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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삼국지(4부)제갈량의 출사표-鞠躬尽瘁、死而后已

낙엽군자 2020. 10. 11. 13:44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

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

초중말복 5진주 세명. 5+5+5(6)=15(16).마지막 5진주는 판모리 6서시

 

 

<통합경전>다음 밴드에 들어가면 전체 파일 다운됩니다. 비회원 입장 가능.엄밀히 말하면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밝혀지는 '천지공사 진법을 설명해주는 안내서'로 <통합경전 서문>입니다.<통합경전> 전체는 본문 포함 기독교 신구약 두배가 넘는 분량입니다. http://band.us/#!/band/61758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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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통찾기 키워드.

안내성 운암강수만경래 초중말복 3대혈대 세살림 추수도수. 현무경 午,申,戌 符 세살림 사명자 도수. 5, 6번째 새끼손가락 막둥이 도수. 이율곡 흑룡 오죽헌 몽룡실 탄생 비화와 성포고민환 바둑판 성주 모시는 공사. 김형렬, 유찬명, 김자현 10만 명 포교 공사와 이율곡 10만 양병설 자운백범공사. 율곡을 대신한 성포 고민환의 성주, 현인 모시는 남조선 배 공사(석천시명하고 백운가경타가 상풍서호에 자운백범~). 임술생 문왕 추수도수, 운암강수만경래 초중말복 세살림 3부자 도수. 평생불변심 안** 도수. 경만장 안내성 도안 세살림 도수. 임술생 문왕사명자에게 부친 초중말복 3부자 세살림 3련불성 도수 및 3대 혈대 대업 이루는 도수. 나는 1자 3자를 뽑았노라-壬 일수 甲 3목. 청홍황 초중말복 세살림 사명기를 안내성 성도 사가에 비장시켰다가 기유년(1909) 천지공사 종필선언 이후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의 사오미개명장에 진법이 나오면서 펼쳐지게 한 도수.

 

 

정사 삼국지(4부)제갈량의 출사표-鞠躬尽瘁、死而后已

 박기수  2018. 6. 23. 20:09

 

 

 

鞠躬盡瘁(국궁진췌) 鞠躬尽瘁、死而后已
적벽대전후 류비는 신야 양양의 백성들 류표의 구부를 안치할곳이 없어 동오에 형주의 남군을 빌린다.
손권은 빌려주며 익주를 얻은후 다시 돌려주길 바라는데 소식이 없자 동오의 여몽은 관우가 조위군과 결전중에 남군을 습격하고 패주하여 맥성으로 도주중에 살해되고 만다.
관우의 피살과 남군의 탈취로 류비는 격분하여 군대를 동원하는데 익주의 부대를 이끌고 관우의 복수에 나선다.
그러나 뜻밖의 소식으로 동오정벌은 연기되는데 조조가 죽은후 북방에서 조비가 헌제를 폐하고 황제에 즉위한다.
조조는 적벽대전이후 북방으로 물러나 오랫동안 북방의 안정에 주력하는데 10여간 전북방을 완전히 통일한다.
북방의 통일로 조조의 威望(위망)은 점차 높아져 조조의 지위도 제왕이 되고 위국공이 된다.
그는 왕이되자 현재의 하북 임장현의 ()으로 자신의 근거지를 옮겨 정치적 중심이 되고 헌제는 허창에 남겨 유명무실한 존재가 된다.
두목의 시 적벽에 나오는 동작대를 업성에 세우고 한헌제의 모든 권한을 자신이 장악한다.
이미 황제의 지위를 차지한 것으로 사람들이 황제에 등극을 권유하는데 거부한다.
손권이 관우를 패퇴시킨후 조조에 上表(상표)하고 칭신하고 조조에 칭제를 건의한다.
그러나 조조는 손권의 상표를 천하에 공개한후 자신을 화로에 넣고 죽이려 한다고 엄살을 부린다.
그는 황제가 되길 거부하나 왕망처럼 다른 각색을 준비한 것으로 주문왕이 되길 원한다고 공언한다.
서기220년 정월 조조는 평생동안의 투쟁을 접고 낙양에서 죽어 향년 65세로 진수는 삼국지위지.무제기에서 한말 천하대란을 종결하였다고 하며 법술과 기책으로 치국과 용병을 하였고 천하의 인재를 모아 박대한 흉회로 대지로 당시의 적수들에 승리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원소와 관도지전전에 적과 내통한 부하들의 행태를 모두 전쟁중에 문서와 편지를 확보하나 공개적으로 모두 불살라 대도를 보여줄 정도의 인물로 인재들을 확보하게 된다.
그는 인재등용시 능력위주로 사적인 품덕은 불문하여 난세의 인물관을 실행하여 唯才是擧(유재시거)란 평을 얻는다.
조조사후 장자인 조비가 위왕을 계승하고 인맥과 지반을 모두 승계하고 이들이 개국공신이 되고자 조비를 황제에 옹립하려는 추동을 한다.
그래서 조조가 죽은 220년 그해 10월 하남성 임영현인 영천의 업에서 영수변에 제단을 마련하고 수선대를 세우고 수만인이 모여 산양식이 열려 옥새를 받고 황제직을 찬탈한다.
이후 조위라 부르는데 한헌제는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우대를 받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헌제는 산양공이란 봉호를 받아 10여년을 살다가 죽는데 조비보다 오래 살았다.
그가 죽은후 조위의 조정은 시호를 ()이라 하고 헌황제가 된 것으로 사천의 류비는 조비의 칭제를 듣고 반년후 221 4월에 칭제한다.
국호를 ()으로 하여 사람들은 촉한이라 부르는데 즉시 오나라와 전쟁준비를 하는데 조운이 국적은 조위로 오에 대한 공격을 반대하여 이웃하고 친선으로 연합을 주장한다.
그래서 2년이 지나 관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사라질 무렵 형주와 강릉의 탈취를 위해 정벌을 결심하고 관우의 죽음을 명분으로 하여 장강을 따라 남하한다.
이들은 강릉에는 도착하기도 전에 손권이 보낸 군대에 강릉의 서변인 호북 의창과 의도사이의 이릉과 호정에서 막힌다.
손권은 조조에 칭제를 건의하고 병력을 집중하여 류비군을 막는데 남군을 습격한 육손이 지휘한다.
육손은 수비전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류비와 전투를 피하고 장기전에 돌입하는데 반년을 대치하여 촉군은 지치고 만다.
류비는 진퇴양난으로 진무양책 퇴몰체면으로 고심하는데 병사들의 피로로 곤경에 처한다.
육손은 건조한 기후가 계속되자 화공으로 공격하는데 수십리에 걸친 류비의 영채에 수만군사들은 화공으로 투항하고 전군복멸로 역사에서는 이릉지전이라 한다.
이후 촉한은 사천에 봉금한채 머물고 류비는 백제성(중경시 봉절현)으로 퇴각후 수치와 분노로 성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


성도를 진수하던 제갈량은 백제성에서 탁고를 받아 아들이 부족하면 제갈량이 즉위하도록 하자 출사표를 남겨 국궁진췌라는 성어를 남겨 후주를 보좌하고 공업을 이룰 것을 맹서한다.
그러나 제갈량과 후주 류선의 관계는 음영이 깃들고 마는데 제갈량은 智謀(지모)의 화신으로 불리는데 류비의 탁고이후 제도를 개선하고 익주목을 겸하여 국가대사를 처리한다.
그래서 궁중과 부중의 양체계로 부중의 승상부에서 통치하여 시기와 의심으로 불화가 생겨난다.
동의 오나라와 사자를 보내 손권과 다시 연합하여 후환을 없애고 내정에 주력하여 진수는 삼국지에서 자세히 설명하는데 자신이 촉한의 관리로 봉직하여 믿을만 한다.
제도정비후 제갈량은 운귀지역의 남정으로 남방경영에 주력하여 중원정벌의 보급지로 개발한 것이다.
한무제시에 군현을 설치한 곳이나 류관통치로 중앙정부의 통치가 이루어지 못한 곳으로 내부안정이후 남중으로 출병하는데 사천의 서남부터 정벌을 시작하고 귀주 운남을 차례로 정복한다.
이전쟁은 마속의 건의로 시작하는데 소수민족의 수령들을 농락하는 것이 핵심으로 칠종칠금의 고사를 남긴다.
류선이 계위한 5년후 제갈량은 중원을 북벌하기로 하는데 227년부터 한중에 본부를 세우고 북벌준비를 시작한다.
이시기에 제갈량은 류선에 장문의 전출사표를 올리는데 존망지추라 위급한 정세를 말하고 북벌을 통해 선제의 위업을 달성하여 한실중흥의지를 보여준다.
제갈량은 각안기분의 삼국정립을 해소하여 선주의 감은과 소국과민의 촉한의 세력확장과 민심의 응집을 목표로 북벌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북벌은 정치적인 민심획득의 수단으로 역량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명분상 우위와 촉한의 확장을 위한 고심책이었던 것이다.


隆中1对2
亮3躬4耕陇亩,好5为《梁父吟》6。身长八尺,每自比于管仲7、乐毅8,时人莫之许9也。惟10博陵崔州平、颍川徐庶元直与亮友善,谓为信然11。
时先主12屯新野13。徐庶见先主,先主器14之,谓15先主曰:"诸葛孔明者,卧龙也,将军岂16愿见之17乎?"先主曰:“君与俱来18。”庶曰:“此人可就见19,不可屈致20也。将军宜枉21驾顾22之。”
由是先主遂23诣24亮,凡三往,乃见25。因屏26人曰:“汉室倾颓27,奸臣28窃命,主上蒙尘29。孤30不度德量力31,欲信32大义于天下;而智术浅短,遂用猖蹶33,至于今日。然志犹未已,君谓34计将安出35"
亮答曰:“自董卓已来36,豪杰并起,跨州连郡者不可胜数37。曹操比于38袁绍,则名微而众寡39。然操遂能克40绍,以弱为强者,非惟41天时,抑亦人谋42也。今操已拥百万之众,挟43天子而令44诸侯45,此诚46不可与争锋47。孙权据有江东,已历三世,国险而民附48,贤能为之用49,此可以为援50而不可图51也。荆州北据汉、沔,利尽52南海,东连吴会,西通巴蜀,此用武之国53,而其主不能守,此殆54天所以55资56将军,将军岂有意乎57?益州险塞58,沃野千里,天府之土59,高祖60因61之以成帝业。刘璋暗弱62,张鲁在北,民殷63国富而64不知存恤65,智能之士思得明君。将军既帝室之胄66,信义67著68于四海,总揽69英雄,思贤如渴,若跨有 荆、益,保其岩阻70,西和诸戎71,南抚夷越72,外结好孙权,内73修74政理75;天下有变,则命一上将将荆州之军76以向宛、洛77,将军身78率益州之众出于秦川79,百姓孰敢不箪食壶浆80,以迎将军者乎?诚如是81,则霸业可成,汉室可兴矣。”
先主曰:“善!”于是与亮情好日82密。关羽、张飞等不悦83,先主解之84曰:“孤之85有孔明,犹86鱼之有水也。愿87诸君勿复言。”羽、飞乃止。 [3] 






전출사표
臣亮言:先帝(1)创业(2)未半而中道(3)崩殂(4),今(5)天下三分(6),益州疲弊(7),此(8)诚危急存亡之秋也。然(9)侍卫之臣不懈于内,忠志之士忘身(10)于外者,盖追先帝之殊遇(11),欲报之于陛下也。诚宜开张圣听,以光(13)先帝遗德,恢弘(15)志士之气,不宜妄自菲薄(16),引喻失义(17),以塞忠谏之路也(18)。
宫中府中,俱为一体(19);陟罚臧否(20),不宜异同:若有作奸犯科(21)及为忠善者(22),宜付有司(23)论其刑赏(24),以昭陛下平明之理(25);不宜偏私(26),使内外异法也(27)。
侍中、侍郎郭攸之、费祎、董允等,此皆良实,志虑忠纯(28),是以先帝简拔以遗陛下(29):愚以为宫中之事,事无大小,悉以咨之(30),然后施行,必能裨补阙漏(31),有所广益(32)。
将军向宠,性行淑均(33),晓


出师表书法(3张)


畅(34)军事,试用(35)于昔日,先帝称之曰“能”,是以众议举宠为督(36):愚以为营(37)中之事,悉以咨之,必能使行阵(38)和睦,优劣得所(39)。
亲贤臣,远小人(40),此先汉所以兴隆也;亲小人,远贤臣,此后汉所以倾颓(41)也。先帝在时,每与臣论此事,未尝不叹息痛恨(42)于桓、灵也。侍中、尚书、长史、参军,此悉贞良死节(43)之臣,愿陛下亲之信之,则汉室之隆(44),可计日(45)而待也。
臣本布衣(46),躬耕于(47)南阳(48),苟全(49)性命于乱世,不求闻达于诸侯(50)。先帝不以臣卑鄙(51),猥(52)自枉屈,三顾(53)臣于草庐之中,咨臣以当世之事,由是感激(54),遂许先帝以驱驰(55)。后值倾覆,受任于败军之际,奉命于危难之间:尔来二十有(56)一年矣。
先帝知臣谨慎,故临崩寄臣以大事也(57)。受命以来,夙夜忧叹(58),恐托付不效,以伤先帝之明;故五月渡泸(59),深入不毛(60)。今南方已定,兵甲已足(61),当奖率(62)三军,北定中原,庶竭驽钝(63),攘除奸凶(64),兴复汉室,还于旧都(65)。此臣所以报先帝而忠陛下之职分也(66)。至于斟酌损益(67),进尽忠言,则攸之、祎、允之任也。
愿陛下托臣以讨贼兴复之效(68),不效,则治臣之罪(69),以告(70)先帝之灵。若无兴德之言(71),则责攸之、祎、允等之慢(72),以彰其咎(73);陛下亦宜自谋,以咨诹善道(74),察纳雅言(75),深追先帝遗诏(76)。臣不胜受恩感激。
今当(77)远离,临表涕零(78),不知所言(79)。 [4-5]  



諸葛亮北伐
제갈량북벌은 정원장군인 위연의 건의로 시작되는데 한중태수로 관우 장비후의 제3의 명장으로 병분양로로 주력군을 제갈량이 친정한 것인데 진창도에서 관중으로 진입할 것을 건의한다..
한편 위연은 한초에 한신이 북벌하던 길을 따라 간 것으로 위연은 만여 기병으로 자오곡에서 장안으로 향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노선에 회의적으로 농우에서 관중을 공격하는 우회적인 노선을 취하기로 한다.
농우는 감숙 청해지역의 량주부근인데 관중과는 먼곳으로 제갈량은 인구확충을 바란 것으로 우선 주변에 강역을 확대한후 실력을 기르고 지반을 넓히려 한 것이다.
제갈량은 관중과 형주의 정복보다는 역량과 지반의 확대가 진정한 우선목표로 량주탈취로 롱우와 촉중을 하나로 하여 지반과 병력의 확대를 바란 것이다.
우선 이러한 지반의 확대로 조위와 동오에 대치하려는 우선적인 준비과정으로 육출기산이 그것이다.
제갈량은 228-234년의 6년간 두차례나 감숙성 천수의 남변 위의 통치구로 진출하여 기산지역이다.
두차례는 진창도를 따라 사곡을 나가 관중에 진출하고 나머지 두차례는 그중 한번은 진령을 넘지 못하고 한번은 강족들의 지반에 진출한 것으로 보이나 사료에는 모호하게 기록되었다.
그래서 6출기산이라 하는데 기산에 두차례 진창도를 통해 2차로 모두 불리하였고 최대의 전공은 1차출기산시 조위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약소국 촉한이 출병하여 안정 남안 천수군의 3군이 제갈량에 투항한 것이다.
이러한 사태로 위명제가 낙양에서 친히 장안으로 가서 조진을 파견하여 제갈량을 막도록 하는데 가정에서 일전으로 마속의 정예부대가 조군에 대패하고 말아 후로절단의 위협으로 철수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어렵게 탈취한 3군은 다시 위나라에 속하고 최대의 전역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아 이후의 출병은 진퇴를 반복하는 지구전으로 진행되고 234년 제갈량은 양도의 단절로 섬서성 미현의 위수남안의 오장원에서 사마의의 조위군과 대치하고 둔전을 실시하고 장기주둔을 준비한다.
이대책은 의미심장한 것으로 이곳에 장기주둔으로 진창이서의 촉한의 지반으로 확정이 가능한 것이나 역량부족으로 100여일간 대치후 234년 제갈량이 군중에서 병사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촉군은 철수하는데 공성계고사와 사마의와 대치는 근본적으로 허구여서 삼국연의의 분식으로 독자들은 모두가 哀惜(애석)해 하는데 허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제갈량의 사망은 촉한으로서는 청천병력의 사태로 류선의 비상은 극에 달하고 기둥이 무너진 것이다.
류선은 17세에 등극하고 10여년동안 제갈량의 집정으로 류선은 30세에 달하여 분공의 통치형태에 주변의 모함으로 제갈량은 곤경에 처한 상태에서 병사하고 만 것이다.
제갈량사후 촉중의 부로향친들은 각지에서 건묘를 바라고 기념하길 촉구하나 류선은 일소에 부쳐 적의를 보인다.
그래서 최후로 성도 류비의 능묘변에 사당을 세우기로 타협하고 제갈량사가 세워진다.
이곳이 성도의 무후사로 저명한 경점이 된 것인데 무후사는 아주 소규모이지만 문인묵객들의 대련으로 가득하여 추모의 정이 깊은 곳이다.
그래서 류비의 광채를 가져가 버려 삼국지의 저자인 陳壽(진수)는 촉국인으로 촉의 백성들의 표정을 생동하게 전한다.
무후사는 춘추시 정국인의 자산에 대한 추모의 염을 능가하였다고 전하는데 제갈량의 촉중 치국의 정도를 알수있는데 수백년이 지나고 수천년이후에도 추념의 정은 식을 줄을 모른다.
당조의 시인 두보는 촉상을 남겨 出師未捷身先死 長使英雄淚滿襟이라 하여 애절한 정을 표했다.




蜀相
丞相祠堂何处寻⑵?锦官城外柏森森⑶。
映阶碧草自春色,隔叶黄鹂空好音⑷。
三顾频烦天下计⑸,两朝开济老臣心⑹。
出师未捷身先死,长使英雄泪满襟








《艺文类聚》版
诫子书
夫君子之行⑵,静以修身⑶,俭以养德⑷。非澹泊无以明志⑸,非宁静无以致远⑹。夫学须静也,才须学也⑺,非学无以广才⑻,非志无以成学⑼。慢则不能励精⑽,险躁则不能冶性⑾。年与时驰⑿,意与日去⒀,遂成枯落⒁,多不接世⒂,悲守穷庐⒃,将复何及⒄! [3] 

诫子书《太平御览》版

诫子书
夫君子之行,静以修身,俭以养德。非澹泊无以明志,非宁静无以致远。夫学须静也,才须学也,非学无以广才,非志无以成学。慢则不能励精⒅,险躁则不能冶性。年与时驰,意与日去,遂成枯落,多不接世,悲守穷庐,将复何及!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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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변대학교 교수
매일경제 MBN 중국 경제문화 연구소장
                            박기수

[출처] 정사 삼국지(4부)제갈량의 출사표-鞠躬尽瘁、死而后已|작성자 박기수