥하고 대호군단 최영으로하여금 서북면병마사 인당, 서북도호장 오순역등과 함께 압록강 서쪽의 18개 성(8참站?)을 점령하고 해당지역의 원 관리들을 추방시킨 후, 고려의 영토로 복속시켜 버렸다.

 

이에 원조정은 고려의 강대함을 인정하고 같은해 10월, 우로타를 고려사신으로 임명한 좌위효태부장 야율체사를 파직 구금하고 원과 고려는 원래 같은 칸(한)족으로써 엄연히 부마지국 이라는 친서를 보내 고려의 영토를 인정하고 이 사건을 무마하였다. 이사건을 우로타사건이라고한다.

 

이듬해인 1357년 최영은 서해(西海)·평양(平壤)·이성(泥城)·강계(江界) 체복사(體覆使)를 거쳐 이듬해 양광전라도왜적체복사(楊廣全羅道倭賊體覆使)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의 군선 220여척을 격파했다.

 

1359년 홍건적 1만5천이 기습공격하여 서경(西京:평양)을 함락시키자, 왕은 최영에게 서북면병마사 이방실(李芳實) 등을 배속시켜 토벌시키고 이듬해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平壤尹兼西北面巡問使)로 승격시킨후,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임명하였다.

 

1361년, 홍건적 2만군이 재침입하자 최영은 수도 개경을 비우고 후퇴하였다. 이에 개경을 함락한 홍건적이 성안에 있던 음식등을 먹으며 승전잔치를 벌이는 방심한틈을타 이방실·안우의 군으로하여금 이를 야습케하여 개경을 수복하고, 대호군단은 도망치는 이들의 퇴로를 끊어 완전히 섬멸하였는 바, 돌아간 홍건적은 한명도 없었다. (연사 최영)

 

공민은 이 공을 높이평가하여 도형벽 상공신(圖形璧上功臣) 제1등공신으로 전토(田土)1천마와 노비1천8백을 하사하고 전리판서(典理判書)직에 임명하여 조정의 유력한 실력자로 자리잡게되었는데.

 

최영은 하사받은 전토를 노비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노비신분을 파하여 평민으로 살게 하였다.(노평가: 고려의 최영시대 유행가로써 최영의 파격적인 신분타파로 공이 높아질수록 평민이 많아진다는  최영에 대한 칭송민가, 이같은 최영의 독단적행위는 당시 기득권층으로부터 3차례나 탄핵을 받았으나 공민왕에 의해 모두 묵살됨=고려실사에 의하면 이같은 최영의 덕으로 노비에서 평민으로 신분해방된 수가 수가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하기전까지 무려 12만에 이르렀다. 

 

 

1363년 김용(金鏞)이 사주한 흥왕사(興王寺)의 비교적 큰규모의 반란사건이 발생하였는바, 최영은 휘하의 조민수,이성계,우선,안우경,김장수(金長壽)등을 보내 이를 진압하고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1등공신을 겸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평리(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제조정방(提調政房)을 겸함으로써 공민왕이 가장 신뢰하는 명실상부한 고려조정의 제1인사가 되었다.

 

이듬해인 364년에는, 지금의 만주 요동지방의 목자사였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추대하고 2만의 군대로 쳐들어오자,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이성계,조민수,안우경등과 함께 정주(定州) 달천(獺川)지역에서 섬멸하였는데

 

이때 최영은 최유는 반란죄로 압송 참수하였으나 항복한 요동군사들은 충성을 맹세케 한후, 모두 돌려보냈는바 이들이 후일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멸망하자 즉각 독립을 선언한 려진(금나라 후일 청나라)麗振(女眞 아님)이다.

 

이어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 밀양박씨 후손)가 1만군대로 연주(延州)를 공격하였는데  최영이 직접 나가 박백야대를 설득하였다. 박은 고려에 충성을 맹세하고 가져온 군수품을 헌납하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친히 국청사(國淸寺)로 나가 개선주연(凱旋酒宴)을 베풀었다.(국가의 충신에 대해 왕이 직접 먼거리를 나가 맞이하는 고조선으로 터의 전통 군신의례)

 

 다음해 강화(江華)와 교동(喬桐)에 왜구2만이 재침해오자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로 이를 섬멸시켰다.(동강(東江) 진수(鎭戍))

 

 

 

이때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새로운 개혁정치를 시행하였는데,이 과정에서 최영은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삭탈되고 6년동안 유배되었다.

 

신돈이 처형 된,

1371년, 최영은 공민왕의 부름으로 유배생활을 마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복귀했다. 1373년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가 되어 군호(軍戶)를 편적(編籍)하여 군함을 만들게 하고 장수와 수령들의 출척(黜陟)을 단행했으며, 각 변방 호목(자사)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군수(軍需)를 확충하는 등 군대의 내실에 주력했다.(이때 제주자사는 거부함)

 

이조사록에 의하면 공민왕의 아들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등의 비열한 중상모략이 있는데 이것이 이조의 전형적인 고려역사 죽이기 수법임을 밝혀둔다. 신돈은 승려출신의 철학자,정치가,개혁가로써 청렴결백한 사람이었으나 군사,국방에 대해서는 일천한 사람이었다.

 

  신돈의 군개혁방안은 고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온 연방군체체가 아닌 중앙집권적형태로써 군사강국이었던 고려군대를 약화시킬수밖에 없었고 북쪽이나 남쪽의 빈번한 침략으로부터 고려를 지키는데 결함이 있는 방책일수밖에 없었다. 결국 공민왕은 군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신돈을 제거하기로 하고, 신돈을 불러 때가올때까지 귀양가있기를 명했으나 신돈은 최영과 달리 죽기를 자청하였고, 그렇게 제거된 개혁적 인물이다.

 

   이러한 신돈의 군개혁안인 중앙통제체제는 당시로써는 매우 혁신적인 군 시스템  이었다. 이 신돈의 군개혁안은 후일 이조에 계승되어 실시되었는데,

 

   이조정권은 왕권유지및 강화의 목적으로만 이용했기때문에 결국, 군의 약화를 가져와 이조는 자주국방의 개념이 사라지고 민족개념머저 희박해짐으로써 사대주의심리를 증대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1374년, 최영은 경상·전라·양광 도순문사가 되었는데, 이때 평소 최영을 음해하던 헌사(憲司)등의 탄핵을 받게되었는바, 최영이 스스로 물러나려하자 공민왕이 이를 불허하고 직접 조사하였는바, 중상모략임이 밝혀져 대사헌 김속명(金續命), 지평 최원유(崔元濡)등이 파직·귀양조치되었고 최영에게는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의 호가 하사되었다.

 

이어 평소 고려조정에 대해 비협조적이던 제주자사의 정벌에 나서, 양광도·전라도·경상도 도통사(都統使)로써 염흥방(廉興邦)·변안렬(邊安烈)·임견미(林堅味)·나세(羅世) 등을 인솔하고  전함 314척, 군사 2만 5,100명을 거느리고 제주를 평정했다.

 

이후 공민왕이 서거하고 그 뒤를 이어 우왕이 등극하였는데 우왕은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1375년(우왕 1)에 최영을 국가제1공신이라 칭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왜구 1만5000군이 삼남지방을 침입하였는바, 우왕은 최영이 고령인점을 고려하여 박인계(朴仁桂)를 토벌군원수(元帥)로 임명하여 2만5000의 병력을 주고 토벌토록하였으나 연산(連山)에서 대패하였다.

 

최영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휘하의 이성계,조민수등과 함께 1만군으로 출정을 자원하여 운봉(雲峰)의 홍산(鴻山) 전투에서 왜군을 섬멸시켰다.

 

우왕은 그 공을 높이 평가하여 주석직인 시중(侍中)에 임명하였으나 최영이 고령을 이유로 이를 극구 사양하여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77년 왜군 2만이 서강(西江)으로 침입하자 최영은 육도도통사·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받아 왜구를 격퇴시켰고, 교동과 강화의 호강자(豪强者)가 점유한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군비에 보충토록 하는 한편, 노약자들은 내지(內地)로 옮기고 장정을 머물게 하여 농사에 임하도록 하였다.

 

또 각 원수의 휘하 군사를 각 10명씩을 징발하고 성중애마(成衆愛馬)·관사(館司)·창고에 속한 자를 군사로 삼아 강화를 지키게 하는 등 군개혁을 통해 왜구 방비에 힘썼다. 1378년 다시 왜군 2만이 승천부(昇天府:지금의 豊德)로 쳐들어오자 휘하의 이성계 조민수 등과 출정하여 이를 무찌르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전라 수군 확충

 

 

우왕은 1380년 최영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로 임명하였는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왜구 때문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에 천도가 백성들과 농사에 해로우며, 또 내성(內城)을 쌓아서 대비하면 되며, 전라도에 수군기지를 확충하면 될 것이라 하여 이를 철회시키고 해도통도사가 되어 

 

 국리민복에 종교가 따로없다 며, 전국 사찰의 재산과 승도(僧徒)를 징발하여 전라도에 수군기지를 만들어 대전함 100척과 중,소함 230척등 총 330여 척을 만들어 고려수군의 전력을 강화하였는데, 이 시스템은 이후 이조의 이순신때까지 유지되어 왜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군의 기초가 되었다.

 

 

 이듬해, 수시중(守侍中)을 거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내고, 1384년 판문하부사·문하시중이 되었으나 이를 모두 사퇴하다가 조정 대신들의 만장일치결의서를 두번이나 받고서야1388년 수문하시중에 올랐다.

 

 문하시중에 오른후, 염흥방·임견미등의 반역을 적발하여 이들을 처단했는데, 우왕은 최영의딸을 납비(納妃)토록 명하여 최영이 한사코 이를 사양했으나 5번에 거친 우왕의 거듭된 재촉에 의해 납비하였다.

 

 

 

 

 

원제국의 기황후, 고려여인 강씨의 지원군 요청과

고려의 10만 정벌군 출병

 

 

 

 이때 원나라가 통치하던 중원에는 명국이라는 새로운 진족국가가 출현하여 원나라를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에 원나라의 황후로써 실권자였던 기황후(고려여인)는 모국인 고려의 왕과 최영주석에게 칙사를 보내 신흥 명국을 제압할 수 있는 지원군을 퍄병해 주기를 요청하였고

 

고려의 우왕과 최영주석은 10만대군을 편성하여(본대7만 +요동군3만), 휘하의 이성계를 우장군겸 정벌군 총사령관으로, 조민수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대대적으로 출발시키게 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대 반역 !!

 

 

 

 

 

화하족 후손으로써 평소 명나라와 친분이있던  이성계는 고려조정의 명나라 정벌방침이 결정되자, 5명의 아들을 데리고 최영주석의  집으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명나라를 정벌하여 구려의 원한을 갚고, 고려민족의 숙원인 대륙회복의 큰뜻을 달성하겠노라고 맹세하고, 만약 중국정벌의 위업을 이루지 못한다면 자신과 다섯아들은 살아돌아오지 않겠다는 혈서를 최영에게 바쳤다.

 

이에 최영은 이성계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조민수를 부장으로 임명하였으나  하군대부 박인충의 진언이 있어 최영은 이성계를 총사령관으로하되 군을 좌,우군으로 나누어 좌군사령관에 조민수를 임명하는 군체제로 변경하여 파병하게 되었다.

 

정벌군의 식량은 2주일치로 요동까지의 분량이었으며 요동지방에서 자사 김세환의 3만군과 합류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도성을 출발한 이성계와 그 아들들 및 일파는 미리 계획한 대로 위화도에 도착하자 뚜렷한 이유없이 전군의 행군을 멈추도록 명령하였고 이곳에서 장마가 올때까지 지체하였다. 군은 식량이 떨어지고 마침내 장마가 오자 사기가 떨어져 개경을 출발할때의 군사들이 아니었다.

 

이성계는 비오는날 전군을 모아놓고  비를맞으며 순 억지인 "4불가론"을 주장하며 회군을 역설하고 선동하여 마침내 고려본성으로 회군하여, 평양과 개경을 점령한후 명나라의지시에 따라 최영의 목을 베고어 참수하고  우왕을 폐위한후 독약을 먹여 죽인후, 고려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로부터 지시받은대로 허위의 중국조선인 기자조선을 계승한 조선 즉, 이씨조선를 개국한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로써  고구려와 동족인 돌궐의 원나라를 물리치고 진족들의 명국을 세운 진족들은 고려(고구려포함)만 생각하면 치가 떨릴정도로 무척 싫어했기때문에 반역에 성공한 이성계에게 고조선(원래 조선)을 신화화하기위해 조작한 기자조선을 계승한 조선을 개국토록 지시한것임)

 

 

 

                    사라져버린 한민족의 정체성 

 

             500년간 말살된 홍익인간, 배달(정복)의 뜻

 

                 

 

 

멸망한 고려와 원제국

 

 

 

 

 

이로써 고려의 숙원인 북벌 즉 중원정복, 고토회복의 뜻은 사라져버리고 중원에는 진족들의 나라인 명정권이 한반도에는 후기자조선인 이씨조선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고려와 원제국이 멸망하고 명과 이조가 각 개국하여 지배하게되자, 과거 고려지방이었던 요동호목 김건주(자사로써 김누얼의 7대손, 요동자사 김세환의 형, 누루하치의 친인척)은 방어상 요동을 버리고 만주로 이동하여 (건주)려진국을 건국함으로써 요동지방은 자동으로 중국으로 편입되었으나 만주만은 려진국(금나라 후일 청나라)으로 유지되게 되었다. 이로써 오늘날까지의 암울한 한반도 시대로 접어드게 된것이다. 

 

고려의 정벌군이 위화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요동자사의 보고를 받고서야  상황을 파악한 우왕과 최영주석은 친히 평양까지 왔으며 최영은 직접 위화도로 와서 병력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이미 이성계는 대군을 회군시켜 고려를 공격하기위해 진군하고 있었다. 이에 최영은 황급히 우왕을 모시고 개경으로 돌아와 성문을 굳게 닫고 궁안의 나인등으로 조직된 460명의 결사대로 맞섰으나 7만대 500은 전투대상이 아니되어 이성계군이 성벽을 넘자 모두 칼을 버리고 도망가버렸고 황실앞에서 최영혼자 칼을 휘두르다가 사로잡히고 말았다.

 

 

한편, 고려정부로부터 10만대군이 출병했다는 파발소식을 듣고 환호성을 지르던 원 황실과 기황후는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오지않는 고려의 지원군을 원망하며 명군에게 패퇴하여 몽골초원으로 도망쳐갔고 이후 기황후 고려강씨는 8개월 후 병을 얻어 죽었다.

 

 

 

 

 

이성계의 최영주석 참살, 우왕 독살, 이씨조선의 개  

           고려양민 약 20만 대살륙 사건

 

 

 

 이성계의 7만군이 개경에 난입하자 500명이 안되는 궁인들로 급조된 낭군으로 맞서 싸우다 사로잡힌 최영은 고봉(高峯:지금의 고양)에 유배된후, 합포(合浦)에 옮겨졌다가 공료죄(功遼罪)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을 당했고, 우왕은 귀양지에서 독약을 받아마시고 죽었으며 왕비로써 우왕과 함께있던 최영주석의 딸도 우왕이 죽자 음식을 먹지않고 42일을 울기만하다가 죽었다.

 

당시, 참수되기위해 귀양지에서 개경으로 올라오는 최영주석의 죄인호송 길에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백성들어 엎드려 통곡하였는데 그 행렬이 160여리에 달했다.(이것은 고려인들의 대규모 항의시위였다)때문에 이성계는 고려부흥운동을 염려하여 이조개국직후 전국적으로 포고령을 내려 3개월에 거쳐 고려왕씨 일가친척 및 관련 현자 학자를 색출하여 모조리 살해하였는데 이때 죽은 고려양민의 수가 20만에 달했다.

 

(이사건은 세계역사에 유례없는 유일한 일로써 이조실록 및 사학계에서는 비밀로부치고 현재의 이조위주의 왜곡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으나 정통사학계에서는 이 일을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중공의 동북공정보다 10배나 더 심각한 중요한 역사조작 및 왜곡사례로 평가한다)

 

 

 

 

 

                 최영주석에 대한 후기

 

 

 

최영은 대표적인 고려인으로써 전쟁에 임해서 단 한번도 진적이 없는 뛰어난 명장이었다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나 말타기 활쏘기에 명수로써 특히 활솜씨는 날아가는 두마리의 새를 꿰뚫을 정도였고, 유년시절부터 연개소문을 존경하여 금해병서를 손에 놓지 않았으며 "내가이 크면  연개소문의 못다이룬 위업을 이어받아 반드시 고토를 수복(중원정복)을 달성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여 사람들은 연개소문의 혼이 씌인 아이로 불리웠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있다.(청연사 최영)

 

실재로 최영은 마침내 중국정복의 뜻을 실천하여 고려의 전군을 동원하여 중국정복군을 출병시켰으나, 자신을 믿드시 남도 믿는 결점으로 이성계에게 속아 대군의 지휘권을 이성계에게 맡기는 실수를 범하여 마침내 이성계에게 천우의 기회를 준 셈이 되고 말았다.

 

 최영은 생전동안 약 150여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는데(휘하전투 포함)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불가능하다고 할정도의 전과이다.

 

 "무패의 장군이면서도 겸허하기를 규수(여자)와 같았으며, 재물과 여색을 멀리하여 첩이 없었으며, 주석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집이 누추하여 우왕이 개축을 명해도 한사코 사양하여 죽기전까지 4칸의 방을 넓히지 않았다."

 

이러한 지도자가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공직자의 부정부패,가렴주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의 재임동안 국가는 튼튼했고 국력은 강했었다. 

 

이런 훌륭한 인물이 된 바탕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잘 훈육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높은 가치관과 강한 생활철학이 남달리 깊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은  공직자는 무릇 황금보기를 돌같이 보아야 한다 명언인데 자신은 이에 평생토록 충실하여 이성계일파가 반역을 성공한 후, 그의 죄를 밝히려고 아무리 조사해도 단  하나의 비리도 없었으므로 참수함에 있어서 죄목은 단하나 "대국인 명나라를 정복하려한 대역죄" 란것이었으니, 고려황실에 대한 역적이 아니라 외국인 명나라에 대한 역적이라니...당시 이성계란 인물이 철저한 중국숭배주의의 근본적 본성을 알수있는 명백한 부분이라 하겠다.

 

이러한 정상적인 경우에서는 도저히 납득할수없는 세계역사에 유일한 이 위화도 회군에 대하여 고려백성들은 최영장군의 죄를 반대, 시위하며, 분노하여 울지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한 고려실사(연사)기록이 아니더라도, 한민족이라면 위화도회군이 단순히 친명,친원적인 견해차이 이전에  본질적인 어떤문제가 있었던 일임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역의 이조시대동안 최영은 아주나쁜사람으로 기록되고 해석되어 철저하게 왜곡되었는바 위의 사실을 전하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사람이 별로 없이 잊혀져가는 왜곡된 국사를 배우고 또 가르치는 현실이 괴롭고,안타까울뿐이다.

 

그의 묘는 :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데 , 찾는 사람이 거의 없고, 아는사람도 별로 없이 초라하다. 그의 묘는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하여 적분(赤墳)이라도 불린다.

 

매년 음력 5월 단오날에 부산 자성대(子城臺)에 있는 사당(祠堂)에서 '최영장군제'가 열리고 있으며, 단군과 같이 우리 고유 무속신앙에서만 숭배의 대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조작, 반역,왜곡된 역사를 막고저 길 한가운데 서있던 위인 최영주석, 이성계에 의해 그가 죽임을 당하면서 이미 고려정신, 한민족 정신도 죽임(말살)을 당하기 시작한것이다.

 

 

 역사의 갈림길...

 

중국정벌의 고려군 10만의 출병과 회군과 본국멸망은 세계 어느나라 역사에도 없는 일로써, 최영주석과 이성계는 우리 한민족역사의 갈림길에 있던  인물로써... 이후 이조500년의 빈곤..그리고 오늘의 남북분단 현실과 사회적 갈등(노사분규),빈부격차(땅투기),역사왜곡,가치관혼란,황금만능주의,부정부패(서울대공대 공금횡령등등...)이사회에 만연한 어두운 그림자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왜곡,조작의 이 사건에 대해 우리는 객관적안목에서 다시 역사를 평가할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현재의 국사는 위화도반역은 정당했다고 기록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치고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근대사는 쿠데타와 부정부패로 점철되어있고 그런 생활속에서 우리는 살고있습니다.

 

사회는 온통 불신과 투쟁, 차별이 난무하고  가진자들은 자기만 잘 살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바 이러한 잘못된 의식이 우리 한민족을 파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이조시대의 정책답습이요, 이를 이용한 일제시대의 통치수법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 관습이며 폐습이며 문화인것입니다.  

 

역사를 바로 알고

 

역사를 바로 잡읍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르치는 국사는

중국국사에다가, 철저하게 이조위주로 왜곡되어있는 조작된 국사입니다.

 

이 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보다 10배,100배나 더 심각한

근본적 문제임을 밝혀둡니다.

 

 

 

 

참고: 청연사,고려사외2종

 

도움: 삼우선생,박명제,임한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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